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by 시화

사계절을 다닌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주말을 지나 새 직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쩌면 끝과 시작은 한 선 위에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사물함 켜켜이 쌓여 있던 짐을 양손에 들고

다시 오지 않을 횡단보도 앞에 서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저기 건너편에서는

겨울 특유의 노란빛과 보랏빛을 섞은 듯한

노을이 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다들 바삐 움직이며 일상에 쫓기는 듯했다.


올해 나와 가장 가까이 닿아있던 단어는 상실이었다.

나는 늘 끝난 것들 곁에 오래 체류하는 사람이었다.

내 안에서 완전한 매듭이 지어지기 전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내 나름의 성실함이라 믿으며.




언젠가 홋카이도에 청의 호수를 보러간 적이 있다.

하늘의 청량한 빛을 호수로 옮겨놓은 듯한 색감과

소다 위 크림처럼 떠 있는 구름이 거울처럼 반사되는

아름다운 호수


그곳을 처음 본 건 여행이 아닌

컴퓨터의 기본 바탕화면 사진을 통해서였다.

사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십대 초 무렵,

아름다움은 단 한 번의 우연으로만 포착되는 것이라 믿었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오래 바라보게 되는 대부분의 장면은

빛이 기울어지는 시간,

서 있는 위치까지 계산된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산 없이 우연히 마주치는 풍경, 찰나의 빛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우연으로 맞닥뜨려지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사진 한 장처럼

나는 늘 단 한 번의 우연을 쫓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치만 단 한 번의 순간은

준비된 자들에게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

그래야만 그 찰나의 순간을 후회 없이

멋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오래 끝을 음미하는 사람

새로운 세상으로 몸을 내던지는 사람

그 둘 중 나는 음미하는 쪽에 가까웠다


애도하지 않은 감정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말을

종교처럼 여겼던 나는

한 번의 상실을 겪게 되면

오래 머물며 쉽게 떠나지 못했다.

그 순간에 충분히 머물러야,

나중의 내가 덜 다칠 것이라 믿어왔기 때문에


그러나 시작은 끝과 함께 반드시 찾아온다.

연인과 헤어지고 다음 인연이 찾아오는

그런 같은 형태의 시작이 아니더라도

헤어짐 이후에는 홀로서는 삶의 기쁨을 배우고

콘서트의 막이 내리면 일상이 시작되고

태양이 지구를 비추는 각도가 달라지면

겨울이 와 4시에 보랏빛 노을을 보게 되는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같은 풍경 위 달라진 각도의 빛을 만나게 된다.


나는 늘 우연을 믿는 사람이었다.

끝과 시작은 점이며

인생의 긴 선 속

끝과 시작은 하나의 발광하는 별처럼 빛나고,

점과 점을 잇는 선은

새로운 시작을 만나기 전까지의 기다림에 불과했다


이제는 안다

그 자리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빛은 조금씩 각도를 바꾸고 있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다음 장면에 와 있었다는 걸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