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사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곽상무와 신 차장이 회사를 그만둘 때의 상황이 이 사건과 연관이 되어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곽상무는 개인 비리 혐의로 엮어서 불명예 퇴진을 하게 만들었고 신 차장은 오지도 않을 사람을 발령 내는 것처럼 해서 불편한 퇴직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좀 억울하기는 했지. 처음에는 새로 온 하전무의 계획이라고 생각하였었는데 사장과의 면담을 진행할 때 본심을 알게 되었지. 섭섭하더라고…”
“면담할 때 사장은 뭐라고 얘기했었나요?”
“어이가 없더라고. 오랜 시간을 도양상사에 충성을 다하고 사장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도 나서서 하고 했는데…”
천천히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신 후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사장은 인사 발령은 하전무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라 자기도 몰랐다고 하였고 반려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변명 비슷하게 하더라고…”
“사장이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그리고는… 후배들을 위해서 퇴진을 하는 것도 모양새가 그리 나쁘지 않으니 수락을 해주는 게 어떨까 하고 묻더라고. 하하하.”
“좀 심한데요? 평생을 몸 바치고 행동대장도 서슴지 않고 하셨는데?”
“실망이 컸지. 이 사람 하고는 여기까지가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도 갑작스러운 퇴직이니 위로금 정도는 사장이 알아서 주겠지 했지만 아무 얘기가 없더라고. 근데… 그것도 하전무랑 협의해서 결정하라는 얘기만 하더라고…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돈 없어도 됩니다” 하고 바로 나와 버렸지… 지금은 좀 후회되기도 하지… 조금이라도 받고 나올 걸 하고… 하하하.”
“야… 좀 그렇네요. 칼춤을 추는 자의 뒤에서 흐뭇하게 지켜만 보고 있었다니… 큰 그릇이 될 사람은 아닌 것 같네요.”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했던 말은 화재 사건은 공동의 책임이니 어디 가서 함부로 얘기하고 다니지 말라는 경고성 발언이었지… 그 얘기를 들으니 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기만 하더라고…그리고는 바로 짐을 챙겨서 집으로 간 거야…”
“전체 얘기를 들으니 그간 있었던 일들이 퍼즐처럼 맞춰지네요.
“하전무가 자네한테 계속 나와 관련된 얘기를 궁금해하며 묻지 않던가?”
“네. 신 차장을 만나서 나눈 얘기, 들은 얘기 등을 수시로 보고해 달라고 얘기했었죠. 저는 그저 알겠다고만 했죠…”
“아마도 나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화재 사건의 내막을 알아야 회사에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준비할 목적이라고 안 하던가?”
“네. 맞아요… 검찰 출두하는 날 하전무가 불러서 갔더니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하전무는 우리 집을 계속 감시하면서 내가 아마도 보험회사와 모종의 딜을 할지도 모르니 잘 감시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거야.”
“아니 지금 시대에 무슨 미행과 감시를 해요?”
“그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그 사람 인성이 그런 거니까…”
신 차장의 가슴속에 쌓인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사장을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집 주변에 감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나 혼자 몰래 절에서 도피생활을 했던 이유였지.”
“정말 심하네요… 회사일로 연관된 사람이면 회사에서 보호는 못 해줄 망정 감시와 미행을 했다니… 그럼 하전무는 계속 보고를 받고 있었겠네요?”
“그럼… 내가 머무르던 절에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스님들이 내가 무슨 5 공화국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도피 중인 사람으로 알더라고… 하하하.”
“다 알면서도 나에게 계속 물어본 이유가 뭔 지 궁금해지는데요… 나중에 한번 물어봐야겠는데요.. 하하하.”
“돌아오는 답은 뻔할 거야… 회사를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었던 미스고는 취기가 올랐는지 한마디 하면서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였다.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 했는데… 우리 도양상사는 친구도 내팽개치고 적은 더 만신창이를 만들어 버리네요… 회사가 왜 이런지 모르겠네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기억이 났는데 영화 “대부”에서 나왔던 대사였다.
영화 감상이 취미인 미스고는 집 주변 비디오가게의 단골손님 중 최고 VIP였다.
“미스고는 아직도 영화감상이 취미야? 영화 대사를 줄줄이 외우고 있구먼… 하하하.”
신 차장이 웃으며 미스고의 영화 속 명대사를 기억하는 것에 놀라워하였다.
“그럼요… 애인도 없는데 집에서 영화 보면서 시간 보내는 게 제일 좋죠 뭐…호호호.”
“하워드.. 그럼 미스고 배웅하고 다른 곳에서 한잔 더 하면서 얘기하자고…”
“네.. 좋습니다… 막걸리만 마셨더니 속이 더부룩해지는데요…시원한 생맥주로 입가심하면서 얘기하시죠.. 하하하.”
계산을 마치고 미스고는 지하철로 향했고 우린 혜령 씨를 우연하게 만났던 인사동 한식집 골목 앞 맥주집으로 소화도 시킬 겸해서 천천히 걸어갔다.
신 차장은 걸어가면서도 습관이 되어서인지 뒤를 가끔씩 돌아다보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내일 회사에 출근하면 하전무가 나를 부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미스고 얘기대로 신 차장을 적으로 생각했다면 더 가까이 두고 달래야 하는 것이 회사를 위해서 더 좋았을 텐데 회사는 신 차장이 거절할 수 없는 어떤 제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했다.
“지난번 우리가 이 근처에서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가 내가 아무 연락 없이 참석 안 했던 일 기억하나?”
“그럼요… 기억하죠… 그날 아무 연락이 없으셔서 삼식이 사원하고 함께 먹었죠…그리고 차장님 덕분에 제가 제일 우선적으로 챙기고 싶은 사람도 우연히 만났거든요…헤헤헤.”
“오…그런 사람을 만났으니 다행이네… 허허허… 사실 그날 누군가가 계속 나를 쫓아오고 있어서 약속 장소로 가면 자네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서 일부러 연락도 안 하고 그냥 집으로 갔었지.”
“아…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는 그냥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아서 그냥 메시지만 남겼죠…”
점점 퍼즐이 맞춰지고 있었다.
신 차장이 왜 도피생활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렸다.
“사실 하전무는 이번 사건이 자기에게 엄청 유리한 상황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네. 사건의 실체를 하전무는 다 알고 있었고 이번일로 사장이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고 당분간 경영에서 손을 떼야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 그렇게 되면 당분간 회사 경영은 하전무가 총괄 경영을 하게 될 테니까… 소문 그대로 “사판그룹 출신이 도양상사를 경영한다” 하는 “사도 경영” 이 시작되는 거지…”
“책임을 져야 한다면 어떤 형태일까요?”
“간단하지…3.5 법칙 모르나?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처음에는 5년을 때려서 국민들에게 희열을 느끼게 하고 2심에서는 집행유예, 대법원에서는 경제발전 운운하면서 집행유예 확정…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진행되거든. 죄는 인정하나 처벌하지 않는다… 기막힌 시나리 오지…”
“그러면 한동안은 경영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겠네요?”
“그렇지… 법원에서 최종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당분간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없겠지…”
실타래처럼 엉킨 듯했지만 의문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 당분간 하전무가 모든 권한을 이양받아서 경영을 하겠네요?”
“당연하지. 하전무가 꿈꾸던 세상이 오는 거지. 사판그룹에서 일할 때도 하전무는 늘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걸 회사 생활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고 하더라고. 이제 그 꿈을 도양상사에서 펼칠 수 있으니 이번 사건이 벌어진 걸 속으로는 엄청 반기고 있을 거야… 하하하.”
“아끼다 똥 된다고 하더니… 최측근들을 다 내쳤으니 정작 자신을 보호해 줄 행동 대장은 주변에 아무도 없네요… 참….”
“안타까운 일이지… 하전무가 자기 일처럼 나서서 하지는 않을 테니… 믿을 사람이 주변에 없으니 하소연도 하지 못할 거야 아마…”
신 차장은 사장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이 안타까운지 여러 번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나와 곽상무는 사장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했는데 이제는 그런 일들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지… 다들 하전무 라인으로 인정받는 게 회사생활의 최우선 목표일 테니…쯧쯧쯧…”
“그럼 앞으로 곽상무 님과 차장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리고 함과장 님은?”
“함과장은 아무 죄가 없어… 그냥 애사심에서 비롯된 행동이고… 우리가 사전에 어떤 지시를 한 적이 없거든… 다만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는 정도의 합리적 의심일 뿐이니까…”
신 차장은 목이 탔는지 생맥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곽상무와 나는 책임을 져야지… 그리 정의로운 일은 아니니까… 비록 위에서 지시한 내용이라도 거부했어야 할 일이었으니까…”
신 차장은 체념한 듯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는 듯 책임지는 일이 그리 두렵지 않다고 하였다.
회사는 곽상무와 신 차장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았고 그냥 개인의 일탈 행위로 몰고 가려는 듯하였다.
그런 회사의 태도에 염증을 느낀 두 사람은 검찰 조사에서 화재 사건과 관련된 모든 내용을 매우 자세하게 얘기하고 나왔다고 하였다.
검찰이 두 사람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는 모르지만 매우 성실하게 조사를 받았고 궁금해하는 모든 사안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를 하고 왔으니 속 시원하다며 웃었다.
“혹시 알아… 검찰 조사에 충실하게 협조했으니 정상참작이라는 것을 해줄지… 하하하.”
“제발 그러면 좋겠네요… 하하하.”
회사는 곽상무와 신 차장에게 아무런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으면서도 사장에게 등을 돌렸다며 배신자 운운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럴수록 두 사람은 회사와 더 각을 세우게 되었고 사장의 이중적인 모습을 반드시 세상에 알려 자신들이 행했던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을 지고자 하였다.
“사장이 갑자기 입원했던데… 앞으로 조사는 어떻게 진행될까요?”
“뻔하지 뭐… 휠체어 타고 마스크 쓰고 …아… 링거도 한 대 맞으면서 출두하겠지… 하하하.”
“TV에서 늘 보던 익숙한 모습이네요… 하하하.”
신 차장과 나는 사장의 출두하는 모습을 얘기하며 한참을 웃었다.
신 차장의 얘기대로 이제 도양상사는 소문으로만 돌았던 “사도경영” 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하전무의 세상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어디에 있어야 하는 걸까…
개인의 영달 만을 생각하는 리더와 정의롭지 못한 회사에서 계속 나의 꿈을 이어가면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집으로 가는 길에 미스고가 가면서 얘기했던 영화 속의 대사가 떠올랐다.
“절대로 적을 미워하지 마라. 판단력이 흐려져”
(Never hate your enemies. It affects your judgement).”
누군가를 미워하면 내가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헷갈리게 된다.
미워하는 감정이 사장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여 오히려 사면초가에 이르게 된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