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잘 다녀왔습니다.”
“수고 많았어요.”
신 과장과 미스고가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하지만 회사의 분위기가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늘 먼저 출근하던 곽 상무도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 무슨 일 있어요?”
미스고에게 물어보았지만 미스고는 나중에 얘기하겠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본능적으로 곽 상무 신상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였다.
곽 상무는 아직 출근 전이어서 신 과장에게 우선 업무 보고를 간단히 하기로 하였다.
지난 일주일간의 업무 과정을 자세히 설명을 하고 진행되는 오더의 납기 일정에 대하여 공장과 재 확정 작업을 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리고 짱에게서 받은 군복 용 제품 샘플에 대해 신 과장과 협의를 하였다.
“과장님. 이번에 새로 만난 Tsang이라는 친구의 샘플을 받아왔습니다. 우리 공장에서 생산이 가능한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
신 과장은 내가 건넨 샘플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우리 공장에서 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하였고 대량의 이런 오더를 받은 적이 그동안 없어서 공장에 다시 한번 확인을 한 후 짱에게 회신을 주기로 하였다.
이래저래 첫 출장의 결과가 다시 한번 회사 내에 알려질 거라 생각하니 묘하게 책임감이 밀려오는 듯하였다.
“신 과장님, 곽 상무님은 언제 나오시나요? 업무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곽상무의 신상에 문제가 있는지 넌지시 물어보았다.
신 과장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가 홍콩으로 출장을 갔던 일주일 사이에 회사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해 주었다.
내가 없던 일주일 동안 회사에서 자체 내부 감사를 진행했다고 하였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진행되던 감사였는데 이번에는 곽 상무를 특정하여 진행하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하였다.
부서 내에서도 곽 상무의 행동에 대해 늘 불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실적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기도 하였고 회사의 비용 집행에 있어서도 규정을 위반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서의 성과는 모두 곽 상무의 공이었기에 입사 동기들보다 더 빨리 임원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고 그럴 때마다 곽 상무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던 부서의 담당자들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서 늘 전전긍긍하였다.
“그럼 이번 감사의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아마 곽 상무는 해임될 것 같고 지시에 따라 행동한 담당자들도 징계를 피할 수 없을 거야.”
“상사가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인데 징계를 주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순진하긴. 불법적인 일이라 판단되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회사의 규정이니까 그 규정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지.”
시킨 일을 열심히 한 죄로 징계를 받으니 참 아이러니 하였다.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도 담당자들과 똑같은 방조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았다.
그게 조직이라고 생각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곽상무는 해임되었고 담당자들은 경중에 따라 정직과 감봉 등의 징계를 받았다.
억울해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힘없는 담당자들이었고 징계가 확정되면 승진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대부분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옮겨 가는 것이 순리였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었다.
부서의 대부분은 곽 상무의 해임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었고 오로지 관심은 누가 그 후임에 올 것 인가하는 것뿐이었다.
한동안 공석이 될 듯싶었다.
“그러면 곽 상무는 안 나오시겠네요?”
“아마 내일쯤 나와서 직원들 인사하고 함께 식사하고 갈 것 같아.”
식사하는 자리도 좀 애매하겠다 싶었다.
축하를 하기도 그렇고 징계를 받아 퇴임하는 사람이니 위로하기도 그렇고. 내 위의 상급자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는지 학습만 하면 될 일이었다.
신 과장은 이번 출장 기간에 받아온 주문 물량을 올해 안에 모두 선적을 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곽 상무였으면 물량의 일부가 내년으로 나누어져서 실적을 분산하였을 게 뻔했지만 신 과장은 모든 실적을 올해 안으로 잡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다.
다만 대량 주문이 예상되는 군복 제품은 내년에 일부 물량을 넘기는 것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실적은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예상이 되자 부서는 활력이 넘쳤다.
전화통에 불이 난다는 표현이 딱 맞을 듯하였다.
여기저기서 바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부서는 활기차 보였다.
일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힘든 줄 도 모를 정도로 하루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영업의 실적효과가 이렇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몰고 오는 게 신기했을 뿐이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 또한 학습과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있었다.
곽상무가 공석이 되었으니 사장에게 해 야할 해외 출장 보고는 신 과장이랑 함께 들어가기로 하였고 자료를 최대한 빨리 정리하여 보고 날짜를 잡기로 하였다.
입사 동기들로부터 해외 출장을 다녀왔으니 함께 술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
다들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6명의 입사 동기들과는 가끔 회사 주변의 밥집에서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상사들 험담을 얘기하며 스트레스를 풀곤 하였다.
오늘도 같은 곳에 모였고 늘 먹던 메뉴에 소주 한잔을 하면서 출장 다녀온 얘기를 시작하였다.
아직 아무도 가보지 못한 해외 출장이니 조금 부풀려서 얘기해도 다들 부러워할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업무와 관련된 일에는 관심들이 없었고 업무 외적인 일에 관심들이 많았다.
영화나 TV에서만 보던 홍콩의 야경이 정말 그렇게 멋있는지, 맛난 음식으로 무얼 먹어봤는지, 홍콩의 아가씨들은 예쁜지… 공항에 착륙할 때 보았던 야경 얘기와 랍스터라는 바다 가재를 회로 먹은 얘기.. 그리고 VOLVO 클럽에서 만났던 아가씨들 얘기… 조금 과장되게 얘기했더니 다들 부러워서 난리가 났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표현이었다.
한참을 떠들며 시간을 보냈고 동기들 녀석들 모두 회사의 최초 기록을 우리 동기들이 계속 만들 자며 의기투합하기로 하였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내 주변으로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양복에 스며든 삼겹살과 담배 냄새로 인해 주변에 있기가 좀 거북스러울 것 같았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섯 명의 동기들이 먹어 치운 삼겹살만 해도 돼지 한 마리는 될 것 같았다.
지하철 기둥에 기대어 홍콩 생각을 잠깐 해 보았다.
문득 빅토리아 항구에서 만났던 채 혜령이라는 아가씨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 연락처를 주었지만 그녀가 연락을 하지 않으면 만날 길이 없으니 그녀의 연락처를 받아 두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아쉬움이 밀려왔고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옥탑방은 일주일을 비웠더니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온 곳에 한기가 느껴졌다.
집주인에게 수리를 부탁했지만 겨울 초입의 날씨에 이곳저곳에서 보일러 수리를 요청하다 보니 수리공이 내일쯤 오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입안에서 입김이 난다.
마치 공룡이 불을 뱉은 뒤 나오는 연기처럼 보였다.
더욱 걱정은 뜨거운 물을 사용할 수 없으니 몸에 밴 삼겹살과 담배 냄새는 씻지도 못하고 자야 할 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동굴처럼 만들어진 이불속으로 몸을 던지고 얼굴까지 뒤 집어 쓴 채로 잠을 청했다.
아침을 맞이한 옥탑방의 냉기는 마치 냉동고에 있는 듯하였다.
유리창은 성애가 끼여 눈 온 듯 하얗게 변해 있었고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그곳에 “나는 살아있다”라 쓰고 출근 준비를 하였다.
혹시라도 주인이 보일러 수리공이랑 들어왔을 때 무탈함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하였다.
출근 준비할 것도 없었다.
오늘 입고 갈 양복을 대충 입고 동네 목욕탕에 가서 씻고 나가기로 했다.
노부부가 하는 오래된 목욕탕이지만 손님이 많지 않아서 늘 조용한 곳이었다.
뜨끈한 탕 속에 몸을 밀어 놓으니 동태 같았던 내 몸이 자연스레 녹아드는 느낌이었고 전날의 피로가 싹 사라졌다.
서울에서도 찾기 힘든 정감이 가는 동네라는 생각을 하지만 돈만 조금 모이면 빨리 옥탑방을 벗어나 조그마한 아파트 전세로라도 옮길 생각은 늘 하고 있었다.
너무 덥고 너무 추운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옥탑방의 실체였기 때문이었다.
지킬 과 하이드처럼….
사무실 분위기는 조용하였다.
징계를 피하지 못한 직원들의 눈치도 봐야 하고 곽 상무와 마지막 저녁을 해야 하는 날이다 보니 다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공장에서 걸려온 전화는 다시 한번 사무실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짱의 군복 오더를 공장에서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신 과장은 회사 최초로 대량 주문이 온 것도 처음이고 그것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공장도 처음 있는 일이어서 생산 진행은 기존 주문보다 더 세심하게 관리해 나가기로 하였다.
주문 금액만 250만 불이 넘는 아주 대형 오더였기에 다들 흥분하였고 이 소식은 회사 내에 빠르게 퍼져 나갔고 신 과장은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이번 출장으로 거의 500만 불에 해당하는 주문을 받아왔으니 당연히 축하를 받을 일이라 생각하였다.
출장보고를 위한 업무도 거의 정리가 될 무렵 사장실에서 급하게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신 과장과 나는 사장실로 향했다.
아마도 우리 부서가 아닌 다른 부서장이 이 내용을 사장에게 미리 보고를 한 듯하였다.
긴장이 되었지만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온 출장보고 내용에 걱정할 일은 없을 듯하였다.
사장실로 들어간 우리는 먼저 사장의 얼굴부터 살펴보았다.
예상대로 기분이 좋은 듯 보였고 환하게 우리를 반겨 주었다.
“앉으세요.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번에 해외 영업에서 다녀온 출장 결과로 회사에 좋은 소식이 많던데 직접 듣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하하하.”
사장은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로 우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번에 하워드가 출장을 다녀온 타이밍이 아주 중요했다고 생각합니다. 거래선에게 회사의 변화에 대한 설명도 충분히 해주었고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판매를 할 수 있도록 공장의 체질 개선도 잘 마무리된 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신 과장은 사장에게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간단하게 보고를 시작하였다.
회사의 변화가 영업에 많은 힘이 되었음을 표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하워드의 활약이 아주 컸던 것 같은데 직접 들어보고 싶네요. 현장에서 직접 겪은 내용이 흥미진진할 것 같은데… 하하하.”
“네. 처음 경험한 해외 출장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회사의 변화로 인해 영업의 결과가 긍정적으로 올 수 있다는 경험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런 경험이 시장 개발을 해 나가는 상황에서는 큰 힘이 될 듯합니다.”
회사의 노력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시작하였지만 내 자랑도 슬쩍 끼워 넣는 것을 잊지는 않았다.
그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거래선을 발굴하는 과정도 조금은 과장되었지만 내 열정의 결과임을 슬쩍 내 비추었다.
사실이었고 그런 내용은 다른 부서의 사원들에게 알려줘도 나쁘지 않은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애플 우드라는 회사를 개발할 때의 일화는 아주 흥미롭게 들으며 거래선 개발의 첫 성공사례로 기억될 것이라는 격려와 사례 연구를 통해서 회사 내에 널리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이제 최초의 역사를 하나씩 만들어가는 과정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 하워드가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욱 힘이 생기고 든든한 우군을 얻은 느낌이 들었다.
출장 보고를 마친 후 사장은 곽 상무의 인사에 대한 개인의 고뇌를 잠시 얘기하였다.
개인적인 친분 관계와 공식적인 회사의 관계 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한 듯 보였다.
하지만 회사를 위한 길이 어떤 결정이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장은 개인적인 친분 관계를 무시하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 인간적이지 못하고 자기 사람을 챙기지 않는 무심한 리더라는 평에 대해서 조금 상처를 받은 듯 보이기도 하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모든 것이 회사를 위한 결정이었음을 내 비쳤다.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하는 리더의 고뇌하는 모습에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누가 알겠는가…
그게 악어의 눈물인지 진정한 눈물인지…
그런 결정 또한 내면에 숨어있는 지킬 과 하이드의 양면성 사이에 존재하는 큰 벽처럼 느껴질지…..
곽 상무가 사무실에 와 있었다.
예전에 앉던 자리가 아닌 손님 접대용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회사 내에서의 신분 변화는 곧 자리까지 변화는 것이었기에 담담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워드. 이번 출장 결과가 아주 좋다고 하던데... 고생 많았네.. 앞으로 회사에서 큰 역할을 할 거라 믿네.. 하하하.”
“모든 것이 상무님 결정으로 얻어진 결과인데요 뭐… 곽 상무님이 출장 결정을 내려 준 덕분에 얻어진 결과물이어서 누가 가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겁니다.”
“하워드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네.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했지만 그건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나는 거니까. 정말 잘해줘서 고맙네.”
좋게 평가를 해주는 곽 상무의 말 한마디에 더 이상 함께 일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곽 상무는 왜 그리 되었을까?
임원이 되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표로 삼았었고 더 크게는 사장까지 노렸던 사람이었다.
그 임원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불법과 탈법 행위 등을 서슴지 않았다.
사내 정치는 기본이었고 동료와 부하 직원을 찍어 누르는 행동도 주저하지 않았다.
본인의 실력보다는 승진을 위한 행위에 몰두하였고 의사 결정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일에만 엄청난 노력을 했을 뿐이었다.
결국 곽 상무는 정글로 불리는 사내에서 사냥에 성공한 포식자였을 뿐 업계에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곽 상무가 앉아있던 자리가 임원이었을 뿐 곽 상무가 자체가 임원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회사의 역사였던 곽 상무와의 인연은 오늘의 저녁 시간 까지었고 함께 식사를 하는 내내 과거에 힘들게 고생했던 얘기만 할 뿐 미래에 대한 얘기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과거의 역사는 사라지고 새로운 영역과 역사만이 그 자리를 채울 뿐이었다.
곽 상무는 회사의 역사였으니 당연히 회사와 함께 영원할 줄 알았다.
부서원 모두 그렇게 생각을 했었고 그 라인에 줄을 대려고 공을 들인 직원들도 많았고…
영원할 건 없는데 모두 영원하기를 바라는 아이러니…
그게 조직 생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