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

by 전선훈

전날 밤 사장의 구속 이후로 사내 분위기는 축 처져 있었다.


삼식이의 말처럼 사장의 구속과 직원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다들 모른척하는 분위기였고 애써 사건의 실체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언론을 통해서 중계되듯 사실이 알려질 것이기 때문에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곽상무와 신 차장은 검찰에서 충분히 참고인 조사를 받았기에 불구속상태에서 수사를 받는 걸로 되었고 함과장은 무혐의 처리를 받았다.


사내에서는 두 사람도 함께 구속되어 조사를 받을 것으로 예측했지만 신 차장의 말대로 정상참작이 되었는지 구속은 피했다.


“신차장님. 불구속 수사로 진행되니 정말 다행입니다. 어제 긴급 속보로 뜨는 뉴스를 보면서 걱정이 좀 됐었거든요…”


“걱정해 줘서 고맙네. 지난번 얘기대로 정상참작을 해준 것 같아. 성실하게 모든 것을 얘기하고 온 덕분이 아닌가 생각하네…”


“다행이기는 해도… 계속 조사를 받으러 다니셔야 하니 좀 피곤하시겠는데요?”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불구속 상태로 다니는 거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지…”


“아무튼… 구속을 면해서 다행입니다. 법원의 판결도 잘 나오면 좋겠네요.”


“판결이 잘 나올 수는 없겠지. 내가 한 일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져야 하니까… 그래야 나도 맘 편하게 살 수 있지 않겠어… 하하하.”


“언제 편한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세요. 함께 막걸리라도 한잔 하셔야죠…헤헤헤.”


“그래. 맘이 좀 진정되고 정리되면 연락할게… 걱정해 줘서 고맙네…”


신 차장과는 오랜 시간을 함께 일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나 스스로 일을 알아서 할 수 있게 도와준 은인 같은 사람이어서 늘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회사는 어수선해도 해야할 일들은 변함이 없었다.


이럴 때 잠시 출장을 핑계로 해외로 나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싶어서 홍콩의 테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Hi…Terry…How have you been?”


“Hi…Howard…Always good…”


테리와 전화 통화를 하면 항상 힘찬 목소리여서 긍정적인 에너지가 나에게 전달되는 느낌이 들어서 매번 기분이 좋아진다.


“상반기 주문 물량의 선적은 다 끝났는데… 하반기 오더 일정을 협의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요…”


“그러잖아도 일정 협의를 하려고 했었는데… 잘 됐네요. 이번엔 주문량이 좀 많아질 것 같습니다.”


“오… 아주 반가운 소식이네요…그럼 출장일정을 잡으려고 하는데 언제쯤 좋겠습니까?”


“하워드가 필요한 일정을 알려주세요…그러면 내가 일정에 맞춰서 출장을 와줬으면 좋겠다는 팩스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오케이… 일정 확인해서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도양상사에서 해외 출장을 가려고 하면 상대방의 오더와 관련된 상담을 위한 출장 요청을 원하는 팩스를 첨부하면 100% 수용되는 것이 현실이었고 그런 내용을 테리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물론 출장 전에 테리와 일정 수량의 주문량을 미리 확정하고 가야 출장 후 아주 그럴듯한 보고서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에 사전 주문 확정은 기본이었다.


“이 부장님… 오늘 테리에게 연락이 왔었는데… 하반기 오더 상담을 홍콩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일정을 잡아서 알려 달라고 하던데 어떻게 할까요?”


“좋은 소식 이구만… 일정은 빨리 잡아… 요즘 같은 회사 분위기에 대형 오더라도 들고 오면 좀 나아지지 않겠어…”


“네. 알겠습니다. 공장 생산 기획하고 디자인팀과 회의 진행해서 최대한 빨리 일정을 잡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상대방과 출장에 대한 조율을 마친 상태지만 오더 상담에 필요한 디자인과 샘플은 필수로 들고 가야 하기에 생산 기획과 디자인팀의 미팅은 중요한 일정 중 하나였다.


어수선한 회사 분위기를 잊게 만들어 주는 건 역시 일하는 것뿐이었다.


사장의 구속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니 예전처럼 그냥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하면 모든 것이 다 정상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 기획과 디자인팀과의 미팅 일정을 조율하고 끝내고 나니 하전무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 주임님… 하전무님이 지금 바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난번 검찰 조사 후 만났던 신 차장의 미행 얘기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날 신 차장과 내가 만났던 사실을 알고 있어서 사건 전후의 내막을 궁금해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전무 방에는 대책회의가 방금 끝난 듯 여러 명의 부장급 팀장들이 나오고 있었고 다들 표정이 그리 밝아 보이지는 않았다.


부장급 팀장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후 하전무 방으로 들어갔다.


"전주임... 내가 급하게 부른 것은 신 차장에게 들은 얘기 중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들려주었으면 좋겠네.”


이미 검찰에서 신 차장과 곽상무가 얘기를 다 했던 내용이라 내가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네. 신 차장과는 검찰 참고인 조사 끝난 후 함께 식사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화재 사건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하게 얘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얘기를 하던가?”


“제일 먼저 얘기를 들은 내용은 화재 사건은 사장님의 지시에 의해서 진행된 것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에 벌어진 파주 공장의 화재 사건은 설비 노후로 발생한 건이었는데… 거액의 보험료를 받게 되면서 회사의 자금 흐름이 좋아지자 고의 화재를 계속 지시한 거라고 했습니다.”


“음… 나도 대충은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신 차장이 검찰에서 그렇게 얘기를 했다면 좋은 판결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 같구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먼… 휴…”


“신 차장 말로는 보험회사의 사장하고도 얽힌 정치적 사건이라는 얘기도 하던데요?”


“나도 들어서 알고 있네… 보험회사 사장이 청와대 정무 수석으로 들어간다고…”


하전무도 사건의 실체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자기가 알고 있던 사실과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같은 내용인지를 알고 싶어 한 것 같았다.


“신 차장은 평생을 도양에서 충성을 다했지만 퇴사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서운한 감정도 있었던 것 같고… 그래서 과거의 모든 일에 대해서 검찰의 조사에 성실히 임했다고 했습니다.”


나는 하전무가 추던 칼춤이 오히려 사장에게 혈흔이 튀는 결과를 남긴 것이라는 얘기를 돌려서 하고 있었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유감이라고 생각을 하네…하지만 내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도 불편한 감정이 드는 건 똑같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진실을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신 차장에게 들었던 얘기를 하전무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었고 하전무는 그 내용을 기반으로 사장의 변호인과 대책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전무님… 제가 들은 얘기는 다 말씀드렸고… 내려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자네에게 과거 사건의 실체를 들으니 좀 더 명확하게 대응할 방법이 보이는 것 같구먼…”


앞으로 법정에서 사장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실제 속마음도 그럴지는 궁금하였다.


사도 경영이 시작된다는 소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돌았지만 사장의 구속으로 공식화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사장의 공백이 최소 1년 아니면 2년 이상이 될 걸로 생각하여 하사라인으로 인정을 받으면 탄탄대로를 걸으며 회사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직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회사 안에서는 내가 하사라인으로 공식 인증이 된 걸로 얘기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주임급 직원이 회사의 실세인 하전무와 가끔 독대를 나누는 상황은 누가 보아도 오해를 살 만했다.


이른바 라인으로 불리는 줄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라인의 중추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시간이 흐르면 은퇴를 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고 그때마다 새로운 라인이 나타나 모든 것을 바꾸려고 하는 일들이 계속 반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번복이 일상화되고 그것이 반복되는 조직은 자생력을 점점 잃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도양상사에서 그런 현상이 일상화돼 가는 것이 감지되고 있기에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둥지를 옮기려는 직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사실 회사의 로고가 그려진 배지(badge)를 달고 다니면서 얻는 안정감은 상상 이상이다.


그러나 이것에 만족하며 생활하다 보면 그저 투명한 목줄에 메어 있는 노예가 될 뿐이다.


당장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메어진 목줄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풀리는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그 목줄을 스스로 풀 수 있는 강력한 한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만든 회사가 아닌 이상 그 회사에서의 유지하고 누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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