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무식을 끝으로 한 해를 마감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시무식을 진행하면서 진행한다.
지난번처럼 강당에 모인 직원들은 사장의 신년사 대신에 하 인걸 전무의 취임식으로 한 해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회사에서 새로 근무를 하게 된 하 인걸 전무를 소개하겠습니다.”
정조준 인사 부장의 간단한 하 인걸 전무 이력이 소개되고 난 후 단상으로 올라온 하 전무는 직원들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한 후 회사의 변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유통업체인 사판 그룹 출신이며 신입사원으로 출발하여 사판 그룹 최고 임원까지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사람이었다.
사판그룹의 이름은 선대 회장이 한국전쟁 중 회사를 만들 때 처음 사용한 이름이었다고 한다.
“사서 판다”는 말의 줄임 말로 유통회사의 기본철학과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만 좀 촌스러운 그룹 이름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회사의 미래 먹거리를 유통으로 정하고 그 업의 의미를 회사의 이름으로 정확하게 표현한 선대 회장의 결정이 선견지명이었음을 느꼈다.
사서 파고 만들어 팔고… 결국엔 내가 하는 무역과 다른 분야로 인식했던 유통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내가 회사를 만든다면 어떤 이름으로 만들지에 대한 고민도 서서히 해 볼 필요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반쯤 벗어지고 부엉이 얼굴 모양의 하 전무는 사장보다는 나이가 좀 들어 보였다.
“도양상사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 하 인걸 전무입니다. 그동안 외부에서 평가하는 도양상사의 모습은 불안정하고 정교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양 그룹 과의 관계도 그렇고 경쟁력을 가진 제조업체를 여럿 두고 있지만 제대로 키우지 못하여 항상 업계 꼴찌를 면치 못하는 현실이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이번 기회에 경쟁력을 갖춘 회사로 거듭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 다음으로 많은 권한을 가진 전무의 취임식에 이처럼 강력한 인사말을 남긴 적이 그동안 없었다고 하였다.
마치 사장으로 부임한 듯한 취임사였다.
시무식 겸 취임식이 끝나자 예전처럼 일상으로의 업무 복귀를 하였다.
여기저기서 향후 하 전무의 업무 방향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관심을 가질 처지는 아니었다.
당장 밀려 있는 일부터 처리를 해야 할 걱정이 우선이었다.
“Hi, Mr Tsang. Happy new year”
짱에게 간단한 새해 인사 겸 업무 관련 전화통화를 시작하였다.
“Hi, Howard”
짱은 늘 짧고 간단한 인사말로 전화 응대를 하는 게 습관인 듯했다.
“짱.. 지난번 얘기했던 마지막 4차 선적 진행이 일주일 정도 연기가 되어야 할 상황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납기 일정을 맞춰 보려 했지만 공장 쪽 상황이 일주일 정도 시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납품 일정은 문제가 없겠는지요?”
“하…” 전화기 너머로 짱의 깊은 한숨이 들려온다.
“하워드… 이번 납품 건은 도양상사와 처음으로 진행하는 일이고 3차 까지는 문제가 없어서 국방부 쪽에서도 만족스러워하는 상황인데… 갑작스레 4차 선적일정이 변경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담당자들과 확인을 해 본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확인 좀 해주세요.”
선적 지연 관련 내용에 대한 상황을 신 차장에게 간단히 보고를 하였지만 짱의 회신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기다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대응 방법을 미리 준비해 놓지 않으면 더 어렵게 될 것 같았다.
“신차장님. 이런 상황에 우리 쪽에서 준비할 수 있는 대응책이 뭐가 있을까요?”
“하워드. 현재는 섣불리 뭔가를 판단하고 준비하기가 좀 어려운 상황인 것 같네. 새로 업무를 시작한 하 전무에게도 전체 상황을 설명한 후 방향을 잡아야 할 듯해서 말이야.”
“신차장님. 이번 대응 방식이 아주 중요한 고비가 될 듯합니다. 예전처럼 통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면 어렵게 시작한 신규 거래선 들과의 관계가 어려워질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당연하지. 얼마나 어렵게 시작한 거래선들인데.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
하 전무의 대응 방식이 궁금해졌다.
변화를 얘기하면서도 돈 들어가는 일에는 인색한 것은 아닐지 기대반 걱정반 심정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팩스기에서 요란한 수신음이 들리더니 홍콩의 Tsang으로부터 팩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팩스로 회신을 하는 걸로 봐서 직감적으로 좋은 내용은 아닐 듯싶었다.
팩스로 들어오는 내용의 첫 소절을 보면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대게 긍정의 의미로 회신을 보낼 때는…We are pleased to inform you that…라는 단어로 시작이 되었고 부정의 의미로 회신을 주고받을 때에는…We are sorry to inform you that…. 이런 단어로 시작이 되었다.
팩스의 첫 문장을 보니 부정의 의미로 시작되는 단어로 시작이 되고 있었다.
국방부 쪽에서 온 회신의 결과가 미안하게도 도양상사의 납기 지연을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납품된 원단을 사용하여 군복을 제작하는 기간까지 20일이 소요되므로 그 시간까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군복 납품을 해주면 되고 그 시간까지 완료가 되지 못할 시에는 마지막 선적 오더는 자동 취소가 될 거라는 내용의 팩스였다.
짱도 차마 전화로는 얘기하기 힘든 내용이었던지 국방부에서 온 팩스 내용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낸 듯하였다.
“신 차장님. 짱의 팩스 내용으로 봐서는 그나마 조금 여유를 준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군복 완제품 일정을 알려준 걸로 봐서는 우리 쪽이 대응을 잘해주면 문제없이 해결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하워드 대응 전략은 무언가?”
“돈이 조금 많이 들어가야 할 방법이어서…..”
내가 말끝을 흐리면서 머뭇거렸다.
아무래도 제일 쉬운 해결 방법이 돈이었기에 핀잔을 들을 각오로 얘기하였다.
“일주일 지난 선적일정을 배가 아닌 Air로 진행을 해주면 완제품 제작 일정에 맞출 수 있을 듯합니다. 다만 비용이 기존 선적비용의 10배가 차이가 나는 게 가장 큰 문제 이긴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앞으로 홍콩 시장에서 강제 철수 당할지도 모릅니다. 지난번 출장 때 회사의 문제로 생긴 문제는 다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얘기를 하고 다녔는데….”
약간 협박성 말투로 신 차장을 압박하였다.
협박성 말투이기도 했지만 부서의 명운과 나의 명예가 걸려있는 일이기도 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 생각은 했네만… 하 전무가 어떤 결론을 낼지 걱정이네. 일단 전체 내용을 정리해서 함께 보고를 한 후 결정을 하기로 하세.”
“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후 전체 내용에 대한 간략한 보고 준비를 끝내고 홍콩의 짱에게 전화를 하였다.
“짱.. 팩스로 내용을 잘 받았고 현재 회의를 하고 있으니 곧 결론을 내서 알려줄 테니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렸으면 좋겠습니다.”
“하워드. 알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전화를 끊고 신 차장과 함께 하 전무 방으로 올라갔다.
처음으로 하는 업무 보고가 클레임에 관한 내용이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돈이 많이 들어가야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해결책이라고 해야 하니 걱정이 되었다.
“어서들 오세요. 해외 영업팀이죠? 앉으세요.”
“안녕하십니까? 해외 영업 신 통달 차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해외 영업 전 영문 주임입니다.”
신 차장과 나는 긴장이 되어서 인지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무슨 보고입니까?”
하전무는 업무와 관련된 일 외에는 관심이 없는 듯 바로 보고 사항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다른 임원이었으면 처음 대면하는 자리이니 덕담도 나누고 그랬을 텐데…
“네. 작년부터 진행하던 홍콩 국방부 납품 건에 문제가 생겨서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작년 한 해 진행되었던 일을 신 차장은 간단히 얘기하였고 이번 선적 건이 회사에 정말로 중요한 사안이니 돈을 좀 써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문제가 발생한 거지?”
“네. 공장의 기계 고장 문제로 부득이한 납기 지연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직 업무 파악을 다 하지 못한 상태여서 물어보는 건데…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사실 좀 오래된 공장이고 그동안 설비에 대한 투자가 좀 미흡해서 이런 문제가 가끔 발생하였었습니다.”
“음.. 그렇군. 이번 오더의 진행을 전 주임이 한다고 들었는데… 자네 의견을 듣고 싶네.”
“네. 이번 문제 해결은 군복 완제품 납기 일정 전에 Air 선적으로 진행하면 문제 해결을 될 듯합니다. 하지만 비용이 기존 선적 진행의 10배가 들어가는 게 문제입니다. 많은 돈이 들어도 문제 해결을 해준다는 인식을 홍콩 거래선들에게 보여준다면 앞으로 더 많은 판매 기회가 우리 도양으로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하하… 확신? 함부로 확신하지 말게. 비즈니스는 어떤 방향으로 튈지 아무도 모르는 거네.”
가볍게 툭 던지는 말이었지만 묵직하게 날아왔다.
공통된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적이라도 함께할 수 있는 게 조직 생활의 법칙이었기에 어떤 방식과 방향으로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니 방심하지 말라는 얘기라 생각되었다.
“우리 회사의 문제로 발생한 일이니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해결을 해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그런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반드시 보완책을 준비하기를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의외의 긍정적인 결과와 빠른 결정에 신 차장과 나는 무척 놀랐다.
지금껏 이런 일은 임원의 책상 위에서 한참 동안 있다가 사장의 심기가 편해지면 결재를 올라가는 방식의 일처리가 대부분이었기에 회사의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좋은 신호라 판단되었다.
“신 차장님. 의외로 빠른 결정이 나서 다행이네요.”
“그러게. 사실은 나도 큰 기대를 안 했었는데.. 아무튼 다행이야.. 하하하”
과거의 관행대로 될 거라 생각하고 초조했던 우리 팀은 의외의 긍정적인 결과를 얻었고 바로 거래선에게 통보하여 후속 작업을 시작하여 계획대로 큰 문제없이 잘 해결될 수 있었다.
짱의 반응은 나의 전화에 반가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나타났다.
“하워드… 정말 해결된 거 맞아요? 난 포기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너무 기뻐요..”
“네. 사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내가 끝까지 요청하였고 안되면 사표까지 쓰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만두지 않고 짱하고 계속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하하.”
나의 노력으로 인한 결과임을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어렵게 만들어진 소중한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어서…
하전무의 업무 처리 방식이 회사 내에 삽시간에 퍼졌다.
회사의 변화에 대한 기대감은 높아졌고 간결한 업무 처리 방식에 대부분 만족한 듯하였다.
회사의 큰 흐름은 이미 하전무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듯 보였다.
모든 부서의 책임자들은 하전무의 업무 방식을 따라 하기에 바빴고 때로는 말투와 버릇도 비슷하게 따라 하는 이들도 보였다.
줄타기의 시작이 된 것이었다.
몇 번을 줄 위에서 떨어져 본 경험이 많은 책임자들은 이번에는 절대 떨어지지 않는 튼튼한 동아줄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언젠가 민속촌에서 본 줄타기 명인들은 끝없는 자기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회사의 줄타기는 노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그저 그런 사람들이 연명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서서히 그 줄타기에 함께 동참해야 할 상황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