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간 그런 것들에 대한 잡담
1. 영화 속 장면 하나. 혁명은 끝장났고 폐인처럼 살아가는 디카프리오는 자신을 닮지 않아 똘똘한 딸내미를 키울 만큼 키운 다음에 TV나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다. 이때 TV에서 나오는 영화가 바로 <알제리 전투>이다. 알제리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했던 이들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한 영화. 그리고 어쩌면 무장 투쟁 노선이 예찬받을 수 있던 마지막 시대의 영화. 디카프리오는 분명 그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실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으리라.
2. 물론 한 번의 실패로 끝장나는 운동이란 없어야 하는 법이며, 패배 이후에도 삶이라는 건 계속되는 법이라서, 그 장면 이후에도 영화는 계속된다. 국가는 여전히 폭력을 행사하며, 그는 또다시 그 폭력에 맞서야 한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그가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사용하는 폭력은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가 쏜 총알은 빗나가며, 그가 알고 있던 폭탄 관련 기술 또한 사용될 길이 없다. 이제 디카프리오의 시대는 지나버렸다. 세상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할은 다음 세대에게 넘어갔으며, 아마 그들 또한 전성기의 디카프리오만큼이나 역할을 잘 수행할 것이다. 물론 운동이 성공하려면 전성기의 그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지만.
3. 그런 결말을 암울하게 장식하는 사족 몇 가지. 결말의 비상 라디오에서 등장하는 키워드는 무장혁명이 아니라 시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우리가 폭력혁명이 긍정적인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는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안다. 아사마 산장 사건이 어떤 식으로 끝났는지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이미 사회변혁수단으로서 폭력이라는 수단을 진지하게 취급하는 사람들이 '멀쩡한 현실인식이 불가능한 사람'이어야지 가능할 정도로, 폭력에 결벽증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공론장에서 폭력이 퇴출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우시위대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보라. 그들이 법원에 무슨 짓을 했는지,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한국에 귀화한 지 오래인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보라. 더 넓게 시선을 돌리자면, 홈플러스가 노동자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파리바게트와 SPC 그룹은 또 노동자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어린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보라. 폭력은 여전히 공론장에 남아있다. 다만 그 폭력은 폭력이라 호명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성격을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환경이, 누군가의 선택지는 줄어들었지만, 다른 누군가의 선택지는 여전한 상황이, 민주주의에 좋을 리가 없다.
아 혹시 이게 변혁의 제1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진지하게 고려하자는 소리로 들리시는 분은, 필자가 아사마 산장 사건 이야기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시길. 사회 변혁 수단으로써의 폭력은 이제 대중 소구력이 없다. 그리고 폭력이 보인다면 그것은 제재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폭력은 '폭력이 아닌 것으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위장된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은, 분명 제재되어야 할 폭력은, (여전히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죽어나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제재되지 않고 공론장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민주주의에 위협을 끼치는 심각한 문제이다.
특히나 독일의 사민주의 정당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스파르타쿠스단 탄압에 적극 동참하였음에도, 독일의 기업가들과 보수 정당이 나치당의 탄압을 위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나치당을 이용할 목적으로 지원하기까지 했다는 역사를 생각해 봤을 때 그렇다. 상대편에 속한 이가 "모든 폭력은 나쁘다"라고 말하며 폭력을 행사한 자신의 편과 단절한다면, 염치있는 이들이라면 자기네 편에 속한 이가 폭력을 행사한다 하더라도 자기네 편과 단절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극우라는 호칭 아래 포섭되는 모든 이들은 그 염치를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심지어 그 염치없음의 한 가운데에는 미국 의회 폭동을 선동했음에도 트럼프를 다시 자기네 대선 후보로 선정한 미 공화당이 자리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건 분명 좋은 신호가 아니다. 우리네 법원이 내란 재판을 1년째 질질 끌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런 안 좋은 신호에 속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4. 결말의 찝찝함을 기억하며, 다시 중간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 속에서 디카프리오는 다시 조직과 접촉해야 한다. 문제는 암구호를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시간과 관련된 것이긴 한데, 그것이 뭐더라. 디카프리오는 기억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것이 '조직의 사상과 관련된 핵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며 그 중요성을 암시하기까지 하는데,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시간은 무의미하다. 시간은 기계적이지 않다.' 소련이 나치와 협상하는 것을 열렬히 비판했으며, 나치를 피해 도피생활을 하다 자살했던 사회주의자, 발터 벤야민이 떠오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대혁명은 새로운 달력을 도입했다. (...) 따라서 달력들은 시간을 시계처럼 세지 않는다. 달력들은 역사 의식의 기념비들이며 (...) 7월 혁명 시절만 해도 이런 의식이 진가를 발휘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 처음 투쟁이 있던 날 밤에 파리 곳곳에서 서로 독립적으로 동시에 벽시계들을 향해 사람들이 총격을 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미카엘 뢰비는 위와 같은 벤야민의 15번 테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시계들의 시간, 공허한 시간, 기계적이고 자동적이며 양적이고 항상 자신과 똑같은, 공간으로 환원된 시간관'이 있다. 이 시간관에서 세상은 단계적이고 차분하게 발전하며,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지경까지 후퇴하지 않는다. 그러나 벤야민이 봤을 때, 역사적 시간은 결코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치를 보라. 그들이 살충제 회사에서 만들어낸 치클론 B 가스를 가지고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보라. 각종 산업 현장에서 아직도 죽어나가는 노동자들과, 의사들에게도 총을 쏘는 이스라엘을 보라.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농부들을 사채로 내몰아 경작지를 빼앗는 국민은행을 보라. 이런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발전이라면, 우리는 그 흐름을 폭파시켜버려야 한다! 즉, 우리는 이 공허한 시간을 중단시켜야 한다. 그러니 선형적인 시간관과 결별하라. 그 대신 회억의 순간들을, 즉 회상적이며 애도적인 순간들을,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이를 고치려고 했던 순간들을, '희망의 불씨'가 불탔던 순간들을 기억하라. 파리 코뮌과 스파르타쿠스의 항쟁, 한국옵티칼 고공농성을 기억하라. 세상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했으며, 그것을 고치려 했던 순간들을 기억하라. 그리고 당신 또한 그러한 모순을 고쳐야 그나마 멀쩡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떠올려보자. 이 영화가 60년대를 다룬 핀천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듀나가 말했던 것처럼 "동시대와 수상쩍을 정도로 완벽하게 조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뿐인가, 다시 듀나를 인용하자면, 영화는 분명 '중간에 1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뛰면서도 런닝타임 전체를 하나의 리듬감 속에 집어넣고 있다.' 즉, 영화는 분명 '기계적이고 공간으로 환원된 시계들의 시간'을 충실히 재현하는 대신, '혁명의 실패'라는 회억의 순간을 '인종주의 단체에 들어가기 위해 고위관료가 공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여 타인의 삶에 폭력을 가하는' 지금과 하나의 역사로 연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영화 자체가 '시계들의 시간'에 맞선 벤야민적인 역사관을 보이고 있는 영화라고 규정해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영화는 분명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분명 '시계들의 시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심지어 무장 투쟁이라는 선택지가 의미를 상실당한 상황 속에서 말이다. 하지만 인종주의와 여성혐오와, 그에 준하는 억압이 계속되는 이상, 세상에 불의가 존재하는 이상, 누군가는 싸움으로 내몰리며, 누군가는 그 싸움을 도와야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선형적인 시간관을, 시계들의 시간을 믿으며 그 구부정한 도로를 계속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차를 세워놓고 시계들의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들이 하는 짓이 '역사의 발전'에 의한 것이라 믿는 이들이, 자기들이 만들어낸 흐름에 충돌하며 자멸하는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5. 그러니까, 우리에게 시계들의 시간에서 벗어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벤야민에 따르면, 그것이야말로 혁명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비바 라 레볼루시옹.
참고
듀나, 「원 배틀 에프터 어나더」
http://www.djuna.kr/xe/index.php?mid=review&page=2&document_srl=14419344
미카엘 뢰비,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읽기』, 양창렬 역, 도서출판 난장,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