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는 기술을 바탕으로 한 자유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지공간은 물리적 공간으로 동일한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는 놀라운 발상을 배경으로 한다. 특정 위치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같은 인식을 지니다니! 물론 200년 전에 쓰였다면 말이다 - '인류'가 인지공간에 들어가기 전부터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만 기가 막히게 활자를 기억할 만한 기억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적어도 5000년 전엔 쓰였어야 한다. 인지공간의 예시는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시점부터 인류와 함께 했으며 지금은 하드디스크의 플래터와 헤드가 정확히 같은 원리로 동작하고 있다. 또한, 장기기억을 잃어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저장장치를 유일한 지식으로 이해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오독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유아적인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칭하는 음운의 차이는 있어도 의미가 맥락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거리감을 고정시킬 수 있다는 나이브한 상상으로 나이브한 교훈을 알려주는 작위적인 이야기다. 이런 초등적인 발상으로 도입하는, 원하는 결말을 초래하기 위한 기술로는 어떤 새로운 지평도 열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이야기를 답습할 뿐이다. 진정 SF를 죽이는 것은 이런 글들이다. 미래에 대한 어떤 비관과 낙관도 제시하지 못한 채 무기력만을 설파한다. 기술은 역사 속 개개인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고, 그들은 스스로 욕망을 구원했다. 현실의 사회적 약자를 SF 속에서도 사회적 약자로 가정하는 것은 기술의 힘을 묵과하는 것이고 때로는 광인, 마녀라는 오명 속에 죽음을 맞이하면서까지도 삶에 적극적이었던 모든 개인을 모욕하는 일이다.
작품 내 인물들의 지능은 최대한으로 무시된다. 개개인은 시키는 것을 그대로 따를 만큼 바보가 아니다. 같은 언어로도 자기의 욕구에 따라 자의적인 해석을 해내는 것이 현인류인데 <인지공간> 속 인류는 장기 기억뿐 아니라 타자와 자기를 구분하는 능력조차 잃은 채 등장한다 - 그럼에도 따돌림을 할 만큼의 구분 짓기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의도적으로 평균적 지능을 낮추면서 - 그로 인해 생기는 새로운 제재에 대해선 이해하지 못하며 - 자신이 원하는 일차원적인 교훈을 강요하는 작가를 난 지지할 수가 없다. 가장 폭력적인 언어로 이브를 정의한 시점에서 더더욱. 그녀는 어떤 부분에 불가함이 있는 것이 아닌 그저 장애라 정의된다. '몸이 너무 약해서 정글짐 같은 인지공간을 오갈 수 없다'는 이브란 존재를 사회에서, 그리고 작가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차라리 팔다리가 하나 없거나, 하반신 마비이거나, 온몸에 근육이 녹아버렸다는 등의 구체적인 서술이 그녀에겐 절실하다. 애매모호함으로 불가함을 선고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장애를 다룰 때 가장 피해야 할 폭력적인 시선이고 실상 파헤쳐보면 극복할 여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만든다. 세계관 속의 어떤 인간도 팔다리, 혹은 목 아래로 무엇하나 움직일 수 없는 전신 마비도 아닌 이브가 - 이브마저도 - 그깟 구조물 따위를 오갈 수 있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들의 지능은 필히 과소평가된 것이다. 심지어, 이브는 바깥 세계를 배회하다 들짐승의 습격으로 죽는다. 가장 사회에서 약한 존재로 정의된 그녀마저도 돌아다닐 수 있는 바깥의 땅을 두고 공동의 지식 저장장치가 있단 이유만으로 모두가 욕망이 묵살된 채 부대껴 살아갈 것이라 상상하다니. 작가 개인의 몰이해로 감동적인 결말을 이끌어내는 것은 박수받을 일이 아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선 신랄한 비평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선 얼마나 많은 종이와 잉크, 그리고 무엇보다 비싼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지.
과학은 의심과 욕망의 학문이다. 비판 의식과 현재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태도. 이 중 하나라도 잃은 SF(Science fiction)는 그저 공상일 뿐 땅아래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새로운 분야의 지평을 여는, 마땅히 선지자 역할을 맡아야 할 제약 없는 탐사병이 이렇게 되었다니. 지성의 탈을 쓰고 몰이해로 이끄는 '과학'은 분별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픽션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작가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 수작을 부리는 직업이 아닌 불을 놓는 직업이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자신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비추어줄 빛 아래에서 이야기하여야 한다. 짧으면 한 시간에서 길면 평생까지 자신의 허구에 속아주기로 결심한 독자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