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쑥섬이야기(14)

’우리는 기억합니다’ 일제강제동원희생자를 추모하며

by 명재신


<뒷먼밭 할머니>


지난 여름에 김천에 다녀왔습니다.


김천시립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우리는 기억 합니다'를 둘러볼 요량으로 8/16(금) 오전에 출발을 해서 저녁에 올라오는 일정으로 다녀왔는데 더위가 장난이 아니어서 고생 좀 했습니다.


그래도 잘 다녀왔다는 생각입니다.


이 특별전은 김천시립박물관과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 공동주최하였는데 저가 소속되어 있는 서울시인협회를 통해서 저는 할머니에 대한 시 3편을 출품을 해서 지난 부산전시회부터 시작해서 김천으로 옮겨와 전시회가 진행된다 해서 아내하고 함께 다녀왔습니다.


시 3편은 모두 태평양전쟁 때 징용으로 끌려가 남양군도(사이판)의 군사용 활주로 건설현장에 강제 동원되었던 큰아버지의 죽음과, 큰아들을 잃고 평생을 가슴을 두드리며 쑥섬에서 사시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손자의 안쓰러운 시선으로 쓴 시들이었습니다.





뒷먼밭* 할머니



뒷먼 여기쯤 어디였으리

마냥 상퀘이 노니는 서바다 오리똥눈디 어디쯤에서

어무이 어무니 부르는 소리 있어

아가야 어디냐 어디라고 사이판 전쟁터에 나가

B29에 니 청춘 모두 접고 그 아래에서 울고 있느냐

가슴 잡어 뜯고 뜯어 가슴치고 쳐서 내가 니 원혼을

달랠 수만 있다면 내 가슴에 푸른 장독 내리더라도

아가야 아이야

어쩌랴 묵은 사연들 묵힌 시련들 그저 삭힐 수만 있다면

오로지 풀어진다면 너가 그냥 지나기는 인연이라 해 준다면

이 섬을 떠나는 어느 날 새파람 극성일지라도

하늘 바람 살랑이는 겨우 초입이라도

니한테로 갈 거니 니를 품으로 갈 거니

내 아이야 내 아가야


*뒷먼밭 : 쑥섬의 뒤쪽 벼랑인 오리똥눈디 위에 있는 밭.




할머니는 지심 매러 올라간다고 그 뒷먼밭에 자주 넘어가셨는데 점심시간이 되어서도 안 내려오면 어머니는 도시락을 싸서 건네주면서 할머니한테 가져다 드시게 하고 모시고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또 울고 계시는 모양이다"


집에서 자꾸 우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 섬의 뒤쪽 양지바른 뒷먼밭에 올라가서 지심을 메면서 울고 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그렇게 죽어 불등가. 허벅지에 총알을 맞었다면 살릴 수 있었을 것인디 '


쑥섬에서 명석하기로 소문이 나고 나로도 인동에서도 인물이 하나 났다고 할 만큼 준수하고 똑똑해서 할머니는 큰아들이 우리 집안을 일으킬 거라고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의 패색이 짙은 태평양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고 나로도와 쑥섬 까지도 징용의 손길이 뻗쳐서 큰아버지를 포함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남양군도 전역으로 끌려가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는데 큰아버지도 그 중에 한 명이었으며 결국은 돌아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가 불등가?'


고흥 점암에서 같이 사이판까지 징용을 간 청년이 또 있었는데 그 청년과 함께 활주로 공사에 동원되어 있다가 미군 삐이십구가 기총소사를 하면서 폭격을 하는 상황에서 사탕수수밭으로 함께 피했는데 나중에 보니 많은 중상자 중에 큰아버지도 오른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져 있더랍니다. 병원으로 데려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은 상태로 실려오자 의사들이 나와서 무슨 약물을 주사하니 그대로 다들 절명을 해 버리더랍니다.


'그래 자네가 가서 묻었응께 묻은 자리는 알긋제. 나중에 나랑 함꾸네 가서 데려오세. 어이'


큰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숨을 그대로 거두었고 그 청년이 직접 큰아버지를 파묻으면서 '자네는 내가 살아서 묻어나 주는데 나는 죽어 누가 묻어 줄건가' 하고 울었는데 그 청년은 천행으로 미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해방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답니다.


그 길로 쑥섬으로 들어와 큰아버지의 사망소식을 전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아야 가서 얼릉 좀 데리고 온나 어이'.




사물놀이



네 마리 학이 날아들어

쇠를 두드린다 쇠가죽을 두드린다


꿈에 학이 찾아와 등을 내미는 걸 마다하고

다친 걸음 다 낫거든 가거마 하고

식은땀으로 잠을 깬 할머니 가슴은 시퍼렇게

장독이 돋아 올라 있었습니다.

남양군도에 징용가 죽은 큰 아버님 제삿날마다

두드리던 가슴에 독이 올라 쓰다듬던 날의

기억이었습니다.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로 돌아

상당굿 하당굿 오르내리며

쑥섬 한 바퀴 돌아가도록


꿈에 늘상 할머님이 보였습니다

저승을 못 들어간 큰 아버님 유골이라도 찾아 오너라고

호통을 쳐 대는 잠 끝은 식은땀 돋아

밤은 밤대로 고통스러웠습니다 그게 안쓰러워

아내는 밤샘 기도 끝에 할머님 사진을 벽장에서

떼어내 나도 모르는 장롱 어디엔가에 감춰 버렸고

그날 밤 꿈에 검은 쇠가죽 짐승이 되어

큰아버님 홀로 나타나 길고도 긴 울음 울고는

어데론가 사라져 갔습니다.


풍물이여 풍물이여 가슴을 두드려라

쇠가죽 놋쇠가슴 찢어지고 닳아지고



'아야 나 좀 일으켜 다오'


임종을 앞두고 할머니가 마지막 기력을 다해서 저에게 마당의 화단을 볼 수 있게 누워 계시던 작은방에서 마루로 옮겨서 일으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비스듬히 마루 벽에 기대서는 화단을 한참을 내어다 보시더니 그러셨습니다.


'나 인자 니한테로 갈란다'


살아 생전에 좀처럼 저희들에게 큰아버지에 대해서 말씀을 안 하시던 할머니는 임종 직전에 화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내어다 보며 혼잣말로 그러셨습니다.


그리고는 혼수상태가 되셨는데 큰방으로 모셔다가 할머니의 옷을 갈아 입히시던 어머니와 집안 할머니가 갑자기 더 크게 우시는 소리에 달려 들어갔더니 할머니의 가슴에 검은빛의 '장독(멍이 든 부위)'이 시꺼멓게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슴을 두드렸길래 세상에!'


할머니는 뒷먼밭에 올라가셔서 큰아들 이름을 부르면서 우시면서 그렇게 가슴을 두드렸던 모양이었습니다.



한식파도*


머언 손님 고옵게도 오네 바람도 없이

예가 어디라고

어디 칠성바다 밤내 우는 조기사리 울음 물고 왔능가?

다들 죽고 이름만 건너온 남양군도 어디 메에서 왔던가?

헛장* 써놓은 우리 장손 머시라도 넣어주고 갈라고

아직도 눈을 못 감고 있는디

화전花煎놀이* 끝물인디 쉰 막걸리라도 한 잔 하시고 가시게

잘 썩어 빠진 홍어무침 안주 삼아 넉넉하게 자시고 가시게

굼실굼실 취한 술이 다 깨기 전에 부디

곧 뒤따라 갈 거라고 안부나 잘 전해 주시게나


*한식파도 : 한식(4월 5일) 즈음에 이는 커다란 너울.

*헛장 : 주검없이 쓰는 무덤 혹은 장례 방식.

*화전놀이 : 쑥섬에서는 한식 즈음에 동네 마당에서 화전놀이를 했다




그 더운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함께 김천시립박물관까지 동행을 해 주었습니다.


늘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끼고 살던 신랑을 이해하고 그 시들이 담고 있는 내력과 쑥섬에서 살다가 가신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함께 알아준 아내가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책장 속에 들어 있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다시 꺼내서 들여다보면서 이번 글은 할머니와 큰아버지에 대한 글을 써서 두 분을 기려야겠다고 늦은 밤까지 책상에 앉아 사진과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번 시간을 내셔서 김천엘 다녀오시길 권합니다.




김천시립박물관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