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동거

by 전선훈

시차를 두고 모든 부서에 배치된 낙하산 인사들의 업무가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여기저기에서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정상적인 업무가 이어져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기에 새로운 부서 책임자에게 눈높이를 맞추는 작업을 진행하여야 하였고 능력과 상관없이 그저 하 전무 사람들에게 밉보이지 않기만 하려고 하였다.


도양상사 내에 자리 잡고 있던 이른바 SKY 라인은 하 전무가 데려온 사판그룹 출신에 의해 거의 사라져 버렸고 “하사”(하전무와 사판그룹)라 불리는 새로운 라인이 회사 내 요직을 장악하는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강력한 권력을 쥐고 흔들던 도양상사의 SKY 라인이 제거되면 공정한 기회가 올 것으로 기대했던 직원들은 새로운 하사 라인의 등장에 망연자실하는 분위기가 대체적이었다.


그렇게 도양상사는 불안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미스고. 신 차장은 아직 안 나오셨나요? 아침부터 계속 안보이던데…”


“하워드. 신 차장은 지금 사장실에 올라가 있어요. 사장실에서 급하게 콜이 왔어요.”


“업무 보고라면 하 전무한테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장실로 바로 오라고 한 것 보니 무슨 일 있는 것 같네요.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모르겠어요.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던데…”


미스고도 내심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다.


최근의 인사 발령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은 신 차장은 예전과 다른 웃음기 없는 모습으로 사무실에 나왔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미스고도 그리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 듯했다.


따르릉.. 따르릉..


“야. 해외 영업팀 전화 안 받아! 시끄러워 죽겠 구만.. 빨리 전화받아.”


인사팀 정조준 부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어수선한 회사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듯 별 것 아닌 일에 다들 짜증부터 내곤 했다.


정조준 부장 또한 자기보다 나이 어린 부장급 책임자들이 들어오면서 본인의 위치에 대한 고민이 부쩍 늘어서인지 짜증이 점점 많아졌다.


아직 정조준 부장은 하사 라인에 속하지 못한 듯했다.


여유와 웃음으로 직원을 대하던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늘 불안해하며 짜증부터 내는 업무 스타일로 바뀌고 조금이라도 회사 생활을 연장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 일지에만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네. 감사합니다. 해외 영업팀 전 영문입니다.”


“거기가 도양 상사 맞나요?”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여기는 무역협회입니다. 이번 금요일 무역협회 본사 강당에서 수출의 탑 달성회사에 대한 시상식이 있는데 도양상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양상사는 5백만 불 수출의 탑에 해당이 되었습니다. 참석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확인 후 참석 여부 전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역협회에서 매년 수출의 탑 시상식을 진행해오고 있었는데 도양상사는 미미한 실적으로 백 만불 탑 달성 이후 몇 년간 초대받은 적이 없었다.


작년 해외 영업팀 실적이 6백만 불이 넘어서 올해는 5백만 불 수출의 탑 시상에 해당이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기쁜 소식이었지만 최근의 회사 분위기로 봐서는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고. 무역협회 전화예요. 5백만 불 수출의 탑 시상식 있다고 하는데 어느 부서에 연락을 해야 해요?”


“그런 일은 인사팀에서 진행하니까 그쪽으로 알려주면 잘 알아서 할 거예요.”


미스고의 표정 또한 기쁘지만 내키지 않는 듯해 보였다.


“알았어요. 인사팀에 내용 알려주고 그쪽 부서에서 진행하라고 할게요.”


신 차장이 자리에 없으니 인사팀으로 바로 가서 관련 내용을 얘기하고 왔지만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고 괜한 일거리만 더 늘어서 귀찮다는 표정이 보였다.


회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마치 쿠데타를 일으킨 점령군들의 기세에 눌린 듯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듯한 직원들의 모습이었다.


변화를 통해 공정한 기회가 올 거라 확신했던 직원들의 기대는 그저 헛된 희망이 되어버렸다.


사장은 이런 내부 속사정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변화를 통한 변신을 하고자 했지만 새로운 권력의 등장으로 도양상사를 위태롭게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는 직원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고 천천히 우리들 목소리를 내기 위한 준비작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가 감지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도양상사의 직원들은 불안하고 불편하게 새로운 권력과 동거를 하게 되었고 어떤 결론이 날지 아무도 모르는 폭풍전야의 기운이 회사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하이. 보스.. 싱가포르 건은 아직 결론이 안 나왔나요?”


다급한 목소리로 수닐 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하이 수닐. 아직 결론이 안 나왔어요. 지금 회사 내부의 변화가 너무 많아서 결론이 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니 조금만 기다려요. 결론이 나는 대로 내가 바로 연락을 할게요.”


“오케이 보스.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수닐은 담담하게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확정이 가능한 오더를 이렇게 오랜 시간을 끄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듯한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나에겐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낙하산 인사 때문에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놓치고 있었다. 나에게 영업실적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데 말이다.


큰일이다.


회사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 느껴진다.


이상한 바이러스가 회사 내 전체에 퍼져 불안하고 불편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 또한 그런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 무기력해지는 기운이 내 몸 전체에 스며든 듯했다.


해 야할 일을 뒷전으로 미룬 적이 없었던 나였지만 최근 며칠은 그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불편하고 불안한 목소리에 더 관심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동안 도양상사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혼란이지만 어떤 형태로든 빨리 정리가 되어 예전 모습으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직원들의 속마음이었다.



“하워드. 나 좀 잠깐 봅시다. 회의실로 들어와요. 미스고는 회의실로 커피 두 잔 만 가져다줘요. 참석은 안 해도 돼요.”


사장실을 다녀온 신 차장이 나를 급하게 불렀다. 뭔가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미스고는 중요한 듯한 일에 참석하지 말라는 신 차장의 말에 조금 마음은 상했지만 요즘 회사의 분위기에 눌려 그저 담담한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하워드. 내가 좀 전에 사장실을 다녀오느라 오전 내내 자리를 비웠네.”


“네. 보고드릴 내용이 많은데 자리에 안 계셔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최근의 회사 분위기를 잘 알겠지만 내가 도양상사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그래서 몇 가지 당부를 하려고 잠깐 보자고 했네.”


신 차장은 며칠 전 하 전무에게 사표를 제출했지만 초창기 멤버였던 신 차장의 사표를 부담스러워 한 하 전무는 사장에게 그 결정을 떠 넘겨 버렸다.


그래서 사장이 급하게 찾았던 이유였다. 철저히 계산된 행동을 하는 하 전무는 누구도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게끔 일처리를 하고 있었다.


“오늘 사장과 면담을 하면서 사표를 제출하였고 하워드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그만두기로 결정이 되었네. 아주 힘든 결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주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도양상사를 위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네? 사표를 내셨다고요?”


난 정말 놀랐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빨리 결정을 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었고 예상되는 실적이 아무런 문제 없이 올 한 해를 버텨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 오는 부장과의 관계도 좀 어색할 것 같고 하워드가 잘해주고 있으니 조금 편하게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하하하.”


신 차장은 어색한 웃음을 보였지만 얼굴에 보이는 아쉬움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그만두시기 전에 몇 가지 업무에 대한 결정 사항이 필요할 듯합니다. 새로 오는 부장에게 결재를 받으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해서요…”


“그래. 그게 좋겠네. 내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고 그만두는 게 좋겠지. 말해보게.”


난 밀려 있는 몇 가지 업무에 대해 얘기를 시작했다.


우선 싱가포르 3백만 불 오더 관련 건이 제일 급했다. 한참을 설명 듣고 난 신 차장은 다른 문제는 없으나 수수료 율에 대한 기준은 최대 2% 범위 내에서 협상을 마무리하면 좋을 듯하다고 조언을 하였다.


과거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고 그 범위를 넘지 않으면 사장도 큰 무리 없이 결정해 줄 거라 얘기하였다.

과거의 사례를 알고 있는 것은 그만둔 곽상무와 신 차장 그리고 사장뿐이었다.


싱가포르가 워낙 특이한 케이스여서 보안이 중요하였고 실무를 담당했던 신 차장과 결정권자만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고 하였다.

“잘 알겠습니다. 저도 그 정도 범위 내에서 협상을 하는 것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예전 그 서류를 첨부하여 보고를 하면 하 전무도 어쩔 수 없겠네요.”


“그래. 그 서류를 첨부해서 보고를 하면 큰 무리 없이 결재를 해 줄 거야. 그리고 과거의 사례는 하워드가 직접 확인해서 첨부한 거라 얘기하게. 그래야 아무런 소리를 안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회사 내 하사라인이 모든 요직을 차지하여 모든 게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사장의 결재 도장이 찍혀 있는 서류에 반론을 재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 친구들도 하 전무 보다 더 위에 있는 권력이 사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신 차장은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새로운 권력자들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지를 나에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 외의 몇 가지 일은 특별한 언급은 없었고 해당 부서로 다 넘기고 신경 쓰지 말라는 어투로 조언하였다.


좋은 상하 관계이면서 멋진 파트너였던 신 차장과의 이별이 점점 다가오는 듯하여 마음이 좀 무거워졌다.


하지만 언젠가 내 주변의 또 다른 사람들이 같은 상황에 처할 것이 뻔하기에 담담 해 져야 했다.


“조만간 소주 한잔 해야죠?”


“당연하지. 그만두기 전에 한잔 해야지. 하하하.”


그래.


이렇게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신 차장의 본모습이었는데 조만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고 그렇게 내 곁을 떠 났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신 차장은 본인 얘기대로 새로 오는 책임자와 아무런 교류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고 이제는 모든 업무를 당분간 내가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미스고와 단둘이 … 새로 온다는 부장의 소식은 계속 연기가 되어 날짜가 계속 미루어졌다.


싱가포르 오던 건은 워낙 급한 건이어서 하 전무에게 직접 보고를 하여 신 차장 얘기대로 과거의 사례를 따르는 것으로 결론을 내게 되었고 3백만 불 수주 건은 도양상사의 새로운 수출 역사가 되어 버렸다.


싱가포르 정부로부터 수령한 신용장 원본은 신주 모시듯 하 전무 옆 금고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몇 가지 진행 조건을 수정하기로 하고 수닐과 계약을 맺게 되었고 3개월에 걸친 공장의 생산 계획이 세워졌다.


국내 영업의 수금 결재 방식이 바뀌면서 다소 주춤했던 공장이 다시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어찌 됐던 영업의 선한 영향력이 공장에 미치는 효과는 대단했다.


모든 게 다 정상이 되는 듯했지만 아직도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은 계속되고 있었다.


무역협회에서 받은 5백만 불 수출탑은 하 전무의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찍힌 사진과 함께 회사 현관의 장식장에 진열이 되었다.


몇 년 전 받은 백 만불 탑이 왜소해 보였고 이제는 천 만불 탑이 어느덧 내년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하 전무의 환하게 웃는 컬러 사진은 과거에 찍은 사장의 빛바랜 흑백 사진과 비교되어 묘한 감정이 겹쳐졌다.


사판 그룹 출신의 세 과시를 하는 것처럼 보여 왠지 불편해 보이고 곧 뭐가 터질 듯한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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