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우 우우웅….. 우우 우우웅…..
허리에 찬 무선 호출기의 진동음이 척추까지 전달되어 마사지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확인해 보니 음성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하워드. 나 신차장일세. 오늘 저녁 7시에 지난번 만났던 인사동 한정식 집에서 잠깐 보세. 예약은 내 이름으로 해 두었으니 시간 맞춰서 보세. 그리고 누구에게도 오늘 나를 만난다는 사실은 알리지 말게.”
신 차장의 짧은 메시지가 음성으로 남겨져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연락이 없어서 잘 지내고 있으려니 했는데 …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 걸 보니 신상에 무슨 변화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지난번 내가 궁금해했던 진실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신 차장의 무선 호출기에 알겠다는 메시지를 남겨놓고 공장에서 보내온 재고 샘플을 챙겨 명동의 수닐 사무실로 향했다.
하반기 시즌이 시작되면 거래선과 오더 확정을 위한 줄다리기가 한참 동안 진행되어야 하기에 실적 관리가 더 힘들어지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런 상황은 숫자를 업으로 삼아야 하는 영업에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의 시간으로 여겨지기에 재고 제품 판매는 가뭄 속 단비 같았다.
실적도 바로 챙길 수 있고 공장의 부담을 깔끔하게 지워줄 수 있으니 한마디로 일거양득이 되었다.
“하이 수닐. 선적은 아주 잘 진행되었고 서류 작업 끝나면 수수료 관련 건도 마무리될 거예요.”
“하이 보스님. 너무 기뻐요. 일이 잘 끝나서…”
수닐은 싱가포르 선적이 최종 마무리되면 곧 수수료 정산이 시작되는 것을 잘 알기에 기분이 좋은 듯 목소리와 표정이 아주 밝아 보였다.
“오늘 내가 온 이유는 재고 판매 관련 때문이에요. 샘플 한번 볼래요?”
재고 샘플을 책상 위에 올려놓자 수닐의 동공이 확장되기 시작한 걸 보니 돈 냄새를 확실히 맡은 것 같았다.
“와우… 보스님…이런 샘플은 어디서 가지고 오신 거예요?”
“지난번 공장 검사 갔을 때 창고에 있던 재고 제품 정리해서 가지고 온 거예요. 다른 거래선에게 판매하기 전에 수닐 씨부터 보여주려고 가지고 왔죠.”
“땡큐.. 빅 보스님… 하하하.”
“판매 가능 하겠어요?”
“당연하지요. 이거 제가 다 사겠습니다. 판매 금액만 잘 맞춰주세요. 하하하.”
워낙 재고 제품 취급에 대한 경험이 많고 어떤 제품을 어느 거래선에 보내야 하는 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시간을 줄 일수 있어서 수닐과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알았어요. 일단 샘플 다 두고 갈 테니 홍콩과 싱가포르 거래선들과 잘 협의해 보고 연락 주세요. 가격은 나중에 알려 줄게요.”
“땡큐.. 땡큐.. 마이 빅 보스님…헤헤헤.”
확실히 수닐은 사업에 최적화된 인도인이었다.
신난 얼굴 표정을 하며 연신 머리를 숙이며 고맙다는 얘기를 하는데 싫지가 않았다.
돈을 상징하는 부와 풍요의 신 인 락슈미(Laxmi)를 늘 책상 위에 모셔 두는 수닐은 작은 이익에도 늘 민감하게 반응하던 친구였다.
조만간 수수료가 자기에게 들어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그날 오후.
국내 영업팀은 뭔 일이 생긴 듯 여기저기서 큰 소리가 사무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생산이 이미 끝난 제품을 더 이상 안 받겠다는 게 무슨 이유입니까?”
“그건 당신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그걸 나한테 왜 되묻고 그러는데…”
“제품 검사도 다 패스하고 했는데… 갑자기 왜 그러세요?”
“뭐… 패스? 우리가 갔을 때 검사하던 제품의 품질하고 오늘 들어온 제품의 품질이 완전히 달라. 이미 받은 제품도 반품하라고 난리야…”
얼마나 큰 목소리인지 전화기 너머로 다 들려올 정도였다.
무교동에 자리 잡은 종합상사의 봉제 부서에 납품한 제품에 문제가 생겨서 제품을 만들지도 못하고 반품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반품도 문제지만 남아있는 공장의 제품도 만만찮은 수량이었기에 국내 영업팀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완제품 생산 후 문제가 생기면 더 큰 비용 문제가 발생하기에 거래선 입장에서는 일찍 마무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고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이 업체와는 오랜 시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클레임 비용을 아주 최소 비용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아주 악독한 업체를 만나면 위탁생산을 하기 위한 봉제 공장의 비용까지 물어줘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하였다.
탁월한 실적 관리를 자랑하던 이승진 부장은 이번 일로 큰 타격을 입을 게 뻔했다.
이런 문제가 생기면 결론은 늘 납품업체가 손실을 떠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이승진 부장 입장에서는 아주 치명적인 한방이 될 것이다.
“야. 니들 이번 문제 어떻게 해결할 거야? 맨날 현장 안 나가고 보고만 받고 그러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 아냐… 검사할 때 한 놈이라도 갔으면 이런 일 사전에 해결할 수 있었잖아….. 에이 한심한 놈들…”
국내 영업팀은 완제품 검사를 대부분 공장에 일임하고 보고서만 받는 형태로 진행을 하다 보니 이런 일이 가끔 발생을 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가끔 발생을 했지만 개선을 하기 위한 국내 영업팀의 변화는 크게 없었다.
그러니 하전무로부터 툭하면 까딱이라는 핀잔을 들어도 아무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이승진 부장의 왕 짜증과 욕설이 섞인 목소리가 온 사무실을 가득 메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사 라인으로 인정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이런 대형 사고가 터졌으니 더욱 애가 탈것이고 더구나 하반기에 특별 인사 발령이 있다는 소문은 이승진 부장을 더욱 초조하게 할 뿐이었다.
괜한 불똥이 우리 팀으로 튈지도 몰라 미스고와 나는 숨 죽인 채 선적 서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워드. 은행에 Nego 서류 제출하러 가야 하는데 함께 갈래요?”
“오케이.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이승진 부장에게 얘기하고 올 테니 서류 준비해 놓으세요.”
“이승진 부장님. 지난번 싱가포르 선적 건 은행 Nego 서류 작업 때문에 지점하고 본점을 좀 다녀오겠습니다.”
화가 잔뜩 나 보이는 이 승진 부장의 자리로 가서 조용히 외근 다녀온다는 얘기를 했더니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뭔 서류 작업이 그리 복잡해? 한 명만 가도 되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신용장에 나와 있는 문구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서류 수정 작업 (Correction)을 안 해도 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미스고와 직접 본점에 가서 설명을 해야 할 일이 좀 생겼습니다.”
몇 가지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상황 설명을 하자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빨리 나가라고 한다.
이런 분위기엔 빨리 사무실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다.
눈치 100 단의 미스고 덕분에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와서 광화문 지점에 준비해 온 서류를 제출하고 마무리하기까지 채 10분도 안 걸렸다.
최대한 사무실 주변을 떠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기에 명동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봄기운이 완연한 명동 길에는 한국의 최고 혼잡 지역임을 과시하듯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 틈에 끼여 잠시나마 냉랭한 회사의 분위기를 잠시 피하기로 하고 각자 알아서 시간을 보낸 후 함께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자 미스고는 기다렸다는 듯 반응을 한다.
“알았어요. 하워드… 나도 좀 가볼 곳이 있었는데 잘 되었네요. 호호호.”
“잘 둘러보고 두 시간 후에 이곳에서 봐요.”
미스고와 지하차도 앞에서 헤어진 후 난 미도파 백화점 사이로 난 길을 좀 걷고 싶었다.
“땡땡이치고 회사 밖을 나오니 역시 좋네.”
속으로 혼잣말을 하며 길 건너편 신호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심장이 멎을 뻔하였다.
채 혜령…
홍콩에서 만났던…
꿈속에서도 만나보고 싶어 했던…
그녀가 건너편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서있는 걸 보았다.
봄 냄새 물씬 풍기는 노란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난 길을 건너지 않은 채로 그녀를 기다렸고 점점 다가오는 그녀를 쳐다보니 가슴이 쿵쾅 거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갑작스러운 인사에 그녀가 흠칫했다.
주변에 워낙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묻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에 불편한 반응을 보이는 듯했다.
“어… 혹시 홍콩에서 만났던 분 맞죠?”
“네. 홍콩에서 만났던 전 영문입니다. 기억하시겠어요?”
“그럼요. 기억하지요. 호호호.”
우리는 그렇게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났다.
“길거리에서 이러지 말고… 커피라도 한잔하실 시간은 되세요?”
우연이지만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적극적으로 시간을 내달라는 표현을 했다.
“네. 잠깐 시간 낼 수 있으니 커피 한잔하고 가요.”
미도파 백화점 주변 작은 커피숍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가벼웠다.
꿈에 그렸던 그녀와 한국의 명동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내가 먼저 질문 공세를 폈다.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됐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그때 홍콩에서 돌아오면서 해프닝이 좀 있었거든요. 호호호.”
“연락처를 받지 못해서 제가 후회를 얼마나 많이 했었는데요…그리고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목이 빠질 뻔했다고요. 하하하”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기에 오늘의 우연한 이 만남이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사실 그때 주신 연락처를 명함지갑에 넣어두었는데 한국으로 들어오는 짐을 싸면서 호텔에 빠뜨렸던 것 같더라고요. 그 이유로 홍콩에서 만난 거래처 연락처까지 한꺼번에 없어져서 곤욕을 좀 치렀어요. 호호호.”
커피잔을 입술에 살짝 대고 목을 축인 후 말을 다시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홍콩에서 만났던 거래선들은 업무 관련 때문에 팩스를 다시 받아서 연락처를 알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전 영문 씨 연락처만 모르겠더라고요. 너무 미안했지만 도저히 기억을 해 낼 수가 없어서…호호호.”
그녀도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전 영문 씨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아까부터 계속 웃으시길래…”
“그럼요. 혜령 씨를 이렇게 만났는데 기분이 안 좋겠습니까.. 하하하.”
나도 모르게 그녀를 쳐다보면서 계속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 같았다.
홍콩에서 있었던 일 얘기를 잠시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그녀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들어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신데렐라처럼 귀환시간이 다 되어서 헤어져야 했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구두를 들고 다니며 신데렐라를 찾으러 다녀야 했던 왕자가 아니었다.
확실하게 서로의 연락처를 다시 주고받아서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된 그런 만남이었다.
“오늘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 연락을 드릴 테니 저녁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네. 저도 전 영문 씨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이제는 연락처 정확히 알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호호호.”
짧은 만남이었지만 회사의 우울한 분위기를 다 잊게 만드는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웃음 짓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미스고와 시한폭탄 같은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