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신분제 사이에서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와 신분제, 민주주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라는 책이 있다. ‘2021 미국 국회 점거 폭동'에 단단히 분노한 미국인 정치학자가 쓴 책인데, 흥미로운 점은 (그리고 참담한 점은), 해당 서적에서 지적하는 민주주의의 위기가 오늘날 한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민주주의의 위기란, '역사적으로' 형성된 규범과 제도들이, ('절대적인' 규범으로, 즉 바꿔서는 안 되는 규범으로 오인되며,) 민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의를 반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기까지 하고 있는 세태를 의미한다.
즉,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역사적인 환경 속에서' 생성된 규범과 제도들이 시대에 뒤떨어지며, 그러한 규범과 제도에 의해 선출된 제도권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더 분명하게 분석하기 위해 후안 린츠의 '충직한 민주주의자들'과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이란 구분을 가져온다. (여기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결국 민주주의자가 아닌 이들이 민주주의자 행세를 하는 것을 의미함으로 이 글에서는 '껍데기 민주주의자들'이라 표현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충직한 민주주의자들'과 '껍데기 민주주의자들'이란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되는 것일까?
저자는 '자신과 관련된 세력이 반민주적 행동-쿠데타 등-을 했을 때 보이는 반응'을 볼 것을 요구한다.
1, 극단주의자들- 극단적인 반민주주의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을 내쫓는가?
1930년 스웨덴 최대 보수당은 파시즘에 동조한 스웨덴 민족주의청년동맹 4만 명을 내쫓았다. 표면적으로 민주주의적인 척하는 '껍데기 민주주의자들'은 당의 분열이나 지지기반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며 이를 정치적으로 묵인한다.
2. 반민주적인 행동에 관여한 연합단체와의 모든 관계를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 끊는가?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이라면, '반민주적인 행동에 관여한 이들'이 인정할만한 존재라는 것도 부정하며, 공식 석상에서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압묵적으로 협력하지도 않는 것은 물론이다.
3. 연합했거나, 이념적으로 가까운 단체가 관여했어도 정치적 폭력과 반민주적인 활동을 공격하는가?
2023년 브라질의 보우소나루가 속한 당 대표는, 보우소나루의 지지자들이 대선 결과를 뒤엎기 위해 의사당으로 갔을 때, 지지자들의 행동을 비판했다. 충직한 민주주의자라면 그런 이들의 행동에 법적인 책임을 묻기까지 해야 한다. 반면에 '껍데기 민주주의자들'은 "위장 전술" 차원에서 폭력을 비난한다. 심각성을 축소하고, 다른 진영의 유사한 행동으로 여론의 화살을 돌리며, 목적에 동조하면서 방식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보이거나, 침묵하는 식이다.
4. 빈민주주의자를 물리치는 데 필요하다면 경쟁 정당과 손을 잡는가?
1981년 스페인에서 새로운 총리를 선출하기 위한 투표가 집개 되던 중,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의사당 건물이 장악됐을 때, 스페인 국왕은 쿠데타를 부정하고 민주주의 질서를 옹호했으며, 좌우익을 망라한 모든 정치인들은 쿠데타를 비판했다. 결국 쿠데타 지도자들은 체포됐으며, 30년형 등을 선고받았다.
저자는 위와 같은 행동 기준에 따라 반민주주의 이념에 복무하지만, 민주주의자 행세를 하는 '껍데기 민주주의자들'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애초에 왜 이런 '껍데기 민주주의자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저자는 역사를 살피며 그 기원을 찾아간다. 지주의 이해관계가 선거제도에 영향을 미쳤던 20세기 초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창궐하고,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창궐하던 시절, 극우파들에 의해 폭동이 일어났던 프랑스, 1870년대 이후 흑인들의 권리 증진으로 창설된 인민당(populist party)에 대한 집단린치가 조장됐던 미국 등을 돌아본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으로 정권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책이나 이념, 논리로 정권을 잡는 것을 포기해 버린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데 그들이 권력을 놓지도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이런 이들이 발생한다고 말이다. 민주주의 제도를 파괴하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들이 '권력을 잡을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정말로 민주정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을, 즉 신분제의 유지와 같은 사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단순한 무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요점은, 이들은 민주주의 사회에 적응하려 하는 대신, 적절한 공약과 정책의 변화 등으로 시민에게 적응하려 하는 대신, 사회를, 시민을 자신에게 맞추려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을 택하며, 체제 밖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가 등장할 경우, 그들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부역한다. 신분제를 옹호하던 프로이센의 귀족주의자들이 히틀러를 지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들이 원하는 것이 결국 '민의와는 상관없는 영구한 권력의 추구'라는 점에서 봤을 때, '정치인'이라는 직책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민의를 반영하지 않는, 즉 자신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권력추구를 원하는 이 '껍데기 민주주의자'들은, 결국 현대의 신분제 건설자들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정의 요구를 수용했지만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버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 프로이센의 귀족들이 '껍데기 민주주의자'들의 원조였다면, 지금은 특정 당원이라는 이유로, 정치에 입문했다는 이유로, 민의는 무시한 , 여성이나 장애인이나 특정 인종 등 누군가를 '국민'의 범주에서 제거하거나, 쿠데타 등의 반민주적인 행위에 동조하는 이들이 '껍데기 민주주의자'로서 신분제를 건설하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당연하게도 비판적 독해가 필요한 책이다. 투표로 선출된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어떻게 무너졌는지와, 미국의 정치인 프레드 햄튼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책이니까. 보통 한국인 독자의 직관에는 '극단주의자'라고 번역했을 단어를 '급진주의자'라고 번역한 번역 또한 의구심이 들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 대통령이 계엄법을 위반한 상태로 계엄을 선포하고, 군인을 동원한 국회점령이란 명백히 반헌법적인 쿠데타 시도를 벌였으며, 이런 내란수괴를 여당이 탄핵하지 않기를 당론으로 결정한 초유의 상황 속에서, 대통령과 여당 전체가 자신들이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아닌 '껍데기 민주주의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버린 상황 속에서, "충직한 민주주의자라면 파시즘 등 극단주의자들과 동조하지 말고, 반민주적인 행동에 관여한 연합단체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라고 주장하는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분명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내용임이 틀림없다.
특히, 대통령과 여당이 헌법에 있는 탄핵 대신 시도한 것이 헌법에도 없는, '여당에게 권력 위임'이라는 점, 분명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자신들이 본래 갖고 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이들이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