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시대에 집단이 굴러가는 방식에 대한 잡담
<아귀레, 신의 분노(1972)>는 <지옥의 묵시록(1979)> 보다 앞서 나온 "운송수단을 타고 강을 따라 침략지를 이동하는 제국주의자들"의 이미지를 스크린화한 작품이다. 당연히 "운송수단을 타고 강을 따라 침략지를 이동하는 제국주의자들"이란 소제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 소설 <암흑의 핵심(1902)>과 엮어서 생각할만한 연결고리를 제공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암흑의 핵심>과 <아귀레, 신의 분노>, <지옥의 묵시록> 중에서, <아귀레, 신의 분노>가 가장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의 종말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속해있던 곳으로, 제국으로 돌아가거나 돌아갈 것을 암시하며 끝나는 나머지 두 텍스트와는 달리, <아귀레, 신의 분노>의 결말에서, 인물들은 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보이는 아귀레가 침몰해 가는 뗏목 위에서 원숭이들에게 자신이 제국을 건설할 것이라 선언하는 장면은, 역설적으로 ‘제국을 건설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아귀레의 시도가 실패했던 것처럼, 스페인 제국 또한 이미 실패했다.” 스페인 제국은 아귀레가 하려던 일과 같은 시도를 하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화승총과 철갑옷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이는 분명 제국은 앞으로도 ‘얼마동안은’ 건제할 것임을, 그래서 끔찍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듯한 <암흑의 핵심>이나 <지옥의 묵시록>의 결말에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정서이다. 그런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산업혁명 이후의 '문명이라 불리는 것의 결정체'인 증기선을 타고 '상아'를 찾아 콩고강을 이동하는 제국주의자들을 그린 <암흑의 핵심>과, 포드주의의 발원지인 미국에서 대량생산된 군수품인 연안 초계정(PBR)을 타고 '자본주의를 이식하러 온 군인'을 찾는 미군들을 그린 <지옥의 묵시록> 보다도,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인들에 의해 짓밟히기 시작하고, 피사로가 잉카제국의 지도자를 피살했을 때, 뗏목을 타고 존재하지 않던 황금의 나라를 찾던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을 그린 <아귀레, 신의 분노>가 제국주의의 종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제국주의의 가장 원형이라 할 만한 시대를 다룬 작품이, 가장 직접적으로 제국주의의 종말을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니까, 포드주의 이전, 산업혁명 이전, 대항해시대의 강철과 화약, 병균으로만 무장한 제국주의자들을 그린 텍스트가, 산업혁명이나 포드주의 시대를 다룬 텍스트에 비해 제국의 멸망을 암시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대항해시대와 산업혁명과 포드주의를 거쳐오는 동안에도, 제국주의가 계속해서 존재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대항해시대에서, 산업혁명의 시대에서, 포드주의에서, 제국주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했는가?
<아귀레, 신의 분노>의 시작을 살펴보자. 원주민들이 꾸며낸 이야기인, 존재하지 않는 엘도라도를 찾아 이동한 피사로의 원정대가 진격이 좌초되자, 식량 확보와 정찰을 위한 수색대를 꾸민다. 돈 페드로 드 우르수아가 수색대 대장이, 돈 로페 드 아귀레가 수색대 부관으로, 스페인 왕족 한 명이 왕가를 대표하여 임명된다. 이들의 이동 중 급류에 휩쓸려 뗏목 하나가 고립되는데, 원주민들과의 교전으로 인해 고립된 이들 모두가 살해당한다.
우르수아는 이들의 장례식을 치르려 하지만, 아귀레는 대포로 뗏목을 침몰시켜 버린다. 명백한 징후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페인 왕족이 지켜보고 있는 한, 아귀레가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 여기며 방치한다. 그리고 이들이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다. 계속 전진해야 할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할 때가 왔을 때, 우르수아가 돌아갈 것을 결정하자, 아귀레는 계속해서 전진할 것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키고, 스페인 왕족을 바지사장으로 추대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귀레가 쿠데타 과정에서 대원들을 선동하는 방식이다. 그는 40명으로도 정복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헤르난도 코르테즈를 들먹이면서, 그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음에도, 멕시코를 정복했다는 것을 들먹이면서, 그러면 부와 명성이 따라올 것이라고, 즉 그들에게는 ‘정복’을 할 힘이 있으며, 그 힘이 있는 한, ‘질서’ 또는 ‘도덕’이라는 것을 위반한다 하더라도, 이를 활용해서 앞에 있는 세상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남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색대원들의 반응이다. 이들 중 다수는 우르수아에게도, 아귀레에게도 동조하지 않는다. 이들이 아귀레를 따르는 이유는, 우르수아의 아귀레 제압 시도가 실패했기 때문이며, 그 이후에도 우르수아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이 등장하자, 아귀레 패거리가 그들을 총으로 쐈기 때문이다. 수색대원 절대다수는 아귀레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아귀레는, 그가 명령하면 ‘소극적이더라도 반대하는 태도를 내비치는 이들’을 참수할 소수의 충실한 동조자들을 갖고 있었고, 그 결과 영화의 나머지 부분은 아귀레의 광기와 그에 휩쓸리는 수색대원들의 모습들로 구성되게 된다. 그리고 그 결말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파국으로, 수색대원 모두가 병들거나 다쳤으며 표류하는 뗏목 위에서 쌩쌩한 아귀레 혼자 원숭이들에게 포부를 밝히는 장면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주목해 봤을 때, 즉, 아귀레가 쿠데타를 선동하며 한 말과, 그에 대한 절대다수의 미온적인 반응에 주목했을 때, 우리는 제국주의가 어째서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스페인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리 지지 않고 계속되어 왔는지에 대해서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불가능한 약속을 토대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약속이란 무엇인가? 당신에게 힘이 있으며, 그 힘을 사용한다면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이다. 즉, 무언가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법한 정도의 힘이 당신에게 있다는 약속이다. 대포와 화승총으로 무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이 앞에 놓인 남아메리카의 자연과 사람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이며, 증기기관으로 콩고의 상아를 마음대로 뺐어갈 수 있으리라는 약속이며, 대량생산된 상품과 핵무기로 상대방이 원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선택을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이다. 당신의 이익을 위해 자연을 멋대로 파괴할 힘이 있으며, 그것이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리라는 약속 또한 빠트릴 수 없다.
물론 그 약속은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일방적인 통제’라는 것은, ‘무언가를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무언가와 관계 맺는 한, 당신은 그 무언가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이는 당신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19를 보라. 완벽히 통제 가능한 힘이 있다고 믿었던, 그래서 마음껏 개발했다가 예상치 못한 대상의 모습과 마주한 결과를 보라.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일방적인 통제’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아귀레의 쿠데타 성공과 그 이후의, ‘절대다수는 열정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무리 없이 굴러간 아귀레 체제’라는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제국주의의 약속은, 제국주의의 유혹은 설득력이 높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소수의 신실하고 열정적인 추종자들을 만들고, 다수가 거기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을 막을 정도의 약속을 제공하기만 한다면, 제국주의는 그것이 얼마나 허황된 주장에 기반하든 간에, 아무런 무리 없이 작동할 수 있다. 즉, 그런 약속이 제공되기만 한다면, 열정적인 소수의 추종자를 만들고, 다수가 반신반의하면서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 약속이 제공되기만 한다면, 제국주의는 작동한다.
다시 영화를 보자. 아귀레는 다음과 같이 약속한다. 코르테즈가 왕이 되었다. 당신도 지배자가 될 수 있다. 모두에게 도박의 약속을, 모두에게 약탈의 약속을, 모두에게 부귀영화의 약속을 제공한 것이다. 40명만으로도 남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모두가 동의했는가? 당연히 아니다.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은 소수뿐이다. 나치의 적극적 부역자가 소수였던 것처럼. 그러나 책임자를 향한 쿠데타 시도를 방치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 했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모든 장면은 아귀레의 광기에 휘말려든 이들이 거기에 반응하는 내용이다. 거기에 탈출하려다 목이 떨어져 나가는 이들. 그냥 휩쓸린 체 진행하는 이들. 그들은 반역에 휘말린 체로, 그리고 제국주의의 망령에 휩쓸린 체로, 한 명도 빠짐없이 죽거나 다칠 때까지 표류한다. 심지어 이 ‘휩쓸림’에는 통역으로 고용된 원주민 왕족 포로마저도 포함된다. 그는 정복이 성공할 경우 자유민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백일몽에 빠진다. 물론 결말에서 그는 환자가 되어 있을 뿐이다.
이런 광기가 발생했을 때, 이들을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안정적인 체제를 보장할 줄 알았던 ‘군주정’과, ‘종교’가 이를 방조하는 것은 덤이다. 우르수아가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 생각했던 스페인 왕족이 우르수아의 처형을 막는 선에서만 생색을 낼 뿐 아귀레 체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같이 따라간 수도자 또한 “교회는 항상 강한 자의 편이라오”라는 말을 남기며 방조하는 모습을 보라. 이는 실상 군주정과, 종교 또한 같은 종류의 약속에 기반을 둔 체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환경 속에서, 그런 흐름이 잘못된 것이라는 게 자명해진 뒤에도, 연대해서 아귀레를 끌어내려는 시도는 행해지지 않으며, 권력의 재탈환이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게 가능하다는 경험도 없었고, 그것을 유도할 수 있는 체제 또한 없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환상 속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 정복자 모두는 스페인 제국에서 왔으니, 아귀레가 한 것은 단지 스페인 왕실이 하던 일을, 아귀레가 했다는 점에서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역사 속에서 스페인 제국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귀레와 같이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아귀레, 신의 분노>가 제국주의의 종말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은, 이처럼 제국주의의 약속이, 불가능한 약속이라는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발명은, 그것이 ‘가능한 약속’ 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증대시켰고, 포드주의와 대량생산은 그 환상을 확대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똑같은 논리를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당신에게 대상을 통제할 만한 힘이 있다’는 같은 약속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일방적인 관계’라는 것은, ‘내가 대상에게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대상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의심스럽다면 후쿠시마를 보라. 발전소 하나도 통제를 못하고 오염수를 생산하고 있는 인간들을 보라.
제국주의는 통제를 약속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어떠한 부작용도 없을 것이라 약속한다. 당신이 자연을 온전히 가질 수 있다고. 그 위의 모든 것들을 온전히 가질 수 있다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약속이다.
그런데 우리는 최근의 정치 상황 속에서, 그런 불가능한 약속을 제공하는- 혹은 제공하려 하는 한국의 정치인을 보게 된다. 바로 윤석열이다.
그가 극우 유튜버들의 필터버블에 갇혀 이상한 대안현실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2월 3일 그는 ‘소수에게만 수용 가능한 아주 이상한 약속’을 제공하며 계엄을 선포하였다. 그가 머릿속에 ‘아주 이상한’ 제국의 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그것을 막을 체제가 있었고, 그것을 막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 그는 다시 그들만의 제국을 약속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말이 멸망으로 치달을 것을, 제국이 선포되는 시점부터 우리가 거기에 필연적으로 휩쓸릴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항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그걸 시도라도 해야 할 것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흐름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으로 탈출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기에, 우리는 그 흐름을 멈춰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