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라는 이름으로 사라지는 것들

by 전선훈

변화의 시작은 늘 사라짐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관행이라는 이유로 자연스레 통용되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조직원 대부분은 갑작스러운 회사의 변화는 사장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진행되는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하 전무의 업무 지시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권력은 모든 것을 삼키려는 듯 과거와의 단절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하 전무. 회사가 아주 빠르게 긍정적으로 변화가 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장은 하 전무를 불러 그동안 진행되어 온 업무에 대한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긍정적인 회사의 변화에 아주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하였다.


“네. 이제 조금씩 지표가 나아지는 정도입니다. 아직도 진행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입니다.”


“우리 도양 상사가 그렇게 엉망인 회사였나요?”


“아닙니다. 회사의 모든 구조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관행이라는 이유로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들이 회사에 손실을 끼치고 있었던 것에 회사가 좀 관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변화를 주면 손실을 최소화하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회사로 거듭날 것 같습니다.”


하 전무는 거침없이 소신 발언을 이어 나갔다.


“그동안 내가 회사 내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다녔지만 모두 공염불이었습니다. 처음에 잠깐 움직이는 듯하지만 돌아서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다반사여서 저도 포기를 하고 있었답니다. 하 전무가 들어온 이후 잘 진행이 되는 듯해서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사장은 자기가 하지 못한 일들이 하 전무의 주도하에 잘 진행되는 것에 약간은 불편한 감정도 가지고 있었다.


불편한 과거와의 단절을 위해 사장이 아끼던 사람들이 하 전무에 의해 꽤 많이 그만두게 되었고 그때마다 몸 바쳐 충성하던 직원들 일부는 사장에게 섭섭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사장에 대해 하 전무 뒤에 숨어있는 비겁자라고 말하며 떠나는 직원들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잘 알기에 하 전무에게 속도 조절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본인이 말을 아끼는 것이 회사를 위하는 것이라 판단하여 하 전무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하였다.


“하 전무가 끝까지 잘 마무리하셔서 정말 새로운 회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변화를 만들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 전무는 결의에 찬 표정을 하며 사장에게 화답을 하였다.


그런 하 전무의 표정을 보며 사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가 변할 수만 있다면 사장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목소리는 아무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 전무는 회의를 마친 후 전 부서에 조직도를 만들어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된 직원이 속출하여 결원이 많이 발생하여 충원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워드. 지금 업무를 진행하면서 과부하가 걸리지는 않나?”


신 차장은 인원 운영에 대한 계획을 보고해야 하기에 실무자인 나에게 우선 의견을 물어보았다.


“네. 아직은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거래선들이 늘어나면 혼자서 전 지역을 담당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지역을 좀 나눠서 업무를 보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업무가 많이 몰리다 보니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지금은 일을 배우며 성과를 만들어 내는 일에 흥미가 있어서 참을 만했지만 혼자서 계속 야근을 하면서 할 수는 없을 듯하였다.


“지금은 혼자서 진행을 해도 무리는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누군가 하워드 업무를 바쳐줄 사람이 필요할 거라 생각이 드네.”


“네. 신경 써 주시니 고맙습니다.”


“신경은 무슨… 일이 많아지면서 사람이 늘어나면 좋은 거지. 지금 신청을 해도 충원은 아마도 하반기에 있을 공채 모집에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드네. 우리 회사가 그리 빠르게 움직이는 회사가 아닌 걸 잘 알지 않나. 하하하.”


“늦어도 좋으니 사람이 충원되어 업무 진행이 되면 좋겠네요. 하하하.”


우리 팀을 포함하여 모든 부서가 사람이 필요한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 하 전무에게 인원 계획을 보고 하였다.


모든 부서의 책임자들은 하 전무의 결정에 목을 멜 수밖에 없었기에 혹시라도 합당한 이유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쓴소리를 들을 까봐 다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렇게 회사의 권력 구도가 하나로 몰리는 깔때기 구조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이 하워드. 수닐입니다.”


“하이. 수닐.. 홍콩 거래선 연락은 왔습니까?”


“네. 지금 광화문 사무실 근처로 가고 있습니다. 코리아나 호텔에서 커피 한잔할까요?”


수닐은 가끔 중요한 얘기를 해야할 일이 있으면 코리아나 호텔의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할 때가 있었다.


오늘도 뭔가 중요한 내용일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케이. 도착 시간에 맞춰 코리아나 호텔로 갈게요. 잠시 후 만나도록 해요.”


“땡큐. 보스.. 잠시 후 만나요.”


신 차장에게는 수닐 얘기를 하지는 않고 잠시 외부 미팅을 다녀오겠다는 말만 하고 호텔로 향했다.


신 차장은 내가 워낙 알아서 일을 잘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특별히 물어보지도 않고 다녀오라는 말만 하였다.


내가 담당하는 일에 별로 간섭하는 일이 없어서 신 차장과는 업무적으로도 크게 부딪힐 일이 없어서 좋았다.


입사동기들은 그런 업무 환경에서 일하는 나를 엄청 부러워하였다.


다들 사사건건 간섭하는 상사들 때문에 이직을 준비하는 동기도 꽤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신 차장과의 업무 호흡은 꽤 잘 맞는 편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이. 하워드. 여기입니다.”


호텔로 들어서니 수닐은 먼저 도착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이. 수닐. 빨리 오셨네요?”


“명동에서 여기 오는 길이 그리 멀지 않으니까요. 뭘로 마실래요? 커피?”


“그래요. 난 커피 한잔하도록 할게요.”


수닐은 종업원을 불러 음료와 달달한 디저트 스낵 몇 가지를 함께 주문하였다.


워낙 단 음식을 좋아하는 친구라 늘 건강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수닐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 친구들 중에서 자기가 가장 마른 편이라고 농담을 할 정도였다.


“홍콩 거래선으로부터 연락은 왔어요?”


“네. 하워드가 협조해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까 너무 감사한 일이라면서 좋아하더군요.”


인도인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 시작된 걸 보니 뭔가 중요한 일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청하는 일이 무엇이던 가요?”


“네. 최근에 싱가포르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몇 가지 업무 요청을 받은 것 중에 하워드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군인과 관련된 일이어서 조금 조심스럽다고 하였습니다.”


“혹시 군복 관련 사항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지난번 홍콩 육군에 납품한 제품에 대한 평판이 너무 좋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싱가포르에서도 홍콩 육군에 납품된 제품을 수입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아. 그렇군요. 제품 생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냥 주문만 해도 될 듯합니다. 다른 특이 사항이 있어서 그런가요?”


직감적으로 뭔가 다른 요청 사항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같은 품질과 가격에 몇 가지 특수 가공을 진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워드가 확정만 해주면 주문 사양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바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주문 사항이 그것뿐인가요?”


“그리고 싱가포르 정부 발주처의 책임자에게 수수료도 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더군요. 그 부분도 중요한 요청 사항 중 하나입니다.”


지난번 홍콩의 군복 납품 건도 거의 비슷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내용이 없었던 이유는 짱이 직접 신용장을 개설하여 진행하였기에 수수료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짱이 차액을 얼마나 남기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싱가포르의 정부로부터 직접 신용장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기에 확정된 금액 외에는 추가로 수수료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아. 뭔 얘기인지 잘 알겠습니다. 홍콩의 거래선이 따로 수수료를 지급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그런 것이군요.”


“네. 제품에 대한 입찰은 싱가포르의 지인이 직접 진행하고 발주처의 책임자에게는 수수료를 홍콩에서 주는 것으로 진행이 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워드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싱가포르는 워낙 공무원들의 부정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한 처벌이 이루어지다 보니 가끔 제3국을 거쳐서 수수료를 받는 형태의 업무가 아주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싱가포르 공무원들의 일탈행위가 있기는 하였다.


“알겠습니다. 대략적인 주문 금액이 어느 정도 인지 사무실 들어가서 바로 확인해서 연락 주세요. 그걸 알아야 내가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 관련해서 수닐의 수수료도 홍콩 거래선으로부터 받는 방식이어야 할 겁니다.”


“당연하지요. 확정만 된다면 저는 홍콩에서 수수료를 받으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바로 확인해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땡큐, 보스..”


이런 형태의 비즈니스는 가끔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고 주문 금액에 따라 수수료율만 결정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수닐은 아주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계속하였다.


주변의 손님들이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외국인을 보더니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고 그런 외국인을 처음 보는 듯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이번 오더 건만 잘 진행되면 상반기 실적은 자동으로 해결이 될 듯하였다.


일이 이렇게 잘 풀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떠올랐다.


잘 되는 일에는 항상 풍파가 있기 마련이기에 항상 대비를 잘해야 하겠지만 오지도 않은 걱정거리를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어찌 됐든 좋은 기분으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신 차장님. 다녀왔습니다.”


“외부 미팅 나간 일은 잘 되었나?”


“네. 잘 끝내고 왔습니다. 신규 거래처를 소개받았는데 아직 결정된 거는 없는데 잘 될 것 같습니다.”


신 차장에게 미리 세세하게 보고하지는 않았다.


아직 주문 금액도 확정이 안된 상태에서 수수료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보수적으로 일 처리하기를 좋아하는 신 차장에게는 실적으로 잡히는 금액의 규모가 중요하였기에 수닐로부터 주문 예상 금액을 가지고 얘기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였다.



오전에 보고한 인원 계획서에 대한 결과가 나왔다.


필요로 하는 인원의 반만 결정되었고 우리 해외 영업팀 충원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다.


미스고를 포함한 세명이면 업무를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당분간은 세명 체제로 업무를 진행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하였다.

“신 차장님. 당분간은 문제가 없겠지만 계속 야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 피곤하겠는데요. 하하하.”


난 계면쩍게 웃었지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일하는 기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적을 못 내는 것도 아닌데… 아마도 표정에 그대로 불만이 있는 게 신 차장에게 보였을 거라 생각했다.


“하워드.. 일단은 조금만 참아보세. 당분간 우리 셋이 일을 진행하고 하반기 공채모집을 진행할 때 추가로 인원 충원 요청을 해보는 걸로 할 테니…”


“알겠습니다. 빠른 시일 안에 충원이 되었으면 편할 것 같습니다.”


“하워드, 너무 걱정 마셔. 내가 반드시 인원 충원 진행하도록 할 테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게 된 하루였다.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경험 많은 실력자들이 사라졌고 그들이 가지고 나간 거래선들도 많이 사라졌다.


대부분은 거래하던 거래선들을 바탕으로 개인 사업을 진행하거나 경쟁사로 이직을 하면서 도양 상사에서 진행하던 상당량의 주문이 사라졌다.


사라진 주문량 때문에 생산부서의 추가 수입도 사라졌고 인원도 감축되어 생산에도 차질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누구도 불평을 할 수 없는 도양상사의 권력 구도는 이미 하 전무 에게 집중되었고 사라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가끔 술자리 모임에서나 회자되는 내용일 뿐이었고 다들 새로운 권력에 기대기 위한 노력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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