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1 개성과 정체성 - 위대한 유산을 읽고
한 집단이 유년기의 아이를 대하는 방식은 아이가 어떤 집단에 준하는 성인으로 성장하는지에 결정적이다. 아이에겐 그것이 자신이 아는 세상의 전부이기에 성장 배경에 있었던 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그들의 사고방식을 답습하기 때문이다. 가치관을 형성하는 주요한 시기에 한 가지 이상의 배경에 노출되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양립 불가능한 삶의 양식이 일으키는 충돌을 겪고 둘 중 우세한 쪽이 다른 한쪽을 부정하게 된다. 이는 개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에서 부정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귀추할 수 있다. 이때, 어느 한 집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 분별 자체를 부정하며 충돌을 마무리한다면 기존의 배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개인이 등장하게 된다. 핍의 사례를 통해, 그가 겪은 신사와 노동 계급의 충돌과 그 대립 끝에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기까지의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핍은 노동자 계급의 아이로 자라다 우연한 기회로 신사 계급에 속하는 해비셤 부인의 저택에 초대받는다. 이 노출로 핍은 기존의 노동자 계급의 근면성실하고 근검절약하는 삶이 아닌 신사 계급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목격한다. 그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혼란을 겪는데 전에는 어떻다는 생각 없이 인식했던 특징들, '손이 거칠고, 구두가 두껍고 흉하다는 것, 네이브를 잭이라 부르는 천박한 습관 등을 이젠 스스로 비천하고 불량한 존재의 근거로 인식하는 것이다.' 에스텔러라는 또래로부터 받은 경멸은 효과적으로 핍의 가치관을 뒤흔들었고 그 결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적당한 나이가 되면 조의 도제가 되어 같이 대장장이 일을 하는 즐거운 나날을 보내리라 상상하던 핍은 '1년도 안 되는 동안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음을 느꼈다(1권, 197면).' 핍에게 집은 '모든 것은 투박하고 천박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미스 해비셤과 에스텔러한텐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 되었다(1권, 198면).' 노동자 계급의 삶이 예정되어 있지만, 신사 계급의 시선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간극을 지우기 위해 핍은 자신을 '비범하게 만드는 묘안으로 비디로부터 그녀가 아는 모든 것을 배우고'(136면) 그 이후에도 '저녁에 대장간에서 돌아오면 공부에 매달리는 삶을 산다' (1권,233면). 그러나, 신사가 되는 일은 여전히 요원한 일이었기에 마음속 깊이 신분 상승의 욕망을 품으면서도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노동자 계급의 시선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두 가지 다른 삶의 양식은 핍에게 두 인물로 대표되어 나타나는데 에스텔러와 비디다. 숙녀 교육을 받으며 자라 핍의 신분을 경멸하는 에스텔러, 똑같이 고아로 자랐고 '거칠긴 했지만 위안을 주는 손을'(240면) 지닌 비디와의 함께하는 모습을 견주어보는데 이는 핍이 신사의 세계와 노동자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바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성적으론 신사의 세계에 기웃거리는 것은 비참하기만 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노동자의 세계에 남는 것이 자신에게 합당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핍의 무의식은 본능적으로 신사의 삶을 동경하고 기존의 삶을 부정하고 있었으며 유산이 상속 가능성이 제기됨으로써 이 부정은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다.
바라던 대로 신사 계급에 속하게 된 핍은 그에 걸맞게 행동한다. 신사의 시선과 노동자의 환경에서 정체되었던 핍의 정체성 정립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이전까지 가치관과 행동 양식의 일치를 방해하던 금전적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때, 핍은 자신의 정체성에서 노동자 신분을 완전히 부정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구분 짓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름 없이 묻힐 불쌍한 운명의 마을 사람들에 대해 숭고한 동정심을 느끼며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겸손을 베푸리라 다짐한다(1권, 272면).' 겸손하게 베푸는 동정심은 상대방을 같은 부류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징표다. 상속 전만 해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비디와의 나날을 상상하는 배경이었던 습지에 대고 '어린 시절의 지루한 친구들이여, 이제부터 나는 런던에 가 훌륭한 신분이 될 몸이시니 대장간의 막일이나 너희들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귀한 몸이시라'(1권, 273면)라 명확히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런 구분 짓기는 상반된 가치관이 야기하는 혼란을 피하기 위한 핍의 자기 보호였다고 생각된다. 두 계급 사이의 중간 지대를 상상할 수 없으니 한쪽을 확실히 선택하는 것이다. 조의 런던 방문은 핍이 기존 정체성의 부정을 통해 어떻게 배은망덕의 죄를 짓는지 보여준다. '참으로 수많은 점에서 그에게 신세를 졌음에도 신분에 맞지 않는 그의 방문이'(1권, 399면) 핍은 부끄럽다. 어울리지 않은 정장 차림의 조의 행동 하나하나에 짜증을 표했고, 이는 조에게도 전해져 그가 더욱 부자연스럽게 핍을 대하게 만든다. 조는 떠나며 '다시는 이런 옷차림으로 핍과 만나지 않을 것이며 둘은 사적이고 익숙한 곳 외엔 어떤 곳에서도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한다(1권, 411면).' 핍의 정체성 형성은 그의 노동자 시절을 상기시키는 것들 -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 을 파괴함으로써 순조롭게 마무리되는 듯하였으나 매그웨치의 등장으로 핍은 신사와 노동자, 즉 자산을 가지고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된다.
핍은 매그위치와 조우함으로써 자신이 '상속받을 재산이 하나도 없는 데다가 아무런 직업 교육도 받지 않았기에(2권, 165면)' 신사 계급과 노동자 계급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릴 적 웃어른들에게 죄인으로 취급당하다, 떳떳한 신사가 되어 존경을 받아본 핍에게 신분 상승의 근간에 자신의 죄수가 있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신사의 시선에 익숙해진 핍은 은인 매그위치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죄수라는 본바탕만을 목격한다(2권, 156면).' 그러나, 신사라고 불리지만 행동은 전혀 모범적이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 드러믈을 비롯한 '숲 속의 방울새들', 생계를 위해 일하지만 존경할 만한 인물인 매슈 포킷과 허버트, 법률사무소 서기의 직업과 별개로 즐거운 성을 가꾸어나가는 웨믹 등 인물들의 군상을 총체적으로 체험하면서 신사가 되는 것이 삶에서 추구해야 하는 가장 소중한 가치라는 시선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신분을 아우르는 시각을 가지게 된 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죄인데, 신분이 아닌 다른 구분 짓기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핍은 자신의 가련한 환상을 이용했던 미스 해비셤을 용서한다. 핍 역시 '가슴 아픈 잘못들을 저질렀고 그녀를 모질게 대하기엔 그 또한 용서와 지도가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2권, 267면).' 『위대한 유산』의 인물들은 죄짓기와 용서로 깊이 엮여있다. 콤파슨은 해비셤 부인에게, 해비셤 부인은 에스텔러에게, 에스텔러는 핍에게, 핍은 조와 비디에게 죄를 짓는다. 또한 조와 비디는 핍을, 핍은 해비셤 부인과 에스텔러를 용서한다. 이런 연민과 관용의 네트워크는 핍이 스스로의 신사다움을 제시하는 토양이 되었다. 사회의 판별 기준을 곧이곧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기준을 제시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사회에서 죄수로 낙인찍힌 매그위치에게 깊이 연민을 느끼며 "오, 하느님이시여, 죄인인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에서 완성된다. 이런 시선이야 말로 핍을 기존의 집단으로 분별할 수 없는 개인으로 만드는 개성이며, 핍과 같은 인물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형이 사회에 편입되게 된다.
기존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새로운 인물 유형은 시대가 만드는 위대한 유산이다. 이는 개인의 개성 발현으로 시작된다. 핍이 겪은 단 하나의 시련이라도 그에게 닥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개성을 발현했을지에 대해선 심히 의문이 든다. 핍의 성장엔 혼란스러운 환경, 그에 따라 그가 저지른 배은망덕의 죄와 뉘우침이 불가결했기 때문이다. 신분의 급격한 변화가 핍에게 어떤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는지 또, 사람들의 관용 속에서 어떻게 과오를 극복하고 새로운 인물상으로 제시되게 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사회 속에서 개인의 개성이 발현되는 구조를 분석했다. 때론 어떤 인물에겐, 그가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가 주어지기도 하는 법이고, 그런 방식으로 새로운 인물상을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핍은 조와 비디, 매그위치, 해비셤 부인 같은 특정 개인에게 자신의 개성을 상속받지 않았다. 몰락한 신사, 부유한 죄수 등 다양한 군상이 뒤섞여 혼란스럽던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은 핍 같은 새로운 시선을 지닌 인물이 탄생할 수 밖에 없었고 찰스 디킨스는 그런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