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하 전무님이 찾으시네요. 지금 올라오라고 연락 왔어요.”
“네.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하 전무의 호출이 왔다.
“미스고. 무슨 일인지 아는 거 있어요?”
“글쎄요. 특별히 보고 준비를 해서 오라는 얘기는 없었어요.”
“알겠습니다. 지금 진행하는 싱가포르 건은 아무런 문제는 없죠? 혹시라도 물어볼지 몰라서…”
“그럼요. 마지막 3차 선적은 이번 주 금요일에 진행될 거예요. 그것만 보내면 다 끝나는 겁니다. 호호호.”
“알겠습니다. 이번 선적 진행하면서 한 건의 문제도 안 생겨서 다행입니다. 하하하.”
“내가 누군데요… 서류 작업의 달인 미스고랍니다. 호호호.”
과거엔 몇 차례 실수도 했지만 요새는 내가 더 꼼꼼히 살피기 시작하자 부쩍 서류 작업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았고 단 한 건의 하자 없이 서류 작업이 완료되어 다행이기는 했다.
혹시라도 물어볼 만한 사항에 대해 몇 가지 준비 서류를 챙겨서 하전무의 방으로 올라갔다.
“전 주임. 들어오세요.”
하 전무와의 면담은 늘 긴장되었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여 버벅거린 적도 있어서 주눅 들지 않으려 늘 신경을 꽤 많이 써야 했다.
“하 인걸 전무님. 안녕하십니까? ”
주눅 들지 않으려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요새 신 차장 업무까지 하느라 일이 많겠구먼?”
“네. 조금 많습니다. 전 지역을 다 담당하다 보니… 헤헤헤.”
“지금은 일이 많다고 느끼겠지만 자네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야. 특성이 다른 국가를 상대로 아주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까…”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자네를 부른 건 회사일 관련해서 부탁을 해야 할 일이 생겨서 불렀네.”
하 전무가 나에게 부탁할 일이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새로 오려고 했던 부장이 개인 사정으로 입사가 취소되었네. 알고 있었나?”
“아닙니다. 인사팀에서 조금 늦어진다는 얘기만 들었고 취소가 되었다는 말은 오늘 처음 듣습니다.”
“음.. 그렇구먼…”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신 차장 그만둔 후 서로 만난 적은 있나?”
만난 적도 없고 무슨 얘기를 들은 것도 없다라고 얘기하라고 신신당부하던 신 차장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요. 그 이후에 만난 적은 없습니다. 업무 관련해서 전화 통화한 적은 몇 번 있었습니다.”
“음.. 그렇구먼. 혹시라도 신 차장이 자네에게 업무 관련된 것 외에 얘기하는 게 있으면 나에게 좀 알려주게. 회사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일이어서 그러네.”
“네. 알겠습니다.”
“부탁을 하려고 한 건 그거였고 앞으로 업무 관련 보고는 나에게 직접 하도록 하게. 전주임이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다고 판단도 되고…”
“네. 알겠습니다. 해외 진행 상황은 수시로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수고하시고...”
하 전무 방을 나오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업무보다 우선적으로 나에게 부탁을 하려고 했던 것이 신 차장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수시로 보고해 달라는 내용이라니...
더욱이 회사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라고 하니 뭔가 큰 일에 신 차장이 얽힌 건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신 차장도 조심스러워하고 있었고 나에게 입단속을 하려 했던 것 같았다.
이상하게 하전무와 신 차장의 사이에서 줄을 타야 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처신을 잘못하면 나도 낭패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어찌해야 할 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미스고. 싱가포르 마지막 선적 건 검사날짜가 오늘 오후 맞죠?”
“네. 맞아요. 오산 공장에는 언제 내려갈 거예요? 수닐은 먼저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어요.”
“알겠어요. 지금 내려가면 검사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겠네요. 총무팀에 차량 배차 좀 바로 부탁해요.”
“네. 알았어요.”
몇 가지 서류를 챙기고 오산 공장으로 출발했다.
배정받은 차량은 다마스 LPG였다.
큰 트럭이 옆으로 지나면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느낌이 드는 아주 소형 미니 밴이었다.
더구나 연료를 LPG를 쓰다 보니 충전소 찾으러 다니는 것도 일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엔 충전소가 거의 없어서 오산 공장을 가기 위해서는 공항 근처의 충전소를 먼저 들러 가야 했다.
LPG 충전을 끝내고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오산으로 향했고 차가 막히지 않아서 검사 팀 일행보다 더 일찍 공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이. 하워드 보스님.”
“오.. 수닐.. 먼저 와 있었네요. 네가 조금 늦어서 미안해요.. 하하하.”
“노 프라블럼… 하워드 보스님. 저 좀 잠깐 봐요.”
사실 수닐은 검사일정에 참석 안 해도 되는데 늘 참석을 하였다.
자기 선적 건에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지 몰라서 공장 관계자들과 검사 관계자들에게 약간의 선물을 주는 관행을 계속 지켜가고 있었다.
“보스님. 이거 받으세요.”
수닐이 노란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에이…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보스님. 하하하.”
“아… 미안… 하하하.”
사실 그 봉투에는 약간의 돈이 들어 있었다.
제품을 상차하는 공장 일꾼들 식사 비용과 검사 오는 팀의 일종의 선물비 같은 것이었다.
외국인인 수닐이 주면 받는 게 좀 머쓱하지만 한국인이 주는 건 그리 미안해하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한국적인 문화에 완전히 적응해 버린 수닐의 사업 수단도 참 대단해 보였다.
제품 검사와 상차를 하기 전에 약간의 기름칠을 미리 해 두어서인지 일정이 많이 단축되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전 주임이 했지. 우리 전주임 때문에 공장이 먹고살고 있는데 뭘… 하하하.”
“별말씀을요. 하하하.”
공장장이 일상적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제품 창고에 재고가 많이 쌓여 있던데 언제 생산된 제품들 이예요?”
제품 검사 진행하면서 창고를 돌아보니 엄청난 재고가 쌓여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애물단지 들이야… 해외영업 하고 국내영업이 생산해 놓고 취소된 제품들이야. 양도 많고 … 전 주임이 좀 어디 해외에다 팔아 줄 수 없나? 나도 저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라고…”
“아.. 그래요?”
놀라웠다.
그렇게 많은 제품이 창고에 쌓여 있는 것도 그렇고 누군가 나서서 팔아보려고 한 적도 없다는 게 이상했다.
멀쩡한 제품에 상품성이 충분한 재고들이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재고용 샘플을 다 정리해서 해외영업으로 보내주세요. 제가 모두 팔아 드릴 게요... 걱정 마세요… 하하하.”
이런 상품성이 충분한 재고 제품은 흔들면 줄 서는 업체들이 워낙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수닐 같은 무역 업자들이었다.
수닐이 좋아할 만한 먹이거리를 내가 가지고 있으니 나에 대한 수닐의 충성심은 갈수록 깊어질 것 같아 괜한 웃음이 나왔다.
이번 재고 판매도 계획에 없던 실적으로 잡힐 수 있으니 나에겐 더 좋은 기회였다.
분명한 건 이런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방치해 둔 국내 영업팀의 책임자들은 하전무에게 쓴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현장 한번 나가보지도 않고 숫자 보고만 받는 일명 까딱이 (의자에 앉아 까딱까딱하기만 하고 폼만 잡는 이) 들이라고…
도양상사의 업무를 완전히 통제하게 된 하 전무의 쓴소리는 본인들의 인사와 깊은 관계가 있기에 작은 일에도 꼬투리를 안 잡히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번 일로 또 너무 나서서 일하지 말라는 핀잔을 다른 영업팀들로부터 들을 게 뻔하지만 특별한 노력 없이 실적을 챙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해외 영업은 실적 달성에 아무런 문제 없이 순항을 하고 있었기에 국내 영업팀으로부터의 견제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미스고와 둘이서 팀을 이끌어가고 있는 해외 영업팀에 괜한 견제를 하다가 하전무로부터 부서 내 사람 줄이라는 봉변이라도 당할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책임자들도 있었다.
어찌 됐던 해외 영업은 하전무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는 조직이 되어 가고 있었다.
공장 팀들과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고속도로 위의 차량 행렬이 꼬리를 물고 움직이지 않는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늦게 출발하는 게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졸음도 쫓을 겸 해서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신승훈의 “오랜 이별 뒤에”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홍콩에서 만났던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녀의 모습이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만날 수는 있을까…
아련한 옛 추억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흔들거리는 다마스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