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흰손거사 (白手居士)

by 전선훈

한동안 따로국밥처럼 놀던 국내 영업팀이 이 부장의 탁월한 관리 능력과 골치 아픈 문제 해결 덕분에 똘똘 뭉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잠잠하던 거래처에서의 주문도 활발해지고 다시는 예전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에서 모든 것을 확인하고 해결하는 습관이 모든 영업사원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이 되었다.


아주 긍정적이고 좋은 습관…


“영업팀의 이런 분위기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호호호.”


큰 문제없이 순항하는 해외 영업팀의 실적으로 인해 숨죽여 지내던 미스고의 웃음소리가 모처럼 사무실에 크게 울린다.


“왜요? 예전엔 안 그랬나요?”


“그럼요… 완전 전쟁터에… 욕설이 난무하고… 엄청 심했죠… 아침에 회사에 나오는 게 싫을 정도로…호호호.”


“원래 영업이 다 그런 거예요… 너무 조용해도 이상한 거니까… 하하하.”


서로 웃으며 하반기 선적해야 할 제품의 생산 진행일정을 확인하며 일정조율을 하던 중 인사 총무팀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전 주임님… 지금 잠깐 정조준 부장 자리로 오실 수 있어요?”


최근 신입으로 입사한 여직원의 앳된 목소리였다.


“네… 알겠습니다.”


이 부장은 이번 문제 해결로 안정적인 하사라인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지만 정조준 부장은 아직도 하사라인에 끼지 못한 듯하였다.


그래서인지 예전보다 다른 부서의 업무를 많이 지원해 주었고 늘 고압적인 자세로 일하던 태도가 완전히 변했다.


최근 하전무가 지나가면서 “정 부장은 어깨 힘 좀 빼고 일하쇼. 지원부서에 일하는 부장이 마치 사장 같아...”라고 하였던 말 한마디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 이후로 다른 부서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변했고 매번 뭐 도와줄 것 없냐는 말을 입에 달고 일했다.


“정 부장님. 안녕하세요.”


“오… 전 주임 왔어. 이번 내수 영업팀 문제 해결의 일등공신이라고 소문이 많이 났던데…”


“그냥 소문이고요… 이승진 부장이 다 한 겁니다…”


“전 주임이 샘플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했다고 하던데?”


“제가 하는 일이 그런 건데요 뭐…헤헤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저를 찾으셨어요?”


“전주임이 좀 도와줘야 할 일이 생겨서 불렀네.”


“제가 뭐를 도와드려야 하나요?”


“며칠 있으면 우리 회사로 인도에서 산업 연수생들이 들어오네. 인원은 약 45명 정도 된 다네.”


“산업 연수생이면 공장에서 일하겠네요?”


“그렇지. 우리 회사가 인도에 공장을 설립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인도 정부와의 협약으로 인해서 우리 회사가 산업 연수생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거든.”


“그런데 제가 도와드릴 일이 뭐가 있나요?”


“알다시피 우리 회사에 외국어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직원이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그래서 전주임이 연수생 오는 시기에 공항부터 공장까지 인솔하는 업무를 좀 진행해 주었으면 해서 말이야…”


“제가 결정을 할 수는 없을 것 같고요… 이 부장하고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장에게는 얘기를 해 놨지. 그 시기에 전주임의 업무가 많지 않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얘기는 하던데… 어찌 좀 안 되겠나?”


좀 생소한 부탁이었지만 회사의 일이었기에 거절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네… 알겠습니다. 그럼 임삼식 사원하고 함께 업무를 지원하는 걸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우리 팀 임삼식 사원 하고는 동기이니까 잘 좀 해주게.”


“일정 관련 내용은 제가 임삼식 사원하고 업무 소통하도록 하겠습니다.”


해외와 관련된 일이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부서들이 많아졌다.


경력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도움이 되는 일들이지만 영업과는 조금 다른 일들이 많아지는 게 부담이 되었다.


“어이… 삼식이 사원… 나랑 커피 한잔 어때?”


“네. 전 주임님… 제가 한잔 뽑아 드리겠습니다.”


“항상 존댓말을 해주니 좋구먼…일 참 잘하는 사원이야… 하하하.”


한참을 서로 웃다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야… 산업 연수생 얘기는 뭐냐?”


“나도 오늘 들었어. 지난달에 비자 신청하는 업무를 준비하라고 얘기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었지.”


“아무튼 네가 준비하려면 많이 바쁘겠네. 일정 확정되면 나에게 알려줘. 이 부장하고 시간 조율하고 해야 하니까.”


“알았어… 확정되면 연락 줄게… 인도 사람들이라 음식하고 숙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네.”


“야… 고민은 무슨… 공장에 기숙사도 있고 공장 밥 함께 먹으면 되는 거지. 하하하.”


“아… 몰라 몰라… 맨날 카레 해달라고 하면 어떡하냐… 하하하.”


“그러게… 카레 먹으러 공장 자주 내려가야겠네… 하하하.”


서로 쳐다보며 한참을 웃었다.


옥상에서 바라본 광화문 사거리의 모습이 예전과는 좀 달라 보였다.


경복궁의 정문을 가로막고 세워져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위한 가림막 이 세워지고 있었다.


철거를 하느냐 아니면 후대에 남겨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가를 두고 한동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총독부 건물의 철거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치욕의 상징이었던 건물이니 빨리 없애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는데 반대를 무릅쓰고 철거 결정을 해버린 YS의 결단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내려가자… 연수생들 고민은 많이 하지 말아라. 뭐든지 잘 먹이고 잘 재우면 되니까…무슨 문제 생기겠나… 하하하.”


“그러게…아무 문제 없이 연수나 잘 받고 돌아갔으면 좋겠다… 하하하.”


삼식이와 헤어지고 사무실로 들어가니 이 부장이 회의실로 잠깐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낸다.


“인사 총무팀 정조준 부장이 연수생 얘기하면서 부장님과 상의해서 업무 협조 좀 해달라고 하던 데요?”


“어… 미안… 내가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 하는데 깜빡했네…”


“일정이 확정되면 이틀정도 업무 지원을 해달라고 하던 데요?”


“알다시피 정 부장 팀에 영어 하는 직원이 없어서 나에게 전주임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이 왔었어. 어쩌겠나… 회사 일인데…”


“네. 알겠습니다. 임삼식 사원하고 함께 진행하기로 얘기하고 왔습니다.”


“회사의 여러 부서에서 해외 관련된 일을 전주임한테 부탁하는 게 많아져서 좀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런저런 경험해 본다 생각하고 해 주게…”


“그럼요… 우리 회사 일이니까요…헤헤헤.”


회의실을 나오는 나를 보자마자 미스고가 나를 애타게 찾았다.


“전 주임님… 좀 전에 신차장님한테 전화 왔었어요. 호출기에 연락을 했는데 전주임이 답이 없어서 전화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 내가 오늘 호출기를 집에다 두고 오는 바람에 전혀 생각을 못했네요… 에고 많이 섭섭하셨겠네.”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회의 들어갔다고 하니까 나오면 호출기 메시지 확인해서 연락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확인해 볼 게요.”


확인을 해보니 신 차장과 혜령 씨의 음성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신 차장의 연락이 없었으면 혜령 씨의 메시지까지 깜빡할 뻔했다.


어렵게 다시 만났는데 괜한 오해를 살 뻔했다.


“영문 씨… 잘 지내시죠? 한동안 제가 지방 출장을 다니느라 연락을 못했네요. 광화문 근처 지나다가 영문 씨 생각나서 연락한답니다. 오늘 저랑 저녁 함께 하실래요? 지난번 인사동에서 생맥주 계산하신 거 갚으려고요…호호호. 연락 주세요. 한 시간이 지나면 다른 약속 잡을 거예요…호호호.”


그녀의 음성을 들으니 가슴이 뛰기 시작하고 힘들었던 하루에 대한 보상을 받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미안해요. 혜령 씨… 이제야 확인을 했네요… 오늘 저녁 시간 충분하니 교보문고 안에 있는 음반매장 앞에서 6시에 만났으면 하는데… 연락 주세요.”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겨놓고 신 차장이 남긴 음성 메시지를 들었다.


“하워드… 잘 지내지? 내가 그동안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네. 자네가 우리 집까지 찾아가서 내 안부를 물었다고 가족들이 얘기하더군. 사정이 생겨서 한동안 절에서 기거하였었네… 오늘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 나에게 연락 좀 해주게. 집 전화번호로 하면 되네.”


신 차장과는 꽤 오랫동안 연락이 안 되어서 잊고 있었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신 차장님 댁이죠? 저는 전 영문이라고 합니다.”


“아…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바꿔드릴게요.”


전화를 받은 신 차장의 부인 목소리가 밝게 들렸다.


한동안 소식조차 없었던 남편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그 기분이 그대로 전화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어.. 하워드… 잘 지냈어?”


“네. 그냥저냥 지내고 있습니다.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일은 무슨…흰손거사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냥 여기저기 김삿갓처럼 떠돌아다녔지… 하하하. 그나저나 오늘 저녁 시간은 어때?


“아… 오늘은 안 되겠는데요… 제가 신차장님보다 더 우선적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겨서…헤헤헤.”


“오… 나보다 우선인 사람이면 좋은 일이구만… 하하하.”


“내일 저녁 함께 하시죠. 미스고도 차장님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고요.”


“오케이. 그럼 내일 미스고랑 저녁에 함께 보세.”


“네. 알겠습니다. 쉬세요…”


신 차장의 목소리를 들으니 반가웠다.


하지만 오늘은 신 차장과의 만남보다 더 중요한 만남이 약속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약속 시간을 미뤘다.


“영문 씨. 6시에 교보에서 봐요. 거기서 기다릴게요.”


호출기 메시지를 확인하니 그녀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전주임은 뭐가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이야? 뭐 좋은 일 있나 봐?”


메시지를 확인하는 동안에 내 표정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는지 이 부장이 묘한 표정의 웃음을 지며 물어본다.


“아…네…. 그냥 좋은 일이 있어서요…헤헤헤… 그래서…...”


“표정을 보아하니 일찍 갔으면 하는 구만 … 빨리 들어가시게… 하하하.”


“네. 일찍 좀 들어가겠습니다.”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어 약속장소인 교보문고로 총알같이 뛰어나갔다.


음반 매장에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음악을 듣고 있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잠시 바라만 보기로 했다.


내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사라지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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