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봄은 온다

by 전선훈

전날 마신 동동주가 아직도 머리와 속을 후벼 파고 있었다.


뭐든 적당히 마시면 피가 되고 살이 되지만 과하면 탈이 나게 마련인 것이다.


이불 동굴 속에서 벗어나려 애써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머리는 아프고 속은 뒤집어지고…


오늘은 반나절만 일하는 토요일..


그냥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한 핑곗거리를 대고 출근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미스고에게 무선호출기 (삐삐)를 쳤다.


집 전화번호를 누르고 8282라고 표시하니 1분도 안되어 집으로 전화가 왔다.


“하워드.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급한 일 있어요?”


“아직 출근 안 한 거죠?”


“이제 나가려고 하는 중인데…무슨 일 있어요?”


“사실은 몸이 너무 좋지가 않아요. 그래서 좀 쉬려고 해요.”


“아.. 오늘은 토요일이고 반나절만 있으면 되니까 내가 이승진 부장한테 적당히 핑계를 댈게요. 그리고 출근 카드도 내가 다 찍어줄 테니 걱정 말고 좀 쉬어요. 호호호.”


“고마워요. 이승진 부장한테는 명동 거래처에 문제 생겨서 바로 현지 출근했다고 얘기해 줘요. 하하하.”


“걱정 말고 잘 쉬어요.”


“고마워요.”


출근 카드를 찍지 않으면 무단결근이 되기에 누군가에게 부탁을 해야 결근처리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직원들도 그런 방법으로 알음알음 도우면서 지냈다.


인사팀에서 조만간 카드 출입 기를 지문 인식으로 바꾸겠다는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껏 단 한 건의 결근 사례가 없었다는 사실이 시스템을 바꾸려는 이유이기도 했다.


방안의 퀴퀴한 향기를 다 날려 버리기 위해 모든 창문을 열고 이불 동굴 밖을 나왔다.


예전보다 공기가 덜 차갑게 느껴지는 걸 보니 봄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좀 차리고 간밤에 들었던 얘기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았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이 계획에 의해 진행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감추고 싶었던 진실이 무엇이었을까…


신 차장은 왜 덮고 가려고 했던 것일까…


신차장만 없어지면 과거의 일이 다 정리되는 것일까…


모르겠다.


실타래처럼 얽힌 이 상황을 내가 안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하니 괜한 고민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신 차장의 퇴사가 마음에 걸렸다.


나에게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걸 배울 수 있도록 경험을 하게 해 준 고마운 은인이기에 이유라도 좀 알고 싶었다.


“미스고. 특별히 문제 생긴 건 없죠? 하하하.”


죄짓고는 못 산다는 옛 속담처럼 땡땡이친 게 마음에 걸려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럼요. 아무 문제없어요. 이승진 부장도 오늘 안 나왔어요. 호호호.”


“오. 다행이네요. 그럼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봐요. 하하하.”


옥탑방위에서 바라보니 성신여대 주변의 담벼락에 노란 개나리꽃이 피기 시작했다.


봄기운이 완연한 그 길을 산책 겸 해서 걸어 보고 싶었다.


술도 깨고 머리도 맑게 할 겸..


두꺼운 전공 서적을 앞에 들고 삼삼오오 모여 캠퍼스로 향하는 학생들을 보니 내 대학생 시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취직만 된다면 모든 게 다 정상이 될 거라 생각하며 대학 생활을 마쳤지만 정작 마주한 사회 현실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적당히 눈 감고 가야 하는 현실을 매일 대면해야 할 사회 초년생들의 험난한 사회생활에 대해 인생 선배들로부터 제대로 된 조언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니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밝은 모습으로 학교로 향하는 이 친구들은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늘 다니던 작은 카페에 들러 아침도 먹고 커피 한잔을 마시며 오늘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하는 고민 끝에 신 차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싶어 졌다.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엔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았다.


“신 차장님. 잘 지내세요? 하워드입니다.”


“오... 하워드.. 오랜 만이네. 나야 흰 손 거사 (白手居士)로 잘 지내고 있지. 하하하.”


“흰 손 거사. 멋진 표현인데요. 하하하.”


신 차장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도 참 재미있게 표현하는 능력이 있었다.


“멋지긴... 그냥 백수라고 얘기하면 다른 백수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 하하하. 근데 무슨 일인가?”


“오늘 시간 있으시면 저랑 점심 같이 하실래요?”


“좋지. 백수가 남는 게 시간인데 뭐... 어디에서 볼까?”


“예전에 갔었던 인사동 한정식 집 어떠세요? 조용하고 좋던데...”


“오케이. 나도 가끔 생각나는 집이었는데. 12시에 거기서 보세. 예약은 하워드가 하시고...”


“네. 알겠습니다.”


인사동 한정식 집은 가끔 해외에서 오는 바이어들을 초대하여 식사하던 곳이었는데 음식도 괜찮고 특히 조용한 분위기가 대화를 나누기 참 좋은 장소로 기억이 되었다.


인사동으로 향하는 길…


외국인들이 한국에 오면 한 번은 들른다는 인사동은 평소에도 늘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사람과 차가 얽힌 인사동 주변의 주말 풍경은 더 혼잡스러워 보였다.


그 혼잡스러움을 뒤로하고 좁은 골목에 위치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어... 신 차장님. 벌써 와 계셨네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저는 천천히 왔는데...”


“오늘따라 버스도 안 막히고 해서 예정보다 빨리 오게 돼 더라고... 하하하.”


“양반 정식으로 예약을 했는데… 괜찮으시죠?”


“굿. 하워드의 음식 추천 실력도 나를 닮아서 아주 탁월하구먼... 하하하.”


“하하하.”


함께 웃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주문한 음식이 한상 크게 차려져 들어왔다.


동동주를 반주로 곁들여 점심을 먹고 난 후 후식으로 들여온 차를 마시며 궁금했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신차장님. 이번 인사는 어떻게 된 건가요? 하도 이상한 루머들이 많이 돌아서 어떤 게 진실인지 좀 알고 싶어 서요.”


“이상한 루머라는 게 뭔가?”


“내가 듣기로는 신차장님의 퇴사를 유도하기 위해 사장과 하전무가 일부러 새로 온다는 부장의 가짜 발령을 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얘기하던데…”


“다른 얘기는 없던가?”


신 차장은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피며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사장과 관련된 과거일에 대한 정리 차원에서 그런 것이라는 말도 돌고요…”


“이상한 소문들이 많이 돌긴 도는 구만… 그냥 소문일 뿐 일세. 하하하.”


신 차장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듯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하워드. 내 얘기 잘 듣게. 실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어서 모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래서 곽상무도 퇴사 이후 자숙 중이고…”


뭔가 큰일이 얽혀 있는 거 같았지만 신 차장은 더 이상 얘기하기를 주저하였다.


“신차장님. 제가 궁금한 건 처음에 물어본 일들이 정말 사실인지가 궁금했습니다. 실체에 대해서는 제가 알아도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마음만 아플 것 같고요.”


“하워드가 궁금해했던 거 다 사실일세. 솔직히 누군가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상황이 아니어서 말을 아끼고 있는 걸세.”


“그래도 그렇게 편법을 써서 차장님을 그만두게 한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되고 화도 나고 그러네요.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구먼… 도양상사는 구멍가게가 맞네. 하하하.”


신 차장은 도양상사가 자기에게 보인 행태에 대해 약간의 앙금이 남아있는 듯 우스갯소리로 도양상사를 깎아내렸다.


“사장. 곽상무 그리고 나와 얽힌 일들은 아주 오래전에 벌어진 일들인데 그중 몇 건은 아직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은 것들이 몇 건 남아 있는 게 있어. 확인은 안 되었지만 최근에 내부에서 누군가가 검찰과 국세청에 제보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었네. 그 정도까지만 알고 계시게… 내가 자네에게 자세히 얘기를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만 이해를 해주게. 언젠가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일이 오겠지. 하하하.”


신 차장은 지금 당장 모든 걸 얘기할 수 없는 본인의 상황에 대해서만 간단히 업급하고 말았다.


본인이 힘들어하는 상황을 뻔히 알면서 계속 물어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신 차장이 자연스럽게 얘기할 날이 빨리 오기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하여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언젠가 편한 날이 오면 그때 얘기해 주세요. 하하하.”


“하워드. 최근에 벌어진 여러 일들이 하 전무의 독단으로 진행된 거라고 믿나?”


“하 전무가 워낙 강하게 밀어붙이니 직원들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죠.”


“하 전무가 오게 된 배경에는 복잡한 도양 그룹의 가정사가 한몫을 하고 있어.”


“네? 복잡한 가정사라는 게 뭐예요?”


“도양 그룹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내가 나중에 다시 얘기를 해주도록 하겠네. 워낙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내용이라서.. 하하하.”


“차장님은 그런 내용을 어떻게 아세요? 보통 재벌들의 가정사는 외부로 잘 안 알려지던데…”


“아… 하워드는 내가 도양에 처음 입사해서 맡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구먼. 하하하.”


“저야 모르죠. 하하하. 처음부터 영업을 하신 거 아니세요?”


신 차장과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근무를 함께 했기에 과거 이력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냥 처음부터 영업과 관련된 일만 계속해 온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워낙 해외에 전문화된 사람이라 당연히 그런 줄 알았던 것이다.


“내가 처음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를 한 곳이 도양상사가 아니고 선대 회장의 집에서 집사라는 역할로 들어갔었지. 선대회장과 우리 부친은 이북에 있는 같은 동향출신의 소꿉친구였었지. 그런 인연으로 선대회장 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 거라네.”


“명문대를 졸업하셨는데 어디든 원서만 내면 다 들어가셨을 것 같은데…”


“나도 그러고 싶었지만 부친의 간곡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의외였다.


그 당시 명문대를 졸업하기만 하면 여기저기서 모셔가려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모든 걸 포기하고 집사로 일을 시작했다는 얘기가 믿기질 않았다.


“아주 오래된 얘기야. 지금 도양상사의 사장이 둘째 딸과 결혼하기도 전 얘기이니까. 하하하.”


아주 오래된 얘기지만 신 차장은 도양 그룹과 얽힌 본인의 얘기를 조금씩 얘기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데요. 도양의 모든 걸 알고 계시겠네요? 하하하.”


”모든 걸 알고 있으니 내가 계속 도양상사에 근무하는 게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 하하하.”


웃으며 얘기를 하고는 있지만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는 듯 보였다.


“하워드.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세. 내가 저녁에 어디를 좀 가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내가 언젠가 적당한 시간이라고 판단이 될 때 자세히 얘기를 해주겠네. 이해해 주게.”


“알겠습니다. 제가 안다고 해서 변할 게 없는데 어쩔 수 없죠 뭐.. 하하하.”


“난 자네와 아주 짧은 시간 함께 일을 했었지만 내 동생 같고 해서 하는 얘기야. 이번일은 당분간 모르는 척하게. 알면 하워드에게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명심하게.”


“네. 잘 알겠습니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서로의 길을 향해 좁은 인사동 골목을 빠져나왔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혹독한 정글의 먹이 사슬세계에서 약자가 용기를 기반으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려 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누군가 답하길 돈보다 소중한 사람들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강자의 위치에서는 얻기 힘든 또 다른 종류의 보배가 약자 주변에 많기에…


우린 그런 사람들을 통해 희망을 얘기하고 꿈꾸고 그러는 것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집 주변 풍경이 정겹다.


봄이다…


도양상사는 언제나 봄이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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