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게 근처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문화원과 학습원이 있어서 거의 매주 시민들을 위한 행사가 열린다.
행사에 참석한 동호회 회원들 중 일부는 우리 가게에 들러서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러 오기도 하고 주체자인 공무원들은 모든 행사가 끝나고 저녁 회식을 우리 가게에서 진행하기도 한다.
행사가 진행되는 날에는 주변에서 들리는 즐거운 소음으로 마음이 행복해지는 경우도 있고 행사 참석보다는 낮술 한잔을 하려는 손님들이 있어서 평소보다 문을 일찍 열게 된다.
행사 참석은 대부분 아마추어 동호회들이고 평소 문화원에서 갈고닦은 솜씨를 자랑하는 수준이어서 실력의 우위를 가르는 것보다는 그냥 행사 참석을 즐기는 분위기여서 손님이 뜸 할 때에는 문 밖으로 나가서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여보. 오늘은 참석자들 수준이 예사롭지 않은데…”
“그러게. 예전에는 아이들 학예회 수준이었는데 오늘은 장난 아닌데… 하하하. “
”율동이 틀리는 사람도 없고 칼군무에… 아이돌 수준인데…호호호. “
“자주 열리는 행사도 아니니까 동회회들이 연습을 많이 한 후 무대에 오르는 것 같네. 이런 행사들이 은근히 경쟁심이 생기게 하거든. 하하하.”
“그래도 나이 드신 분들이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하며 시간을 보내면 좋지. 건강도 그렇고 특히 치매 예방에도 좋고…”
“뭐든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이면서 살면 다 좋은 거지. 안 그래? 껄껄껄. “
잠깐이었지만 방청객 모드가 되어 동호회 행사를 기분 좋게 쳐다본 후 다시 영업모드로 전환하여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오늘 몇 시부터 영업하시나요?”
“네. 오늘은 4시부터입니다. 지금 문 열었으니까 오시면 됩니다.”
“아…그러면 오늘 저녁 예약 좀 할 수 있을까요? 인원이 좀 많은데?”
“네. 가능합니다. 몇 분이신데요?”
“그럼 저녁 7시에 30명 예약 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오셔서 바로 음식을 드실 수 있게 준비해 드릴까요?”
“네. 그러면 사장님 전화번호 좀 주시겠어요? 문자로 주문을 미리 하도록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녁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아주 가끔 공무원들이 회식을 하러 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30명 정도의 규모면 주문하는 음식과 술의 양이 하루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예약이었다.
시간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재료 손질을 끝낼 즈음에 예약을 한 당사자가 시간보다 일찍 가게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저녁 예약한 사람입니다.”
“아직 시간이 안 됐는데… 일찍 오셨네요?”
“네. 뭐 좀 부탁드릴일이 있어서 먼저 왔습니다.”
짐작건대 단체 모임의 막내인 듯 보였고 행사 준비 때문에 먼저 왔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장님. 자리는 창가 쪽으로 해주시면 될 것 같고 중간중간 이동이 편하게 테이블을 배치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바로 준비할게요. 다른 부탁은 없으세요?”
“음…”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빈 소주병 있으신가요? “
”그럼요. 잔뜩 있어요. “
”그러면… 빈 소주병에 생수를 좀 채워서 3병 정도 준비해 주실 수 있나요? “
“아… 알겠습니다. 다른 부탁은 없으세요?”
“네. 그 정도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시간에 맞춰서 다시 오겠습니다.”
생수로 채워진 소주병이라면 주로 모임의 우두머리가 술이 취하지 않으면서 아랫사람들과 여러 번 건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별한 날에 우두머리가 취해서 주사라도 벌이면 모임의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책임자의 고충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생수로 채워진 소주병을 냉장고에 넣으면서 과거 의전왕이라 불렸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해외 주재원의 일상은 시장 개발이 주요 업무이지만 본사에서 출장 오는 상사들에 대한 의전 업무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직급별로 의전의 수준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티 나지 않으면서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의전의 핵심 기술이다.
그룹의 오너가 출장을 오면 한번 정도는 전체 회식을 하게 되는데 사전에 준비했던 것이 우롱차를 양주병에 미리 담아서 별도 보관했었다.
색깔은 양주와 똑같아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였고 직원들 대부분은 회장님이 술이 많이 강해진 것 같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감쪽같았다.
그리고 건배를 몇 번 하고 난 후에는 엔딩곡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 노래가 바로 ‘우리는’이라는 곡이었다.
회장님과 함께 어깨동무를 한채 큰 원을 그린 상태에서 돌아가며 한 소절씩 부르며 행사를 마감하곤 했던 기억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떠오르지만 그 당시엔 혹시라도 눈치를 챌까 봐 노심초사하며 마음을 졸였던 기억도 났다.
오랜만에 의전의 기술을 떠올리게 한 팀들이 도착하여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먹고 마시기 시작하였고 준비된 생수 소주는 상사로 보이는 사람의 테이블에 놓여 참석한 사람들과 연신 잔을 부딪히며 건배를 하는 모습이 다행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워 보였다.
행사는 무사히 끝났고 담당 직원은 계산을 마친 후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하다며 근처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가져다주었다.
“너무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음식도 맛나고 다들 만족해서 다행입니다. 다음에도 행사 진행할 때 연락하겠습니다.”
“저희가 고맙죠.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주시니…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리고 생수 소주는 아주 자연스러워서 오늘 의전은 최고 점수입니다. 하하하.”
“아… 그런가요? 헤헤헤. 눈치챌까 봐 걱정을 했었는데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하하하.”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예전의 기억도 나고 그랬네요.”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행사 담당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갔고 다음 손님을 위해 정리를 하느라 가게는 분주해졌다.
티 나지 않고 뒷말 나오지 않게 해야 하는 의전의 기술을 행사 담당자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아 회사생활은 승승장구하면서 꼭 성공하기를 바라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