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감상평
쇼는 연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와중,
아버지로부터 죽은 고모 마츠코의 유골함을 받으며 그녀의 집을 정리해주기로 한다.
그녀의 집에서 죽음에 대해 발굴해가던 중, 그는 마츠코의 일생을 돌아보게 된다.
마츠코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녀가 이성이 주는 사랑에 집착하는 이유의 근원은, 아버지로부터의 사랑의 부재에서 비롯된다.
부녀관계로부터 비롯된 사랑의 부재
부모-자녀의 관계 중, 가장 무결한 사랑의 형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부모와 자녀의 성이 다를 때라고 한다.
이같은 공식이 진실이 되는 이유는, 부모와 자녀의 성이 동일할 때 부모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에 자녀의 인생을 대입해 비교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성으로, 또는 남성으로 이 세상에 나고 자라 부여받은 규범과 사회적 역할이 비슷할 수밖에 없기에, 자신을 기준으로 동성인 자녀의 인생을 판단하고 간섭하게 된다.
그러나 자녀의 성이 자신의 것과 다른 경우,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루트이기에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받아들여지고, 정해진 기준 없이 자녀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모자관계나 부녀관계에서 서로는 무결한 사랑을 느끼며, 자녀에게는 이성의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이 이성으로부터의 사랑을 느끼는 첫 경험이 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이 부족하거나 거절당했다고 느끼는 경험은 인생 전반의 애착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남성의 경우 독립적인 성향으로 인해 과거의 경험과 자신을 구별해 스스로 정체성을 세워가는 개별화가 잘 되는 반면 여성은 개인보다 집단으로 생활하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는 관계 중심적 성향을 갖기에 개별화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보통의 주양육자가 여성임과 관련이 있다. 여성은 주양육자인 엄마와 성이 같아 엄마와의 차이를 느끼기 어려워 개별화가 늦게 진행되지만, 남성은 주양육자와 성이 달라 자신을 타인과 분리된 존재로 보는 인식이 강하기에 개별화가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여자 아이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주요시하고, 상대가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주는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남자 아이들은 자기와의 관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사랑에 관한 정체성보다 자신은 누구인지에 관한 자아 정체성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상처에 대응하는 방법 역시 다른데, 소년은 분노를 겉으로 표출하기보다 안으로 내면화하거나 여러 형태의 방어벽을 쌓는다. 상처를 받으면 냉담한 듯 무관심의 벽을 둘러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는 이같은 독립적인 태도 탓에 거부당했다는 두려움을 받는다. 한편 소녀는 위축된 거짓 자아를 만든다.
이는 자신의 약점과 불안정성을 반영한 나쁜 자아이기에 위축된 자아이고, 자신이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에게 순종하고 따라야만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 수동적인 자아이다.
위축된 거짓 자아는 사랑받는다는 '증거'를 먹이로 삼는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거부하는 행동을 보일 때 이를 부인하는 것으로 교묘히 합리화한다.
마츠코의 상황도 이와 같다.
어린 시절, 몸이 약한 여동생 쿠미에게만 관심이 쏠려 온전히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녀는 질투와 부러움을 느끼지만 장녀라는 부담감과 책임감 속에 군말않고 부모가 바라는 대로 착실히 살아간다.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생각에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아버지를 웃기는 습관을 갖게 되고, 그 습관은 변질되어 당황하거나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갑자기 튀어나와 마츠코를 곤란하게 만들곤 한다.
마츠코의 사랑받고자 했던 어린시절의 결핍은 그녀가 성인이 되고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해서도 그녀를 파괴적인 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츠코의 첫번째 남자, 야메가와는 자신을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 여기는 작가 지망생이다.
예술가적 성향이 짙었던 그는, 문인활동에서 비롯된 가난함과 창작의 스트레스를 마츠코를 함부로 대하는 것으로 풀곤 했다. 마츠코가 그에게 얻어맞은 얼굴로 동생에게 돈을 빌려온 날, 그는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를 이기지 못한 채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자신의 비겁함을 직면하지 못하고 소중한 이를 인질로 삼은 자살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그는 다자이 오사무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다.
마츠코의 두번째 남자는 오카노로 그는 야메가와의 문학도 라이벌이다.
그는 기혼자로, 아내가 있지만 야메가와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할 수단으로서 그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
부적절한 관계임을 알면서도, 그가 주는 애정과 관심이 좋았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관계를 이어가지만 결국 부인에게 발각된다. 역시나 비겁한 변명과 마츠코를 상처입히는 말들을 내놓는 그에게 왜냐고 묻지만,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질 뿐 답은 돌아오지 않은 채 그녀의 두번째 사랑도 마침표를 찍는다.
마츠코는 일련의 사건을 겪은 뒤 그동안 포기하지 않던 순수한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그녀는 바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며 최고의 매출을 올리지만, 짧은 인기도 잠시 치고 올라오는 새파랗게 어린 여자들에게 밀려난 채 세번째 남자인 기둥서방 오노데라와 가게를 떠나 동거하기 시작한다. 그는 마츠코가 번 돈을 모두 날리고는 자신이 돈을 돌려줄 이유가 없다며 뻔뻔하게 굴고, 분노한 마츠코는 그를 살해한다.
살해 후 도피하던 그녀는 첫 남자인 야메가와를 따라 자살하려 하지만, 얕은 물에 가로막히고 만다.
죽음조차 그녀를 도와주지 않던 순간 그녀는 시마즈라는 남자를 만난다. 시마즈는 여태껏 그녀가 만나온 남자들과는 다르게 외모도, 성격도 특별할 게 없는 남자였다. 그는 미용사로 마츠코는 그의 일을 도와 잡혀가기 전까지 한 달가량 동거했다. 8년을 복역한 그녀는 출소 후 그를 다시 찾지만, 그는 이미 다른 여자와 가정을 이룬 후였다. 마츠코는 한 달가량 찬란한 꽃을 만개하고, 이내 지는 벚꽃에 둘러싸여 지난날 함께 벚꽃을 피웠던 그의 가게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선다.
시마즈와 함께하기 위해 교도소에서 미용을 배웠던 그녀는 출소 후 미용실에 취직한다.
일하던 중, 함께 복역하던 메구미와 재회하게 되고 둘은 절친이 된다. 이 시기 마츠코는 그녀의 마지막 남자, 류를 만난다. 류는 그녀의 인생을 비탈길로 보낸 장본인으로, 20대 초반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녀의 제자였다. 수학여행에서 돈을 훔치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 마츠코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이 훔쳤다 거짓말한다.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된 변명은 눈덩이처럼 굴러가 그녀를 비탈길로 몰고 가고, 결국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도 나오게 되며 고생길을 걷게 된다.
어느 날 그녀 앞에 야쿠자가 된 류가 찾아오게 되고, 사실은 그때 선생님을 좋아해서 그랬다며 고백한다. 마츠코는 그를 돌려보내지만, 혼자 남겨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그녀는 '혼자 있는 것도 지옥이고, 함께 있는 것도 지옥이라면, 함께 있는 지옥을 택하겠다'며 그를 다시 자기의 세계로 들인다.
사랑을 주는 방법도, 사랑을 받는 방법도 몰랐던 류는 마츠코를 상처입히게 되고 메구미는 그녀를 말린다. 자신을 상처입히는 사랑은 그만두고, 자신과 함께 가자고. 그러나 마츠코는 거절한다.
AV배우에 전과자였던 메구미의 삶은 그녀와 엇비슷하게 불행했으나, 메구미에게는 돌아갈 집과 남편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격지심과 불행으로 점철된 그녀의 삶은 그렇게 또다시 진창으로 간다.
나는 마츠코의 일생을 보며 때로는 존경심이 들었다.
어떻게 찢겨진 마음으로 매번 새로운 사랑을 하는가! 지칠 법도 한데, 한도 없는 그녀의 사랑은 니체의 '위버맨쉬'를 떠오르게 했다. 이렇게 힘든 것이 인생인가?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이라 외치는 그녀는 마치 초인 같았다. 니체가 말한 위버맨쉬의 핵심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생의 힘이다. 마츠코는 계속해서 부서지고 조각났지만,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믿었다. 물론 그 사랑이 합리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환상은 강박적인 사랑을 낳았다. 그녀는 순수한 마음을 주었지만, 사랑에 착취당한다.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가장 값진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마츠코는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한 여성으로 사랑받고 싶었고, 돌아올 집이 되기를 바랐다.
태어나서 죄송한 인생은 없다. 쇼의 여자친구는 이별을 고한 후, 인생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받았는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는지로 정해지는 것이라 한다.
적어도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그녀의 사랑을 받은 이들의 삶 속 불멸의 흔적을 남긴 그녀의 삶은 혐오스럽지 않다. 류가 그녀를 자신의 신이라고 말했듯 어떤 의미에서는 위대하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다. 타인이 주는 사랑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 마츠코는 스스로 일어서지 못한다. 늘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다 배신당한다. 또 다시 반복될 상처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경계의 두 귀를 바짝 세우지도 않은 채 매번 순순히 믿어버리고,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나는 그녀의 인생을 보며 어딘가에서 본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떤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A라는 남자를 만날 때는 계란후라이를, B라는 남자를 만날 때는 반숙의 삶은 계란을, C를 만날 때는 스크램블 에그를 먹었다. 늘 같았다. 자신의 취향과는 관계없이, 만나는 사람이 좋아하는 계란 요리를 먹었다. A,B,C 모두와 헤어지고 혼자가 된 그녀에게 누군가 어떤 계란 요리를 좋아하는지 물었다. 곰곰히 고민하던 그녀는 그제서야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누구를 만나든 상관없이 자신의 취향을 따르게 되었다.
한편 그녀에게는 그녀를 자신만큼 사랑해주는 이가 둘이나 있었다. 그녀의 동생 쿠미는 언니인 마츠코가 집을 나간 이후로부터 늘 그녀를 그리워하고, 잠시 집을 들렀을 때 그녀를 반가워하며 붙잡는다. 마츠코는 쿠미를 매몰차게 내팽개치지만, 쿠미는 죽기 직전까지 언니를 그리워한다.
메구미는 마츠코와 짧은 연을 가지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며 보호하려 한다. 그러나 마츠코는 본인의 자격지심으로 모든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다.
만약 마츠코가 그들의 사랑도 소중히 여겼다면 어땠을까? 몸이 약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쿠미와 막장 인생이지만 돌아갈 집과 남편이 있었던 메구미. 그들의 삶은 얼핏 보면 마츠코와 비슷한 불행의 궤도를 그리지만 자신을 사랑해주는 변치 않는 존재가 있었기에 마츠코는 그들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사랑해줄 단 한 사람을 찾아 평생을 헤메이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장 연약하고 불온한 부분까지 내보여도 그것마저 안아줄 사람.
스스로 공급받는 사랑은 남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 때 움츠러들고, 굳건히 쌓아올린 성벽도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렇게도 인간은 나약하고, 평생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대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마츠코가 어린 시절 생겨난 결핍의 굴레를 끊고 스스로를 안아주었으면 어땠을까?
받지 못한 것에 위축되고, 파괴적인 사랑에 자신을 제물로 내어주는 것 대신
자신의 가장 큰 달란트인 아름답고 값진 무한의 사랑을 스스로에게도 베풀었다면 그녀의 삶이 조금은 더 따듯했을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이 세상에서 마츠코는 매 계절마다 크고 환한 꽃을 피웠다.
그녀는 죽음 이후 아버지와 쿠미를 만나 마침내 따듯한 계절을 만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