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의 명과 암

by 전선훈

곽상무의 후임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신 과장이 해외 영업의 업무 보고를 사장에게 직접 하기로 하였다.


보고서를 만들고 결재를 받아야 할 칸의 숫자를 보면서 참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였다.


담당, 주임, 계장,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사, 상무, 전무, 부사장, 사장…


무려 12칸으로 이루어진 결재방을 찍으면서 느낀 감정이었다.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듯한 결재 라인과 어쩌다 상사가 보고서 내용이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만들기를 반복하였다.


최종 보고서가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들어가는 시간이 정말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니 이런 과정 또한 상사의 마음에 들기 위해 버텨야 하는 조직생활의 필수 요소이기도 하였다.


다행히 신 과장은 내가 만든 보고서에 특별한 이견이 없었고 신 과장의 의견 일부를 보태어 사장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업무가 정리되었다.


모든 것이 실적이 바쳐주니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보고서에 실적 달성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불필요한 내용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조직의 생존 본능이기도 하였다.


홍콩의 짱에게 받은 군복 오더는 생산이 잘 진행되어 선적을 하기 전 샘플에 대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오후 짱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다. 아주 들뜬 목소리였다.


“하워드. 샘플 결과가 좋게 나왔고 홍콩 국방부에서 선적 승인이 났으니 바로 선적 진행해 주세요. 신용장은 내일 개설이 될 테니 선적 일정을 확인해서 팩스로 보내주세요.”


“정말입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하워드가 했지요. 예전에 납품받았던 회사의 제품보다 훨씬 품질이 좋다는 반응입니다. 향후 국방부 주문에 대해서는 우리가 우선순위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네. 잘 알겠습니다. 바로 선적 일정 정리해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기쁨의 미소를 지으며 보이지도 않을 전화기 너머의 짱에게 연신 허리를 굽히며 고맙다는 말만 계속하고 있었다.


그런 나의 행동에 눈치 빠른 미스고는 일이 잘 풀렸다는 것을 직감한 듯 물었다.


“하워드. 군복 샘플 통과된 거예요? 정말 잘 되었네요... 호호호 “


“네. 선박 회사에 확인하여 선적 일정 빨리 확인해서 알려주세요. 하하하.”


“축하해요 하워드. 이런 대형 오더는 회사 역사상 처음이어서 오늘은 기념 회식이라도 해야겠는데요. 호호호.”


사장에게 보고를 마치고 들어온 신 과장은 홍콩에서의 낭보에 함께 기뻐하였다.


당분간은 실적에 대한 부담이 사라진 것에 더욱 기뻐하는 듯한 눈치였다.


신 과장은 바로 사장실로 올라가 이 소식을 보고하였고 삽시간에 회사 내에 다 퍼졌다.


과장하여 보고될 일은 없었다. 이미 결과는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부러움 섞인 축하 전화가 걸려왔고 일일이 대응하기 힘들어 우리 팀은 잠시 밖으로 피해 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처음 맺은 인연의 친구에게 이렇게 큰 선물을 받으리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 했고 그 선물이 주는 행복을 지금은 즐기기만 하면 될 뿐이었고 이 모든 것이 내 활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고 있었다.


연말이 다가온다.


올 한 해 해외 영업팀의 실적은 목표를 훨씬 웃돌 것으로 예상되었다.


출장 중 받은 주문 물량의 90% 이상을 선적하였고 그 이후에도 품질 불만에 대한 클레임이 없어서 추가로 계속 주문이 오고 있었다.


안정적으로 주문을 유지하는 거래처가 늘어난 이후 실적에 대한 부담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내년 사업 계획에 목표 실적만 더 늘어날 뿐 조직 생활의 스트레스는 남의 부서 일이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의 모든 거래처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우리의 제품을 원하는 현지 거래선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밀려드는 주문에 공장은 24시간 가동체제로 바뀐 지 오래되었다.


예전과 비교해 보면 공장 근로자들의 표정이 한껏 밝아 보였다.


소득이 올라가는 건 회사 생활에서의 가장 큰 기쁨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는 몰라도 해외 영업팀과 관련된 모든 업무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실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내 영업팀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영업사원들은 아예 회사에 들르지 않고 직접 거래처로 출근하였다.


수금을 미루는 업체의 사장을 하루 종일 쫓아다니며 밀착 수행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때로는 울기도 하고 때로는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밀린 금액을 받아 내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해외 영업팀은 수금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자유로웠다.


모든 것이 신용장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합의된 날짜에 선적만 이루어지면 은행에서 자동으로 입금이 되었기에 물건만 잘 만들어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실적의 명과 암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조직 생활이었다.


최근에 있었던 감사행위 또한 불법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서에서 가공된 실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른바 마사지 작업을 해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곽 상무의 해임으로 인해 불법 행위에서 자유로워진 해외 영업팀은 시장 개발에 더욱 집중하였다.


좋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은 시장 개발에 있어서 아주 큰 무기가 되었고 해외 여기저기서 주문이 밀려왔다.


당분간은 실적에 상관없이 시장개발에 집중할 수 있어서 여러모로 편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치 정글 속의 상위 포식자처럼 아무 걱정 없이 내 영역을 잘 지켜 나가고 있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직장 생활을 유지하였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실적 달성이 예상되는 부서와 그렇지 못한 부서의 명암은 명확하게 드러났다.


달성이 예상되는 부서는 매일매일이 즐거운 회식 분위기였고 그렇지 못한 부서에서는 고성과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승진을 앞둔 직원들의 표정과 분위기도 명확하게 갈렸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잘한다고 하여도 실적이 바탕이 되질 못하면 승진은 꿈도 못 꾸었고 동기보다 한참 뒤처져서 만년 과장으로 회사 생활을 마감하는 이들도 여럿 보았다.


냉혹한 사회 현실이었고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가려면 어쩔 수 없이 영업실적이 좋은 부서에 배치가 되는 것을 희망하게 되었다.


벌써 어느 부서의 누가 이번에 옷을 벗게 될 것 같고 누구는 승진이 될 거라는 미확인 소문이 무성하게 떠돌았다.


실적이 좋은 부서의 책임자는 직원들에게 연말 인사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표정관리 하고 다니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신 과장은 그동안 다른 동기들보다 한참 동안 승진을 하지 못한 채로 과장 직급을 달고 있었고 이번 해외 영업 실적달성이 신 과장에겐 좋은 승진 기회이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부서에서 신 과장은 이번에 차장으로 승진을 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미리 축하 인사를 건네는 부서장들도 있었다.


표정관리를 하느라 바쁜 신 과장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하였다.


실적 달성의 훈장이 주는 열매는 승진과 돈이 보장이 되는 이른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비유되었기에 모든 조직원들의 꿈이기도 하였다.


신입 1년 차로 조직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1년의 과정이 몇 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불편 부당한 일들도 겪었고 조직 생활이 아니었으면 경험하지 못했을 일도 겪었다.


그 과정 속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들 과의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었던 것 같았다.


아쉽고 슬프고 기쁘고 즐겁고 화나고..


이런 과정의 반복이었던 1년의 신입 생활이 점점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전 08화영원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