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미끼 (Lure) & 뻥카

by 전선훈

신 차장이 그만두고 거의 한 달이 지났지만 새로 온다는 부장은 아직도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미스 고. 새로 온다는 부장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요?”


“글쎄요. 인사팀에 확인해 보았는데 아무도 얘기를 하지 않네요. 이상한 일이에요.”


“그러게 말입니다. 나도 동기인 임 삼식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다 하더라고요.”


“언젠가 오겠죠 뭐. 호호호.”


미스 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어넘겼다.


새로 올 부장의 공백으로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신 차장이 담당하던 지역까지 내가 맡아서 하다 보니 늦은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어야 했다.


싱가포르 선적 진행이 사내에서 제일 큰 관심사였기에 모든 에너지를 그 일과 관련된 일에 쏟아부어야 했다.


공장은 공장대로…


영업은 영업대로…


수닐은 이번 선적 진행 건이 자기 회사의 운명을 좌우한다며 진행상황을 확인하려고 수시로 연락을 해왔다.


“하워드 보스 님. 생산 진행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거죠?”


이제는 보스에 님 자를 붙여서 사전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Sure. 잘 진행되고 있으니 전화 자주 안 해도 됩니다. 하하하.”


“저는 하워드 보스 님만 믿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번 오더 진행 건이 워낙 큰 이익이 걸려있는 상황이다 보니 진행 상황을 확인하여 홍콩의 거래선에게 수시로 보고한다고 하였다.


“수닐. 첫 선적이 다음 주 진행될 예정이에요. 1차로 백만 불에 해당하는 수량으로 선적 진행이 될 겁니다. 준비 서류와 제품 검사 일정에 대한 협의를 진행해야 하니 미스고가 수닐 사무실로 들어가서 업무 협의하도록 할게요.”


“오… 드디어 1차 선적 진행이 되다니 너무 기뻐요. 하워드 보스 님. 하하하.”


“보스 님은 무슨… 하하하.”


급하게 선적 진행에 필요한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SGS 검사도 필요하고 상공회의소에서 원산지 증명도 발급받아야 하는 등 여러 가지 절차가 남아 있었다.


“미스고. 선적 일정이 확정되었으니 서류 준비 작업 해야죠?”


“네. 걱정 마세요. 식은 죽 먹기예요. 이미 준비 작업 다 해 놓았으니 잘 진행할게요. 호호호.”


워낙 선적 서류 진행은 눈 감고도 할 수 있다고 공언하였지만 약간 덜렁거리는 미스고의 업무 스타일을 감안하면 사전 점검은 필수였다.

가끔 덜렁거려서 서류 작업할 때 오타를 많이 내다보니 은행이나 관공서에 가기 전에 서류 점검은 필수였다.


작은 오타 하나로 상대방의 결재 은행에서 결재를 미루어서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 워낙 많았고 이번 건은 싱가포르 정부 상대로 진행하는 건이라 더욱 신경 써서 확인을 해야 했다.


“하워드. 수닐 사무실 갔다가 업무가 조금 늦어지면 사무실 안 들어오고 바로 현지 퇴근하도록 할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퇴근 전 연락은 기본… 알죠? 하하하.”


“그럼요. 호호호.”


신 차장의 공백으로 내가 전결 권을 행사하는 이상한 위치가 돼 버렸다.


내수 영업팀의 이 승진 부장이 당분간 우리 팀 관리도 같이 하지만 본인의 일과 거의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여 대부분 나의 결정을 따라주었다.


나쁠 건 없지만 문제가 생기면 내 책임이기에 항상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늦은 오후.


내수 영업팀은 거의 대부분 외근을 나가 있었고 이 승진 부장만 자리에 앉아 돋보기안경을 내려쓴 채 신문 구독에 열중이었다.


이 승진 부장 또한 도양상사의 오랜 터줏대감이었지만 탁월한 실적관리와 남보다 한발 빠르게 하사 라인이 곧 도양상사를 지배할 것 같은 촉을 감지하여 하사 라인의 일부가 되어 이번 인사 태풍을 무사히 비껴갈 수 있었다.


촉…


정글 같은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녀야 할 필수 무기가 바로 촉이다.


누가 자기의 목줄을 쥐고 있는지를 정확히 예측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


그래야 가늘고 길게 회사 생활을 이어갈 수 있으니까…


도양 상사가 일하기 편한 곳이라는 회사 선배들의 얘기가 딱 들어맞는 오후의 사무실 풍경이었다.


곳간에 곡식을 가득 채우면 아무런 걱정 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옛 선조들의 모습이 투영되듯 실적만 채우면 아무런 문제 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양상사라고 선배들이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었다.


그런 도양상사에 하전무가 등장하여 모든 걸 다 바꿔버리려고 하고 있으니 오랜 터줏대감들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하지만 저항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에 터줏대감들의 볼멘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하워드. 수닐 씨와 업무 정리는 잘 되었어요. 큰 문제없이 진행될 것 같네요. 호호호.”


“오.. 잘 되었네요. 그럼 현지 퇴근하시고 내일 아침에 자세하 얘기하도록 해요.”


“알겠어요. 먼저 퇴근하도록 할게요. 호호호.”


전화 너머로 미스고의 밝은 표정이 느껴졌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시간이니 상관하지 말라는 듯한 경쾌한 말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며칠 전부터 카드회사에서 날아온 상품 소개 전단지를 몇 번씩 쳐다보며 계산기를 연신 두드리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마도 오늘이 구매하기로 마음먹은 제품을 만나러 갈 것이고 내일이면 그 제품을 입든지 신든지 바르든지 해서 잘 차려입고 나올 것이다.


호호 아줌마의 변신은 늘 파격적이었기에 내일 미스고의 모습이 기대가 되었다.


모든 선적 일정이 정리가 되었기에 특별히 사무실에 오래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일찍 퇴근을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삼식이 동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어이. 전 주임.. 오늘 몇 시에 퇴근하시나?”


“야. 어이가 뭐냐… 전화 매너 하곤….”


“하하하. 친하니까 그렇지.”


“그럼.. 다 알지. 하하하. 근데 무슨 일 있으신 가?”


“오늘도 너희 부서로 오기로 한 새로운 부장과 관련된 정보가 있어. 아주 따끈하면서 너 열받게 할 그런 정보야. 궁금하지 않냐?”


지난번 인사와 관련된 정보를 들으며 과음과 울분을 토하던 며칠 전의 기억이 생각이 났다.


“오늘도 열받으면 안 되는데… 하하하.”


“오늘은 동동주로 한잔하자. 이 승진 부장한테 대충 핑계 대고 빨리 나와. 교보문고 앞에서 보자. 다른 동기들도 함께 모이기로 했으니 빨리 와.”


“어. 알았어. 그런데 오늘은 골목 백반집 안 가냐?”


“아니야. 오늘은 피맛골로 가서 동동주나 한잔하자. 오늘은 그게 땡기네..하하.”


“오케이. 지금 내려갈 테니 교보에서 보자고.”


교보문고는 도양상사가 위치한 빌딩에서 걸음으로 채 5분이 안 걸리는 곳이어서 가끔씩 약속장소로 애용하는 곳이었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조금 늦거나 내가 조금 늦을 때 책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곳으로는 최고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피맛골 골목 안에 위치한 허름한 전집 구석에 자리 잡은 우리들은 몇 가지 안주와 동동주를 시켜서 몇 순배 돈 후 삼식이가 가지고 온 따끈한 정보에 귀 기울였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라. 이 얘기를 들으면 회사를 빨리 옮겨야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몰라. 하하하.”


얼굴이 벌게진 삼식이가 자기가 가지고 온 정보의 가치를 운운하며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동기들과 관련된 얘기를 먼저 시작하였고 다들 자기와 관련된 정보가 나올 때마다 동동주를 들이켜느라 정신없었고 그 사이에 주전자만 쌓여갔다.


나와 관계없는 다른 동기들의 얘기부터 시작했지만 들을수록 화나는 얘기뿐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나와 관련된 얘기가 마지막으로 시작되었다.


“야. 지난번 영어 한마디 못하고 영업 경험 전혀 없는 부장이 해외 영업으로 온다고 얘기한 거 기억나지?”


“기억나지. 그 황당함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지. 그 사람 때문에 신 차장은 사표를 내고 그만두었고…”


“그런데 그 인사 정보는 완전히 신 차장을 그만두게 하기 위한 가짜미끼 (Lure) 였더라고…”


“뭔 소리야 그게?”


갑자기 술이 확 깨는 듯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신 차장이 도양상사에서 가장 근무를 오래 한 사람이다 보니 회사가 숨기고 싶어 하는 여러 부당한 일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고 특히 사장과 연관된 몇 가지 비밀 소문도 돌고 그랬던 것 같더라고.”


“그런 일들이야 오랜 시간 회사생활을 하면 다 그렇게 되는 거 아닌가?”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누구와 연관된 일이냐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지.”


“사장과 연관된 비밀이 뭔 지는 알아?”


궁금해졌다.


신 차장을 그만두게 하기 위해 가짜 미끼까지 동원한 것이라면 뭔가 큰일이 있었을 거라 짐작이 되었다.


“아직은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큰 건이 사장과 연관이 되어있는 건 맞는 거 같아.”


삼식이도 아직까지 잘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삼식이 얘기를 듣는 내내 동기들의 무거운 침묵을 동동주 잔 부딪히는 소리로 대신하고 있었다.


“사장이 최근에 하전무를 불러서 과거 자신과 연관된 몇 가지 부당한 일에 대한 얘기를 한 모양이야. 곽상무도 연관되어 있었고 신 차장도 연관된 일이었던 것 같아. 다행히 곽상무는 임원이라 자체 감사를 빌미로 해임을 시켜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신 차장은 얘기가 다른 거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반 직원을 사장 마음대로 해고를 할 수는 없으니까 하전무를 불러서 상의를 한 것 같더라고. 그래서 하전무가 택한 방법이 신 차장 위로 젊은 부장을 슬쩍 발령 내는 것처럼 위장한 거라고 하더라고. ”


뭔가 퍼즐이 맞추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신 차장이 그만두기 전 사장과 단독 면담을 한 것도 그렇고 그 이후에 후임이 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바로 사표가 수리된 것도 삼식이가 하는 얘기와 통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가짜 인사 발령을 내고 그러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도양상사가 무슨 구멍가게도 아니고…”


“그러니 이상한 거지. 큰일이 아니고 서야 그런 황당한 일을 벌였겠어..”


“대체 그 큰일이라는 게 뭘까?”


이구동성으로 동기들 도두 같은 얘기를 했다.


다들 궁금해했지만 그 정보에 대한 접근 권한이 없는 삼식이의 얘기를 뒤로하고 동동주만 잔뜩 들이켰다.


추가 주문을 하자 욕쟁이 주인 할머니가 그만 쳐 먹으라고 하신다.


언제 들어도 단골집 할머니의 욕소리는 정겹다.


“네.. 할머니.. 그만 마실게요. 하하하.”


동기들 모두 욕쟁이 할머니의 얘기대로 그만 마시기로 하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아마도 오늘 지하철 내에서 동동주 냄새가 다른 사람까지도 취하게 할 듯하였다.


집으로 향하는 길.


삼식이가 한 얘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신 차장을 그만두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한 편의 잘 짜인 드라마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거 재밌게 보았던 영화 스팅이 생각났다.


로버트 레드포드 (극 중 이름 Johnny Hooker)가 자기가 모시던 두목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폴뉴먼 (극 중 이름 Henry Gondorff)과 손잡고 거물 로버트 쇼 (극 중 이름 Doyle Lonnegan)를 골탕 먹일 계획을 세워 멋지게 복수를 하는 내용으로 정말 재밌게 보았던 영화 중 하나였다.


사기.


굳이 가짜 미끼 (Lure)와 뻥카를 치면서까지 신 차장을 내보내야 할 정도로 사장을 보호하기 위한 하전무의 연출 능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과 직원을 상대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기가 계획한 일을 그대로 실행하는 하전무의 또 다른 모습에 놀랐다.


무섭기도 하였고….


그래서 새로 온다는 부장은 감감무소식이었고 신 차장은 아무것도 모른 채 청춘을 바친 도양상사를 떠나게 된 것이었다.


가짜미끼 (Lure)를 물고 뻥카에 당하는….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다” 는 속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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