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는 삶에 대하여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감상문

by 시화


다자키 쓰쿠루는 되돌아보는 인간이다.


어느 날 문득 겪은 영문 모를 '잘라냄'의 상처로 인해 그는 삶에서의 많은 변화를 겪는다.


수개월간 죽음을 생각하고, 영혼의 땅끝까지 다녀온 그는 왜 추방당했는지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물을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일련의 과정들을 겪으며,

색채 없는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점점 더 희미한 무색의 세계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반추하는 인간이다.

*반추 : 지나간 일이나 상처받은 감정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분석하는 반복적인 사고 양식



과거의 내가 어떤 이유로 그런 일을 겪었는지 궁금해하고, 납득할 이유를 찾는다.

인간이 되돌아보는 행위를 통해 얻는 것은 두 가지다.

과거에 갇히거나, 미래로 나아가거나.





1.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정체성의 결핍이 어떻게 한 사람의 생을 지배할 수 있는가' 였다.


쓰쿠루의 친구들의 이름에는 모두 색이 들어간다.

아카는 빨강, 아오는 파랑, 시로는 흰색, 구로는 검정.


반면 쓰쿠루라는 이름에는 어떤 색도 담기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색이 없이 태어난 게 게 아니라, 그는 자신이 색이 없다고 믿어버린 사람으로서

무색무취의 스스로에게 깊은 무력감과 혐오감을 느낀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쓰쿠루는 자신을 향해 말했다. 애당초 텅 비었던 것이 다시 텅 빌 따름이 아닌가. 누구에게 불평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와 그가 얼마나 텅 빈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다 확인한 다음에는 어딘가로 가 버린다. 그 다음에는 텅 빈, 또는 더욱 더 텅 비어버린 다자키 쓰쿠루가 다시금 혼자 남는다. 그뿐이지 않은가. "_p. 290



그러나, 쓰쿠루의 이름은 '짓다, 만들다'는 의미를 가진다.

쓰쿠루의 아버지는 이름을 지으며, 만들다의 뜻을 가진 作(지을 작)과 創(이룰 창) 중 고민하지만,

이름으로 인한 무게를 짊어지는 것이 걱정되어, 보다 온건한 作을 선택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색채를 이룬 친구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색채를 직접 지어간다는 면에서 쓰쿠루의 作는 의미를 찾는다.

그는 색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색을 쌓아가는 사람이다.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자기 존재의 회복 아닐까.






2.

나는 쓰쿠루의 결핍이 굴곡 없는 삶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결핍이 없는 것이 결핍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핍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매끄럽고 탄탄대로인 쓰쿠루 같은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지만,

쓰쿠루는 굴곡의 부재로 인해 스스로를 공허하고 개성없는 사람이라 여긴다.



쓰쿠루는 굴곡에서 비롯된 색채를 동경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결핍이 없는 쓰쿠루를 동경한다.



"물론 다자키 쓰쿠루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부족함 없이 누리며 살았다.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해 괴로워한 경험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말로 원하는 것을 고생해서 손에 넣은 기쁨을 맛본 적도 기억하는 한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난 네 친구들이 아마도 지금까지 그가 손에 넣은 가장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는 하늘의 은총처럼 자연스럽게 다가온 것이다. 게다가 이미 먼 옛날에, 역시 그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또는 빼앗겼다." _p.279






3.

반추하는 것은 쓰쿠루에게 순례의 과정이라 칭해진다.

순례(pilgrim)는 성스러운 장소로의 여행이며, 이는 개인적인 변화로 이어질 수 있고,

그 후 순례자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마음껏 되돌아보지만, 되돌아본 이후에 다시 나아가는 것.

나의 자리로 돌아와 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반추하는 행위를 통해 과거에 갇히곤 한다.

뒤늦은 고민 속 커져가는 의문과 생각의 꼬리표는 따라다니며 스스로를 만약의 늪으로 인도한다.



누군가를 상실한다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피할 수 없는 위화감이 생겨나고, 미묘한 균열은 가속화되고, 우리를 잃게 되어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그곳에 갇히게 된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완벽한 조합이었어. 다섯 개의 손가락처럼. 지금도 자주 그런 생각을 해. 우리 다섯은 각자가 부족한 부분을 서로 자연스럽게 보충해 줬어. 각자 뛰어난 부분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아낌없이 나눠주려 했던 거야. 그런 일은 아마도 우리 인생에서 다시 일어나지 않을거야. 단 한 번만 누릴 수 있는 행운. 그런 느낌이 들어. 내게는 지금 가족이 있어. 그리고 가족을 사랑해. 당연히.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가족에 대해서도 그때처럼 불순물 하나 없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기분은 느끼기 힘들어." _p.203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하늘이 허락한 은총 같은 일이다.

그리고 상실한다는 것은,

그가 내 안에서 집을 짓고 생활하다,

그 모든 지어진 것들과 함께 죽음을 의미한다.



쓰쿠루의 첫번째 상실에서 그는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방식을 선택한다.

자신의 탓에 대해 반추하지만 의미있는 이유는 찾지 못한 채 과거에 갇혀 긴 세월을 보낸다.


사고의 초점이 '왜(why)에만 머물러, 당장 답을 낼 수 없는 원론적 질문에 매달려 문제의 원인을 추상적으로 분석하느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How)'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을 놓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16년이 더 지난 후 쓰쿠루는 또다시 다가온 상실의 위기에서,

사라를 잃지 않기 위해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노력을 보인다.


모든 이유를 뒤로 한 채,

그는 나아가기를 선택했다.






4.

왜 철도역인가?


쓰쿠루는 어릴 적부터 철도역에 관심을 가진다.

어린 날의 관심사는 직업으로까지 이어져, 그는 철도역을 새로 만들고, 개보수하는 일을 한다.

사실상 새로 만드는 일은 별로 없으니, 보수하는 것이 주된 업무이다.



선로는 직선형이다. 위에서 봤을 때는 구불거릴지 몰라도, 사용자가 느끼는 한 직렬이다.

과거, 현재, 미래 역시 정확한 한 선 위에 놓이고,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열차는 조직적이다. 어느 역에서는 사람들을 태우고, 어떤 역에서는 내려준다.

먼저 내리고 다음 사람이 탄다는 것에서도 철도역은 쓰쿠루의 삶과 닮아 있다.

열차에는 자리가 한정되어 있다. 모두가 다 탈 수는 없는 것이다.



쓰쿠루의 열차에는 네 명의 친구들이 함께하던 때가 있었고,

인생의 어느 역에서 그들은 내리기를 선택했다.

상실을 겪은 쓰쿠루는 마음 속 상처를 열차와 역을 보수하는 일로 치유하려 노력했고,

비워냄의 과정을 통해 또 다른 누군가를 초청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를 반갑게 맞아줄 수 있기 위한 역이 되기 위해 쓰쿠루는 순례의 길을 걷는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한 역을 만든다는 것이다. 설령 그 역이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겪어야만 한다. 그리고 나아가야 한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딘가에서 물처럼 소리도 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형태가 없는 투명한 슬픔이었다. 자신의 슬픔이면서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슬픔이었다. 가슴이 헤집은 듯 아프고 숨이 막혔다... 몸의 중심 가까이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1년 내내 녹지 않는 동토의 중심부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것이 가슴의 통증과 숨막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기 안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태 그는 몰랐다.

그렇지만 그것은 올바른 가슴 아픔이며 올바른 숨 막힘이었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 차가운 중심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녹여내야 한다.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동토를 녹이기 위해서 쓰쿠루는 다른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_p.388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