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인걸 전무의 파격적인 업무 방식은 도양 상사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간결한 업무 보고 양식이었다.
과거에는 기승전결 형태로 보고서를 만드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고 결론이 날 즈음이면 이미 때를 놓쳐 경쟁사에게 시장 선점의 기회를 넘겨주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전무의 간결한 업무 보고 스타일은 주로 하위 직급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동안 보고서를 만든 작성자와 결재를 진행하는 보고자가 함께 참석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어떤 형태로 결론이 났는지를 작성자는 알기 어려웠고 혹시라도 보고자가 결재권자의 지시 사항을 잘 못 이해하여 전하는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던 적이 많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보고가 실무 담당자와 함께 진행되기에 업무 착오로 인한 기회 손실을 없앨 수 있어서 하위 직급의 담당자들이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부서가 업무 보고를 마치고 일상적인 업무로 돌아가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1주일이라는 시간 동안 하 전무는 도양 상사의 모든 업무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업무의 간결화 작업을 통해 현장에 집중할 수 있도록 회사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버렸다.
“역시 큰 물에서 놀다 온 사람이 다르네.”
신 차장이 커피를 한잔 가져다주며 내게 말했다.
“그러게요. 사판 그룹에서 책임 경영을 하셨던 분이라 그런지 다들 환영하는 것 같습니다. 업무가 빨라지고 현장에 집중할 수 있으니 좋습니다. 하하하.”
“이런 분위기가 오래가야 할 텐데… 늘 새로운 사람이 올 때마다 변화는 있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거든. 터줏대감들은 변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새로 온 임원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포기하고 그냥 과거의 도양 상사 업무 스타일에 자연스레 적응되었으니까. 하 전무의 새로운 업무 방식도 얼마 안 가서 포기할 거라 생각하는 직원들도 있을 거야. 하하하”
“지금 이런 변화가 계속 유지되면 좋겠습니다. 현장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잡일이 많이 없어지니 좋긴 하네요. 하하하.”
“그러면 좋지.. 지난번 선적 변경 관련 된 클레임도 과거 곽 상무 시절이었으면 어림없는 얘기였지. 하 전무의 빠른 결정으로 거래선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는 회사에 큰 이익으로 돌아올 거라 생각하네. 아무튼 다행이지.”
신 차장은 하 전무의 업무 스타일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웬만해서는 자기 위의 상사에 대해 좋은 말을 하지 않았던 예전 모습과는 달리 하 전무의 사소한 결정 하나에도 칭찬하기 바빴다. 변화는 그렇게 내 주변의 사람들부터 바뀌게 만들었다.
“신 차장님. 새해도 되고 했으니 명동 지역 인도 거래선 방문을 했으면 하는데.. 잠깐 시간 좀 내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오. 그래요.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하워드가 한발 빠르게 움직여 주니 내가 할 일이 별로 없네.. 다녀오쇼. 하하하.”
“신 차장님. 저도 명동 외환은행 본점에 볼 일이 있어요. 전 주임이랑 함께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미스고도 업무를 위해 명동에 가겠다고 신 차장에게 말했다.
“외환은행 업무는 지난번에 다 정리가 되지 않았나?”
“아니요. 은행의 네고 서류에 보완을 해줘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알았어. 빨리 업무 보고 들어오쇼. 쇼핑하러 돌아다니지 말고…”
신 차장이 미스고를 향해 한마디 툭 던졌다.
“네. 업무 끝내고 바로 들어오겠습니다.”
미스고는 가끔 업무를 핑계로 명동을 자주 다녔다.
업무는 아주 짧은 시간에 보고 대부분의 시간은 주변 상가를 돌아다니며 새로 나온 신상품을 구경하는 것으로 보냈다.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 신 차장은 잘 알면서도 외근 나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미스고와 나는 간단한 서류를 챙긴 후 명동으로 향했다.
신년이라 그런지 명동 거리에는 털모자를 눌러쓰고 완전 무장을 한 동남아 관광객들이 꽤 많이 보였다.
그들에겐 낯선 한국의 겨울 날씨가 관광 상품으로 판매가 되어 여기저기 단체 여행 깃발을 들고 다니는 여행 가이드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우리에겐 일상적이고 익숙한 삶의 방식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체험을 할 수 있는 멋진 경험을 만들어 주는 것이 여행이기에 그들의 모습이 부러워 보였다.
클레임 해결이 잘 정리된 이후 신 차장은 예전과 다르게 웃음이 많아졌다.
미스고는 신 차장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는데 요즘의 신 차장 모습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고 했다.
거래선이 늘면서 실적 달성에 대한 부담이 사라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고 조금씩 변화되는 회사의 업무 만족도 또한 한몫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미스 고. 업무 잘 보고 들어가세요. 난 거래처 잠깐 들렀다 갈게요.”
“그래요. 업무 잘 보고 들어가요. 난 은행 들렸다가 잠깐 다른 일 보고 들어 갈게요. 호호호.”
미스 고의 웃음소리 의미를 잘 알기에 빨리 헤어지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신상품을 구경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주는 것이 나의 업무에 도움을 주는 것이기에 특별히 복귀 시간을 정해주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늦게 들어와 혼을 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건 신 차장의 몫이라 판단하였고 난 늘 선한 역할만 하는 것이 오히려 업무에 도움이 될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이 수닐 씨. 새해 잘 보냈어요?”
“하이 하워드. 반가워요.”
수닐은 늘 웃음 지며 날 반겨주었다.
“하워드. 내가 오늘 사무실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와줘서 놀랐어요. 역시 하워드의 업무 방식은 늘 기대 이상입니다. 하하하.”
“거래선을 방문하여 상담하는 것이 저의 일인데요 뭘. 하하하.”
“그러잖아도 하워드와 상담을 해야 하는 건수가 생겼는데 잘 되었네요. 일단 앉으세요.”
여직원을 시켜서 홍차를 내 앞으로 내어 놓았다.
예전에는 좋아하지 않았는데 수닐 사무실을 다니며 몇 번 마셔본 이후로는 홍차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오히려 커피보다는 좀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애타게 나를 찾으셨나요?”
“지난번 하워드 홍콩 출장 갔을 때 내가 알고 있는 거래선을 소개해주려고 현지 일정을 확인하였었는데 거래선 사장의 일정이 맞지 않아서 성사가 안되었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그 거래선 사장으로부터 하워드와 거래를 진행해보고 싶다고 하는 연락을 받았어요.”
“우리 회사가 아니고 하워드라고 했나요?”
다시 물었다.
대부분 거래를 원하는 업체들은 회사이름을 먼저 얘기할 텐데 내 이름을 직접 얘기하는 게 좀 의외였다.
“네. 맞아요. 하워드라고 직접 언급했어요.”
수닐은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홍콩의 자기 거래선으로부터 들어온 팩스를 보여주었다.
거기엔 분명 하워드와 거래를 원하고 있으니 중간에서 업무를 도와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적혀 있었다.
“아니.. 내 이름을 어찌 알고 거래선이 연락을 한 거죠?”
“나도 궁금해서 바로 전화를 했었죠. 그랬더니 홍콩에서 원단을 취급하는 업체들의 사장들은 하워드의 존재를 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놀랐습니다. 하하하.”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난 그저 끊어진 거래선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 외에는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 노력 또한 회사의 후광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었기에 나와 거래를 하고 싶다는 내용은 다소 의외로 느껴졌다.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원하는 제품을 문제없이 생산해서 선적만 해주면 되는 게 나의 일인데요. 그것도 회사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일 인걸 뻔히 알면서….”
“혹시 짱과 테리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나요? 거래선 사장이 그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는데 최근에 하워드를 소개받았다고 하더군요.”
“아.. 짱과 테리… 잘 알지요. 하하하.”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작년 한 해 두 사람은 도양상사와의 새로운 거래를 통해 시작한 비즈니스로 많은 수익을 얻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 수익을 만들어준 게 아마도 하워드라고 얘기를 하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나를 지칭한 것은 의외였다.
어찌 됐던 나에 대한 신뢰가 아주 짧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했다.
“하워드. 거래를 진행할 수 있도록 좀 도와주세요.”
“당연히 도와 드리는 게 나의 일인걸요. 하하하. 거래선 사장에게 연락을 하셔서 오늘 하워드와 미팅을 잘 끝냈고 필요한 주문 내용을 보내주면 확인 후 진행하도록 하겠다고 연락하세요.”
“고마워요. 하워드. 내가 중간 역할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줘서…”
“당연하죠. 수닐 씨 거래처이니까 수닐 씨가 오더 진행을 하는 게 맞지요.”
“땡큐 보스. 바로 확인 후 연락드릴게요. 하하하.”
“오케이. 기다릴게요.”
땡큐 보스…
인도인 특유의 과장된 언어 표현 중 하나인데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어구로 사용하는데 들으면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은 소리이기도 했다.
이 일로 바로 서열 정리가 되었다.
오늘부터 내가 갑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신년부터 생각지도 못한 거래선으로부터의 주문이 예상되고 짱과 테리와의 신뢰관계가 기대 이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너무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게 미팅을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에 미도파 백화점 근처의 구두 점포에서 신상품에 푹 빠져 있는 미스고를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을 미팅으로 보냈는데 미스 고는 아직도 사무실로 들어가지 않은 채 쇼핑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런 미스 고의 모습을 몇 번 목격을 한 신 차장의 심정이 어떨지 이해가 갔다.
그래도 화 한번 내지 않고 너그러이 넘어가주는 신 차장의 성격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미스 고. 아직도 여기 있는 거예요?”
“어머. 여긴 웬일이세요?”
미스 고가 놀라는 표정이 되어 눈이 눈깔사탕 크기처럼 변했다.
“창밖으로 모습이 보이길래 들어왔지요. 딱 봐도 미스 고 이던데요. 하하하.”
“다 끝났어요. 신 차장님에게 얘기는 하지 마세요. 호호호.”
넉살도 좋은 미스 고의 대응에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럼요. 걱정 마시고 함께 들어가요. 하하하.”
“고마워요. 호호호. 다음에 내가 밥 한번 살게요.”
우린 서로 멋쩍게 웃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미스 고. 은행 일이 꽤 오래 걸렸네?”
신 차장은 간단한 일로 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미스 고를 향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네. 본점에 업무가 밀려서 인지 대기자가 많았어요. 다른 회사에서도 신년 보완업무를 진행하느라 많이 와 있더라고요. 잘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일만 하다가 들어왔다는 듯 신 차장에게 태연히 업무 보고를 하는 미스 고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수고했어. 그래도 다음엔 좀 일찍 들어와.”
신 차장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듯했다.
괜히 혼내고 해 봐야 업무에 지장이 있을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차장님. 수닐 씨 잘 만나고 들어왔습니다. 신규 오더 건으로 상담 진행을 했는데 조만간 성사될 것 같습니다.”
“오… 좋은 소식이네. 연초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오니 올해도 멋진 결과를 만들어 보도록 하자고. 하하하.”
신 차장은 연신 싱글벙글하였다.
확실히 작년과는 다른 표정의 얼굴이었고 늘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모든 것이 해외 시장의 개발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걸로 이해하기로 하였다.
연초부터 활기를 띠는 해외 영업팀과는 달리 국내 영업팀들은 분위기가 그리 좋지 않았다.
미수 거래를 최소화하라는 하 전무의 특명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수익률이 경쟁사에 비해 점점 더 떨어지는 이유가 내수 거래선들 과의 미수 거래에 있다고 판단한 듯하였다.
국내 영업팀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미수 거래가 매출 확대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거래선이 부도가 나면 아무런 효력이 없는 문방구 어음을 매출 실적으로 인정해주기도 하였고 실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밀어내기와 가판(가짜판매:출고는 되지 않았지만 세금 계산서 발행만으로 실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비일비재하였기에 회사의 제품 관리와 재고 관리도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류 담당자들은 이중 보고서를 만들어 보관할 수밖에 없었기에 늘 좌불안석의 심정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관리직원들은 더 이상 회사를 속이는 일이 없도록 업무가 바뀌어서 다들 좋아하였지만 영업 직원들은 변화를 받아들이기엔 다소 시간이 걸릴 듯하였다.
오래된 업무 관행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았고 특히 거래선 사장을 설득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쟁사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왜 우리 도양상사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원망도 여기저기서 들렸다.
하 전무는 물러 서지 않았다.
매출이 줄어들어도 괜찮으니 불량 거래처를 정리하는 것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하 전무가 있었다.
변화를 원치 않는 터줏대감이 있으면 과감하게 정리하기도 하였다.
한동안 여기저기서 원망소리도 들렸지만 변화를 원하는 회사의 강력한 메시지에 점점 잦아들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조금씩 개선이 되어가는 긍정적인 모습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힘든 싸움이지만 반드시 극복을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회사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회사의 변화가 조직원들의 업무 행동에 대한 변신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였지만 도양상사의 실험은 이제 막 시작을 하였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다들 궁금해하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
작은 레코드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가던 길을 잠시 멈추었다.
Wind of Change..
온 세계가 많은 변화의 과정이 진행되던 당시의 상황을 노래한 것으로 유명한 한 록 밴드의 노래였다.
특히 변화의 중심이었던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으로 바뀌는 과정은 이 노래의 가사에 잘 녹아들어 있었다.
우리 도양 상사도 이제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 막 시작된 상황 이어서인지 이 노래가 더 남의 얘기 같지 않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