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감을 정리하는 종무식 날이었다.
회사는 아침부터 술렁거렸다. 사람들이 게시판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떤 부서 소속의 직원은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하였고 누군가는 울상이 되어 자리를 떠나는 모습도 보였다.
승진과 퇴사 인원에 대한 발표가 붙어 있었다.
난 우리 팀의 신 과장은 당연히 차장 승진 명단에 포함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여 별 관심 없이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도 제일 먼저 사무실에 들어온 후 팩스로 들어온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나 둘 선임 직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인사 발표의 결과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 같았다.
미스고가 내 자리로 오더니 특유의 웃음소리로 한마디 던진다.
“하워드. 축하해요. 호호호.”
“미스고,뭘 축하해요?” 난 되물었다.
“모르시나 보네요. 게시판에 붙었던데…호호호.”
“뭐가 붙어요? 난 보지도 않고 그냥 올라왔는데... 하하하.”
“주임으로 승진했네요. 3년 걸려야 되는 일을 1년 만에 했으니 당연히 축하할 일이지요. 호호호.”
“네… 정말요? 저는 신 과장만 승진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고 보지도 않고 올라왔어요”
내용을 보지도 않고 올라왔으니 궁금해졌다.
“신 과장도 승진된 거죠?”
“그럼요. 신 과장도 이번에 차장으로 승진했어요. 호호호. 우리 해외 영업팀의 경사랍니다.”
미스고는 마치 자기가 승진이라도 한 듯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믿을 수 없었다.
3년 걸리는 주임 직급을 1년 만에 승진을 했다고 하니 내 눈으로 결과를 다시 확인하고 싶어서 로비로 내려갔다.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내 눈으로 직접 승진 발표를 바라보는 날이 오다니…
특별 승진 해외 영업팀 주임 전 영문.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내 이름이 적혀 있는 승진 발표를 바라보고 있으니 지난 1년의 생활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기뻤다.
그것도 무척 기뻤다.
이번 승진과 퇴사의 기준이 이번에도 철저하게 실적 달성이라는 기준으로 평가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실적 달성의 명과 암이 승진 심사에 그대로 반영이 된 듯하였다.
승진 명단에 신 과장과 내 이름이 들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리다가 곽상무의 후임으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하 인걸 전무라고 적혀 있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부서장으로 오는 사람이니 괜한 친근감이 들었다.
내부 인사는 아닌 듯하였고 아마도 외부에서 영입된 인사인 것 같았다.
곽상무의 그림자를 이번에 완전히 지우기 위한 인사인 듯 느껴졌다.
해외 영업팀은 이번 승진 발표의 최대 수혜자였기에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를 받기에 바빴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속으로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오전 중 업무를 마치고 10시에 종무식이 진행된다는 사내 방송이 나왔다. 종무식을 끝으로 한 해를 마감하고 일찍 퇴근을 하는 것이니 다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삼삼오오 모여 이번 인사에 대한 험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외 영업팀 3명은 간단한 업무 정리를 위해 상담실로 모였고 가볍게 커피 한잔을 하면서 서로 축하를 해주었고 한 해 업무 마감 정리를 하였다.
“하워드가 우리 부서에 들어온 이후 연말에 좋은 결과가 있어서 기분이 좋네. 내년에도 힘차게 파이팅 합시다.”
“네. 파이팅. 하하하. 호호호.”
미스고와 나는 동시에 외쳤고 서로 쳐다보며 얼음 땡 하고 외쳤다..
“Teamwork makes the dream work”
꿈은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이라 느끼게 해 준 의미 있는 한 해의 마무리였다.
오전 10시.
강당에 모인 모든 직원들은 일렬로 서서 사장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진자들은 단상 앞에 일렬로 서있으라 했다.
종무식 행사 중 승진 임명장을 수여하는 행사가 있다는 총무 부장의 말이 있었다.
좀 쑥스러웠지만 은근히 어깨가 으쓱되게 만드는 행사였다.
오늘 이후 이름보다는 직급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는 특별한 의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직급 순서에 의해 나는 맨 마지막 위치에 서있게 되었고 긴장된 마음으로 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어릴 적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기다리는 듯한 학생들의 모습과 별 반 차이 없어 보였다.
예전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듣기 싫어서 일부러 쓰러지는 척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여기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떨까 싶은 상상을 하니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사장님 오십니다.”
인사팀의 정 조준 부장이 사장을 모시고 들어오고 있었다.
이름처럼 정 부장은 자기의 목줄을 쥐고 있는 상사에 대해서는 이름대로 정확하게 조준하여 맞춤형 의전을 선보이는 것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고 하였다.
사내에서는 손바닥에 지문이 없다고 하여 노지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인사 부장이었다.
간단한 애국조례를 끝내고 사장의 종무사가 시작이 되었다.
존경하는 도양 상사 임직원 여러분….
으로 시작되는 사장의 종무사는 교장 선생의 훈시와 별 반 차이가 없었다.
세계 경제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른 회사와 차별되는 실적을 올려준 임직원들에게 고맙고 내년에도 더욱 열심히 해서 최고의 회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고 새로운 신규 사업의 확장을 통해 신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도록 하겠다…..
뭐 대충 이런 정도의 내용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작년 종무사와 거의 비슷한 내용이었다고 하였다.
그런 내용으로 종무사를 써주는 인사팀이나 그것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읊는 사장이나 참 한심스러워 보였다.
최상위 포식자인 사장은 자기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사람들을 가까이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대면한 사장의 언행으로 봐서는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장 주변엔 의외로 실력 없고 수준 떨어지는 사람들로 장벽이 쳐져 있다는 느낌을 가끔 받고는 했었다.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부하 직원들에게 인정받고 있는지를 확인하기는 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 최상위 포식자인 사장이니까…
사장의 종무사가 끝나고 승진 직원들에 대한 임명장 수여식이 진행되었다.
한 명씩 사장에게 임명장을 받고 악수하고 사진 찍고… 마지막 내 차례가 되어서 사장 앞으로 나갔다.
사장은 이번 특별 승진은 해외 영업팀의 실적결과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장 개발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루어진 일이라며 배경을 직접 설명하였다.
“해외는 국내 시장과 달리 엄청난 기회가 널려 있습니다. 철저하게 해외 시장에 대한 준비와 개발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우리 도양상사는 그저 그런 삼류 회사로 계속 머물 것입니다. 해외 영업팀의 올해 성과는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준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내년엔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사람으로 회사의 혁신(革新)을 만들어 갈 생각입니다. 임직원 여러분의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며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고에 없었던 사장의 개인 생각에 대한 얘기를 끝내자 모두 박수들 치며 환호하였다.
그동안 소문만 돌았던 해외 시장에 대한 사장의 관심을 공식화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그 얘기를 들으니 반가움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왔다. 해외 시장에 대한 관심은 반가운 일이지만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과정은 지금보다 더 혹독할 것으로 예상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혁신(革新)…
가죽을 벗겨내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혹독함을 과연 우리 회사가 견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변화는 언제나 신선한 것이지만 터줏대감들에겐 피곤하고 귀찮은 일이기에 어떤 모습으로 저항하며 버티기에 들어갈지 예상이 안되었다.
내년의 회사 모습이 신의 한 수 일지 아니면 악수 일지는 또 경험해 보고 부딪혀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종무식을 끝으로 대부분의 직원들은 퇴근을 서둘렀고 우리 팀은 한 해를 마감하기 위해 근처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간단히 승진 축하를 기념하기로 했다.
기쁨에 취한 우리 팀은 시작부터 달리기 시작했고 내년에 더욱 분발하기로 약속하며 술잔을 들었다.
정글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포식자의 정해진 룰에 의해 움직이기만 하면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룰을 벗어나면 가혹한 응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힘없는 무리들은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고 뒤쳐지지만 않으면 다른 포식자에게 잡힐 일도 없는 곳이 바로 회사의 조직 생활이라는 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한 해였고 탈 많고 말 많던 한 해가 시나브로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