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은 여전히 냉기가 돌았다.
국내 영업 팀원들은 다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이승진 부장 혼자 적막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여전히 화가 잔뜩 나 있는 표정이었고 가끔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며 외근 중인 팀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부장님. 다녀왔습니다.”
“어… 간 일은 잘 해결하고 왔는가?”
“네. 본점 직원들하고 업무 잘 끝냈습니다. 더 이상 해석차이로 인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알겠네. 가서 일 보시게.”
다녀오지도 않은 본점에서의 업무를 잘 마무리한 것처럼 보고를 드리고 자리에 앉았다.
사무실을 잠시 비운 사이 홍콩, 대만, 싱가포르 바이어들로부터 팩스가 들어와 있었다.
We are pleased to inform you that…..
긍정 의미로 시작되는 팩스의 첫 문장을 보니 좋은 일 일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반기 시즌을 대비하여 샘플을 보낸 지 꽤 오래되었지만 거래선으로부터 아무런 피드백이 없어서 좀 걱정이 됐었는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거의 동시에 피드백을 보내왔다.
주문량도 생각보다 꽤 많았고 최종 생산 전 공장 협의가 끝나면 바로 오더 진행을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팩스 내용을 꼼꼼히 살핀 후 생산 팀에 전달할 업무 내용을 정리하여 공장으로 팩스를 보내고 나니 퇴근 무렵이 되었다.
지금의 사무실 분위기로는 먼저 퇴근한다는 말을 하기가 좀 부담이 되었다.
신 차장과의 약속도 있는데….
“이 부장님. 해외 거래선으로부터 하반기 오더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분위기 반전에 필요한 것은 역시 실적에 대한 보고였다.
“오.. 그래? 예상 금액이 어느 정도 될 것 같은가?”
“아직 금액에 대한 최종 확정은 아닌데 하반기 샘플 디자인에서 70% 정도를 수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처럼 좋은 소식이네. 국내 영업이 자네처럼 일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다들 앉아서 까딱 이처럼 일하고… 사고나 치고 있고…에휴…한심한 놈들…”
이 부장은 긴 한숨을 내쉬며 국내 영업팀에서 발생한 사고얘기를 또 꺼냈다.
“그리고 지난번 공장 재고 샘플도 다 판매가 될 것 같습니다. 저녁에 미팅을 하기로 약속이 되었습니다.”
빠른 퇴근을 위해서는 또 다른 보고가 필요했다.
“정말인가? 일처리를 참 잘하네… 이번에 국내 영업에서 사고 친 것도 좀 팔아줄 수 있나?”
“트라이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최종 결과가 안 나온 상황에서 미리 거래선에게 얘기하는 건 좀 빠른 것 같습니다.”
사고 처리가 우선인 이 부장은 이번 일이 하전무에게 보고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 보였다.
“당연하지. 지금 사고 현황을 확인 중이니까 나중에 결론이 나면 전 주임도 관심을 좀 가져주게.”
“그럼요. 저도 최선을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거래선 미팅 잘하고 들어가쇼.”
사실 국내 영업을 책임지는 이승진 부장은 해외 영업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나 최근 불거진 문제 제품의 처리 때문에 부쩍 관심을 많이 보였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공장의 재고 제품을 일사불란하게 처리하는 과정을 쭉 지켜보고 있었고 국내 영업에서 사고 처리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주문과 수금이 이루어지기에 더욱 흥미를 느끼는 듯하였다.
어찌 됐든 일찍 퇴근하기 위한 명분을 쌓기에는 실적 보고가 최고라는 걸 새삼 느끼며 신 차장을 만나러 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시계를 쳐다보니 약속 시간도 좀 남았고 봄기운도 느낄 겸 약속장소까지 걸어가도 충분해 보였다.
교보문고를 지나 피맛골의 먹자골목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와 일찍 퇴근을 한 직장인들의 왁자지껄하게 잔 부딪히는 소리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듯했다.
조선 시대에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 “피마(避馬)”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지는 골목이 서울의 한 중심에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서민들이 소소하게 일상을 위로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이기에 지나칠 때마다 더욱 정감이 느껴진다.
온갖 먹거리의 유혹을 뿌리치고 약속장소인 인사동의 한정식 집에 도착했다.
신 차장 이름으로 된 예약을 확인하고 안내된 방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신 차장의 무선 호출기에 음성을 남겨 놓고 기다려봤지만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긴 듯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해졌다.
“손님. 예약하신 식사를 어떻게 할까요?”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식당 종업원이 궁금해하며 예약한 식사에 대해서 물으러 왔다.
“아직 일행이 도착을 안 했는데…”
이미 예약을 한 터라 식당에서도 주문한 코스 음식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그냥 나가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어쩔 수 없이 예약한 음식을 먹기로 결정을 해버렸다.
“15분 후에 음식을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급하게 삼식이 동기에게 무선 호출을 했더니 바로 연락이 왔다.
“삼식아… 지금 너 어디야? 아직 사무실?”
“어. 지금 막 퇴근하려고 하는 중이었지. 8282가 찍혀 있어서 바로 연락한 거야. 무슨 급한 일 있냐?”
“잘 됐네. 그럼 여기 인사동에 있는 한정식 집인데 지금 바로 와라. 내가 너 밥 사주려고 그러지. 하하하.”
“잘 됐네. 약속도 없고 그랬는데… 바로 거기로 갈게.”
시간에 맞춰 삼식이도 들어오고 음식도 준비가 되었다.
동동주를 곁들여 맛나게 음식을 먹고 나니 취기가 오르고 오늘 있었던 얘기를 시작하려고 하는 즈음 삼식이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하워드. 요즘 회사가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느낌 안 받았냐?”
“글쎄… 난 요새 영업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어서… 하하하.”
“이 자식이 요새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는구먼…쯧쯧쯧.”
“야.. 내가 알아봐야 도움이 되지도 않는데 뭘…”
하마터면 신 차장과 만나기로 한 얘기를 할 뻔했는데 삼식이가 먼저 회사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신 차장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찌 됐든 신 차장과의 약속은 지키게 된 셈이어서 다행이었다.
“요즘 우리 인사팀의 정조준 부장이 좀 이상해. 뭔 일이 있는지 하전무 방에 자주 오르락내리락하고 그런다. 특별한 보고 사항도 없던데…”
“인사팀 책임자면 자주 보고하러 다니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뭐가 이상해?”
“야. 보고도 적당히 하는 거지. 하전무 방이 아무 특이사항도 없는데 커피 마시러 가는 놀이방이냐…”
“하하하. 그건 그렇지.”
과거의 곽상무는 특별한 보고가 없어도 자기 사무실에 사람들 부르는 걸 좋아했고 커피를 마시며 노닥거리는 놀이방 역할도 하고 그랬던 건 사실이었다.
“내가 듣기에 조만간 회사에 큰일이 터질 거라는 얘기들이 돌아. 그리고 지난번 정조준 부장이 통화하는 얘기를 얼핏 들었는데… 법원이 어쩌고 소송이 어쩌고 그러는 얘기를 하는 게 좀 의아하기는 했지…”
“야. 우리가 알아봐야 뭐가 도움이 되겠냐? 그냥 그런 일이 있나 보다 하면서 회사 생활하는 거지.”
“회사가 너무 조용하니까 불안해서 그렇지. 마치 태풍이 오기 전의 고요함이라 할까… 불안해서 회사 다니는 것도 겁나… 하하하.”
“삼식아. 신경 쓰지 말자. 괜한 일에 시간 허비하지 말자고… 종로로 가서 생맥주나 한 잔 더하고 가자… 하하하.”
“오케이. 시원한 생맥주 좋지… 하하하.”
허리에 찬 무선호출기를 계속 쳐다보았지만 계산을 끝 낼 때까지 신 차장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보통 약속을 못 지키는 상황이 되면 미리 연락을 하고 그랬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슬슬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정식 집을 나서자마자 갑자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종로까지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가는 게 좀 부담스러웠던 삼식이와 나는 골목 앞에 보이는 조그마한 통닭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두 분 이세요?”
“네. 둘이에요.”
작은 가게이지만 인사동 분위기에 맞게 한국 전통 골동품으로 내부 장식을 해 놓아 나름 운치가 있어 보였다.
손님은 우리 둘 뿐이었다.
밖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마시는 생맥주와 통닭의 맛이 아주 기가 막히게 좋았다.
“삼식아. 넌 여자 친구는 없냐?”
“그런 너는 있냐… 하하하.”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그래. 너나 나나 여자가 있을 리 없지.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고 생맥주나 시원하게 한잔하자. 하하하.”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삼식이가 여자친구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린 그렇게 비가 내리는 인사동의 거리를 쳐다보며 회사 얘기와 인생 얘기를 하며 시원하게 생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출입문에 달아 놓은 풍경 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우리가 앉은 창가 옆자리로 두 여성이 앉는 모습이 보였다.
“웬일이라니... 갑자기 비가 내리고…”
“그러게. 잠시 비도 피할 겸 생맥주나 한잔하고 가자. 호호호.”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자리 잡은 쪽을 쳐다보니 그녀였다.
“어.. 혜령 씨 맞죠? 여기 웬일이세요?”
“어머.. 영문 씨?”
“비가 그치길 기다리느라 여기서 회사 동기와 생맥주 한잔하러 왔지요. 하하하.”
“어머. 저희도 갑자기 비가 내려서 잠시 비도 피할 겸해서 왔어요. 호호호.”
삼식이가 놀란 눈을 하고 누구냐며 허리를 툭 친다.
“괜찮으시면 … 저희와 함께 마실래요?”
그녀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의향을 물어보더니 흔쾌히 동의하였다.
“얘는 제 회사 동기 임 삼식이라고 합니다.”
“이 친구는 정숙이예요. 심정숙… 저와 함께 일하는 친구…”
소개가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목례를 하며 인사를 건넸다.
졸지에 소개팅을 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신이 난 건 삼식이였다.
그녀와 함께 온 정숙이라는 친구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끊임없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혜령 씨…세 번씩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기분이 묘한데요?”
“뭐가 묘해요?”
“홍콩에서의 우연한 만남도 그렇고… 그 복잡한 명동에서의 만남도 그렇고…그리고 비가 내리는 인사동 통닭집에서의 만남도 그렇고… 하하하.”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그런 만남이 쉽지가 않은데…호호호.”
“우리 이러다 뭐 되는 거 아닌가요? 하하하.”
“글쎄요…호호호.”
우린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나는 속으로 비가 더욱 거세지기를 바랐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수 있으니까……
빗줄기는 나의 바람대로 점점 거세 졌고 나는 인사동의 허름한 통닭집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마지막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