최초로 신입사원이 해외 시장 개발에 대한 자료를 직접 사장에게 보고하여 해외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삽시간에 회사 전체에 퍼졌다.
회사의 미래 전략 방향이 해외 시장이 될 것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도 돌았다.
이번 일로 인해 그동안 국내 시장에 집중하던 회사의 전략이 해외의 거래선과 시장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국내 영업에 밀려 외인부대 취급을 받던 해외 영업은 좋은 기회라 판단하여 본격적인 해외 시장 개발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모처럼 해외 영업은 활기가 돌았고 신 과장은 나의 첫 해외 출장 준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거래선과의 과거 히스토리와 새로 준비 중인 샘플 등을 잘 정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출장 준비가 마무리될 무렵 사장실로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곽상무와 함께 올라가려고 했더니 곽상무는 무슨 일인지 아는 듯 혼자 올라가라고 했다.
출장 날짜가 내일인데 사장실 호출이라 하니 긴장이 되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하고 사장실에 올라갔더니 바로 들어오라는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워드. 앉으세요. 사내에서 불리는 이름이라고 들어서 나도 그렇게 불렀네. 하하하”
“네. 앞으로 해외 사업을 잘하려면 영어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지은 이름인데 다들 그렇게 불러주고 있습니다.”
조금 긴장이 풀렸다.
사장은 꽤 긴 시간 동안 해외 사업에 관한 본인의 생각을 얘기했다.
솔직히 경청을 한다고 했지만 신입사원인 나에겐 너무나 먼 느낌의 얘기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사장의 해외 시장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하지는 그대로 내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지금은 그룹 내 작은 계열사 사장이지만 언젠가는 도양상사를 제대로 키워서 도양 그룹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듯한 야망이 느껴졌다.
그 야망의 첫출발을 해외 시장 개척으로 풀어나가려고 하는 듯 한 인상을 받았다.
그 출발을 내가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뿌듯함과 동시에 책임감이 느껴졌다.
얘기를 마친 사장은 잠시 본인 책상으로 가서 조그만 봉투 하나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며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 회사의 해외 출장비 기준이 작지도 않지만 그리 넉넉하지도 않습니다. 낯선 해외에 가서 고생하는데 거래선과 좋은 곳에서 제대로 된 식사라도 한 끼 하세요.”
감동이었다. 사장이 직접 부족한 출장비를 보조해 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곽상무가 왜 나만 올라가라고 했는지 알았다.
사장은 늘 해외 출장이 있는 직원들을 직접 불러서 금일봉을 주며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하였다.
사장 대신에 해외 시장을 개척하러 다니는 직원들에 대한 응원이자 격려 활동이었던 것이었다.
화장실에 잠깐 들러 액수를 세어보니 꽤 큰 금액이었다.
일부를 남겨서 다음 달 카드 값 갚을 생각을 하니 빛 상환에 대한 여유가 생겨서 기분이 좋아졌다.
출장을 위해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일찍 나왔다.
곽상무는 이번 출장이 회사 전체가 관심을 갖는 중요한 일이니 좋은 성과를 가지고 왔으면 좋겠다며 부담을 주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부서가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 해외 영업이 한 발 앞서 진행한다는 것에 더 자부심을 느끼는 듯 보였다.
직원들의 잘 다녀오라는 배웅을 뒤로하고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덕수궁 주변의 돌담길 사이로 은행나무들이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주변 레코드 가게에서는 부활의 “사랑할수록”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주변의 배경과 노래가사가 잘 들어맞는다.
나도 이제는 사랑할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기막힌 조합의 풍경이었다.
“한참 동안을 찾아가지 않은 저 언덕 너머 거리엔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 넌 서있을 것 같아
내 기억보단 오래돼 버린 얘기지 널 보던 나의 그 모습 이제는 내가 널 피하려고 하나 언젠가의 너처럼
이제 너에게 난 아픔이란 걸 너를 사랑하면 할수록 멀리 떠나가도록 스치듯 시간의 흐름 속에…..”
김포공항 국제선.
해외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마중 나온 사람들과 배웅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공항은 매우 혼잡스러웠다.
다행히 대학 재학 중 다녀온 해외 어학연수 경험이 있어서 탑승 진행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탑승권을 받아 들고 출국 장소로 들어가 이번 출장 일정에 대한 예상 시나리오를 정리하면서 조용히 커피 한잔을 마신다.
4시간 정도의 비행을 거쳐 기장은 홍콩 카이탁(Kai Tak) 국제공항에 착륙 준비를 한다는 안내방송을 했다.
창문사이로 홍콩의 산과 고층 건물들이 보이고 기장은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며 착륙을 진행한다.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이착륙하기 무척 까다로운 공항이라고 여긴다지만 승객들은 고층 건물들 사이로 착륙하는 과정도 홍콩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항공기가 낮아지면서 빌딩도 더 가까워지고 기체가 잠시 흔들리더니 창밖으로 화려한 야경이 펼쳐졌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홍콩의 야경이 눈앞에 들어온다.
왜 홍콩의 야경을 환상적이라고 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홍콩에 도착하면서 느꼈던 카이탁 공항과의 첫 만남에 대한 기억이었다.
입국장을 빠져나와 홍콩의 상징이라 불리는 빨간 택시(Red Cap)를 타고 거래선이 예약해 준 침사추이에 있는 판다 호텔로 향했다.
광둥어만 할 줄 아는 고령의 택시 운전사와는 영어가 통하지 않아 호텔을 찾아가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공항에서 20분 거리라고 알고 있었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중국어도 사용해 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조금 불편했지만 언어 문제는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호텔에 무사히 도착하여 체크인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 버렸다.
여권을 주었더니 내 이름으로 예약된 방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계속 재확인을 해달라고 얘기해 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예약은 안되어 있다고만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노. 노. 노. 분명히 오늘부터 1주일을 이 호텔에서 묵는 걸로 예약을 하고 왔습니다.”
“아닙니다. 전 영문이라는 이름으로는 예약된 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예약을 해준 거래선의 Mr Terry에게 전화를 해보았지만 음성 메시지로만 연결이 되어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문제 된 내용을 얘기하고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남겨놓고 로비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이 지난 후 Mr Terry 가 급하게 호텔로 들어왔고 호텔 직원이 나를 찾아와 Mr Terry를 만나게 해 주었다.
“Mr Terry. 반갑습니다. 도양상사 하워드입니다.”
“Mr Howard. 반갑습니다. 방은 제가 예약을 했는데 확인이 안 되나요?”
“네. 여권을 보여줬더니 안되어 있다고 해서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제가 다시 확인을 해볼 테니 잠시 기다리시죠.”
잠시 후 테리는 환하게 웃으며 내 자리로 왔고 오해가 풀렸다고 이야기하였다.
알고 보니 예약이름이 Howard로 되어있어서 여권에 나온 한국 이름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테리에게 호텔 예약을 부탁만 하고는 확인을 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테리는 당연히 이름이 하워드라는 것만 알았을 테고..
사소한 일로 테리 씨를 호텔로 오게 했으니 미안해졌다.
가벼운 복장을 하고 테리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침사추이 지역에 있는 테리의 단골집으로 향했다.
번화한 상업지역을 지나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가니 사람들로 붐비는 식당이 보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손님들은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맥주를 함께 마시며 특유의 광둥어 억양으로 온 식당 안이 떠들썩하게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인간의 영욕을 위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으려다 맞이한 천벌의 엄중함이 새삼 고마워진다.
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다 들린다면 얼마나 피곤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원하게 맥주 한잔을 마시며 테리와 일과 관련된 얘기를 간단히 시작하려 하였으나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서로의 얘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저녁만 간단히 먹고 호텔로 들어가기로 했다.
호텔로 돌아가는 침사추이 길 주변에는 노점상과 가짜 명품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로 붐벼서 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 없을 정도였다.
쇼핑의 천국이라 불리는 홍콩의 거리에서 관광객들은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내일을 위해 하나 둘 사라지고 나도 그 틈에 끼여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