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에 걸린 그 해에,
나를 비롯하여 주변에 암 진단을 받은 사람이 무척 많았다. 어쩌면 이미 이전부터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관심이 없었으니 외면했었는지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암'이 순식간에 내 삶을 점령하였으니 내 관심은 온통 '암'일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내 눈에는 암환자만 보이고 내 귀는 암에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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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 연하와 결혼한 친구가 있다. 그러니까 내 친구는 39세이고 친구 남편은 30세였다. 독신을 외쳤던 친구의 결혼 소식이 무척 반가웠지만, 나이차를 듣고 순간 멈칫하긴 했다. 더욱이 결혼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도 않은, 그저 잘생긴 청년이었고 오로지 자신을 끔찍이 예뻐해 주는 그 사랑 하나만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시댁에서는 9살이나 많은 며느리를 탐탁지 않아 했고, 급기야 형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결혼 자금을 단 1원도 보태주지 않았다. 감정은 찰나이고 현실만이 오래도록 남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였으니 오지랖 넓은 나답게 걱정이 앞섰지만, 나와는 달리 지혜로운 친구이므로 그 사랑을 잘 지켜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인생은 연거푸 놓이는 갈림길의 반복이다.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어느 길이든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한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겠으니 그저 후회 없을 선택을 하기를...
친구의 시아버지는 그때 당시 57세였고, 가장의 의무를 다하며 그간 착실히 일만 하신 분이라 했다. 아들의 결혼식을 몇 달 남겨두고 어느 날 갑자기 피를 토하는 고통에 병원을 찾았는데 간암 4기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간의 절반 이상이 이미 암세포로 뒤덮여 도저히 수술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서울의 병원 여러 곳을 다니며 재검사를 하였으나 모두 비슷한 의견이었다.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먹는 항암약으로 치료를 시작하였으나 생어금니가 빠지고 심한 구토 등의 고통에 힘들어하며 상태는 나날이 나빠져만 갔다. 아들의 결혼식에 간신히 휠체어를 타고 참석을 하셨으나 결국 얼마 후 돌아가셨다. 이 모든 일이 불과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문병을 갔던 병실에서 시아버지와 내 친구는 어쩌다 잠깐 둘이 있게 되었는데, 죽고 싶지 않노라, 살고 싶다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그날의 기억을 전하는 친구의 애잔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 분이지만 그 모습이 보이는 듯하여 마음이 답답하고 먹먹해져 왔다. 그분의 삶이 너무나도 허망스러워 한탄스럽기까지 했다. 인생이 참 잔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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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지인의 사촌동생은 나보다도 어렸는데 결혼도 해서 자식 둘을 낳고 금슬 좋게 살고 있는 평범한 주부였다. 허리 통증이 잦았지만 육아 때문일 거라 생각하며 좀 쉬면 괜찮아지겠거니 넘겼고 그러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을 정도의 끈질긴 고통이 찾아오고 나서야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척추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하고 항암을 하고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암'을 이겨내려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국 그녀는 귀천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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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그들의 사망 소식은 가히 충격이었고 죽음이 당장 나를 덮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만큼 '암'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끔찍한 존재였다. '암'이 내 삶과 죽음에 대한 통제권을 모두 쥐고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나는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점점 무력해져만 갔다. 어째서 나일까. 왜 하필 암일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벌을 주는 걸까. 답도 없는 이런 생각 따위에 갇혀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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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1층에 편의점이 있었으므로 음료나 커피 등을 사려 지나갈 때마다 나는 다른 병실의 몇몇 환자들을 보게 되었는데 매일 그 자리에 있던 환자가 어느 날에는 보이지 않았다. 침대도 깨끗이 정리가 되어 있길래 환자분이 병실을 옮겼나, 하고 생각했다. 볼 때마다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퇴원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긴 하나 문득 궁금했고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하는 탄식을 듣고 안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다른 병실의 어느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하시니 그저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하는 일뿐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점심을 드시고 낮잠에 빠지셨으리라. 노곤함에 코까지 골며 꽤나 깊이 잠에 빠지셨다. 그런데 갑자기 "아직 가고 싶지 않아요. 나 데려가지 말아요."를 중얼중얼 내뱉는 것을 간병인이 듣고는 다급하게 할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다행히 할머니는 눈을 뜨셨고 그 이후로도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몇 번의 고비를 더 넘기셨다.
삶과 죽음이 수없이 교차되는 곳, 이곳 병원에서 나는 굳이 누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죽음과 익숙해져가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내게도 죽음이 턱끝까지 찾아온 느낌이었다.
수술 전 날, 주치의가 대략적인 수술 과정을 안내하며 각종 동의서 서류에 사인을 받으러 왔다. 왼쪽 가슴을 절제한 후 재건수술을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는데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가슴이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으나 막상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서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주치의는 겨드랑이까지 전이가 되어 암세포가 넓게 퍼져있으니 웬만하면 전절제를 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내 나이가 젊으니 보형물을 삽입하고 인공유두를 만드는 재건수술을 권유했다. 요즘에는 의료 기술이 좋아져 보형물을 삽입하더라도 모유수유 또한 가능하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미 출산을 했고 다시 아이를 낳을 생각도 없었으니 더 이상 모유수유 등으로 인한 가슴으로써의 역할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차피 성격이 엄청 여성스러운 편도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보형물을 넣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내 마음은 머리로 내린 그 결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해서 머뭇거렸다. 우유부단해 보이는 나를 기다리던 주치의는 이러다 밤을 셀 것 같았는지 8시까지로 시간을 정해주고 자리를 떠났다.
나와 같이 입원해 있던 분은 나이가 40대 후반이었는데 그녀는 오른쪽 가슴을 전체 절제하고 보형물을 삽입하기로 했다. 그녀는 아직 긴 노란 머리였는데 초록색 또는 검은색 비니를 즐겨 썼고 초록색의 기다란 카디건을 걸쳐 입으며 환자답지 않은 패션 감각을 뽐내었다. 모 아웃렛 매장의 옷가게 사장님이었는데 가슴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워낙 볼륨감 있는 몸매였기 때문에 그녀에게 그 선택은 당연했으리라.
이미 수술을 하고 피주머니를 달고 다니던 또 다른 분도 전절제 후 보형물 삽입을 했다. 워낙에 가슴이 빈약했기 때문에 가장 작은 사이즈의 보형물을 넣더라도 다른 쪽 가슴과 비율이 맞지 않을 터였다. 하여 그녀는 유방 절제 수술 후 양쪽 가슴에 모두 보형물 삽입을 했고 50대 중반에 난생처음으로 봉긋한 가슴을 가지게 되어 평생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며 기뻐했다.
보형물 삽입을 한 환자가 훨씬 많게 느껴졌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나도 이참에 봉긋한 가슴까지 만들어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고민한 시간이 무색할 만큼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놓치고 있었다. 나는 실손보험 하나를 믿고 치료를 시작했으며 1세대 보험으로써 한도가 3천만 원이었다. 1년이 지나면 180일이라는 면책기간이 있기 때문에 나는 1년 이내에 3천만 원이 넘지 않게 모든 치료를 마쳐야 했다. 전절제 후 동시에 재건수술을 하는데 이때 암세포를 절제하는 수술은 유방외과 담당의가, 가슴 재건수술은 성형외과 담당의가 진행하게 된다. 수술비가 대략 얼마 정도 나오는지 물었더니 인공진피 재료비가 비싼 편이고 환자마다 수술 방법이 다를 것이기에 대략적인 안내도 불가하다고 했다. 나는 이상한 아집이 있기 때문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성형외과 의사한테, 더욱이 얼마가 나올지도 모르는 병원비를 뒤로한 채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재건수술은 하지 않겠노라고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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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당일, 일찍이부터 소변줄을 꽂았다. 침대에 누워 나를 수술실까지 이동시켜 줄 간호사를 기다리는데 그간 내가 살아온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장면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져 스쳐 지나갔다. 분명 완전히 잊고 지냈던 기억이었는데 불현듯이 떠올라졌다. 내 아이와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이 떠올라졌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37주 5일째, 전치태반이라 제왕절개를 하였고 3일 만에 만난 아이를 나는 어설프게 받아 안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모유수유를 하였는데 오물거리던 아이의 입술과 반짝거리던 그 까만 눈동자를 나는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돌이켜 보니, 그때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다시 눈을 뜰 수없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뜨게 된다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막연한 다짐도 들었다. 39년간의 인생,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을 만났으나 나는 매번 잘 극복해 냈었고 이번에도 역시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 나는 늘 혼자였고 그래서 혼자라는 것에 당연해져 있었음에도 수술대 위에 누워 오롯이 혼자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내가 미치게 외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렵지 않은 수술이라고는 하나, 만에 하나라도 내가 눈을 뜨지 못하게 된다면... 제왕절개를 하였었으니 전신마취와 수술의 경험이 있긴 하나, 그때는 아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또한 20대 중반이라는 젊은 혈기에 두렵다기보다는 호기심마저 들던 때였다. 혹시라도 아이를 낳다가 상황이 잘못되더라도 기꺼이 아이를 위해 나를 희생할 호기도 있던 때였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철도 없던 때였다. 지금도 여전히 철이 없기는 하나 그때보다는 좀 더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므로 나는 죽음이 두려웠고 무서웠다.
살고 싶어...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한 삶 속에서 내 인생의 나침반이던, 엎어지고 무너지고 좌절하고 실패해도 다시 중심을 잡고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었던, 내 삶의 유일한 빛이던 아들이 간절히 보고 싶어졌다.
아이를 낳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괜찮은 사람과 결혼을 하여 행복한 일상을 보냈을 수도 있다. 미혼모,라는 올가미를 벗고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상상의 종착지는 늘 아이였다. 다른 선택을 한다면 아이를 만나지 못하게 되므로 나는 반드시 똑같은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아이 친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참 좋았겠지만, 나는 아이를 낳기 위해 기꺼이 다시 또 아이 친부와 인연을 맺을 것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할까 봐 지레 겁이 났던 적이 있는가. 나는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세상이 두렵게 느껴졌었다. 아이가 커가면서 느끼게 되는 그 모든 시간과 감정들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그러한 모든 것들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할까 봐 겁이 나고 또 너무 두려웠었다. 죽을 만큼 힘이 든 순간도 참 많았으나 죽을 만큼 행복한 순간이 훨씬 더 많았음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으며 고생 참 많이 했다고 생각했지만 바꿔 생각해 보니 돈 주고도 살 수 없을 소중한 인생 경험이었다. 아이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해서 나를 성장시켰으므로 아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을 거였다. 나는 아이로부터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받았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다.
나는 아이한테 좋은 엄마였을까?
아이가 나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안정감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어른이었을까?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위태롭게 흔들리던 촛불 같은 존재였으리라.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에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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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에 도착해서부터는 기억이 거의 없다. 인턴으로 보이는 갓 20대 초반 정도의 학생들이 한 10명쯤 있었던 것 같다. 나의 긴장을 풀어주려 함인지 자연스럽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수술 준비를 했고 나는 침대에 멀뚱히 누워 담당의를 기다렸다. 차갑다 못해 냉기가 도는 수술실에서 나의 긴장감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이내 두려움이 내 온몸을 휘감았다.
주사를 잘 참는 편이었는데 마취 주사가 내 팔을 찌를 때 무척이나 아팠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마취제가 천천히 내 핏줄을 타고 들어오는데 순식간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뜨거워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혈관에 열이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깊은 잠에 빠져야 하겠으나 왠지 정신을 잃고 싶지 않아 청개구리 심보로 숫자를 셌다. 드라마에서 많이들 숫자를 세길래 나도 몇까지를 세고 정신을 잃나 확인해보고 싶음이기도 했다. 양을 셀까 하다가 숫자로 생각을 바꾸었고 하나, 둘, 셋, 넷까지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세상이 온통 하얘지는 듯했고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