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종자 속에 있던 저장양분 분해효소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며 저장 양분을 분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개명자동차 파이낸셜” 반듯반듯한 글자가 청록색 유리 건물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인턴 계약서라 적힌 새하얀 종이는 견뎌낸 시간에 대해 정체 없는 적이 던지는 일종의 백기 같은 거였다.
흙탕물에서 두어 번 구르니 양분이 되는 흙을 골라서 쥐고 일어날 수 있었다.
3개월을 채운 공공기관(하지만 간이 오피스에 급하게 채운 책상들로 형태를 유지 중이었다) 경험을 수백 번 형형색색의 수식어로 고치며 누군가는 정형화된 취업 노동자로 조금씩 거듭나고 있었다.
팀은 아주 작았다. 본부장과 팀장, 금융 분석 담당 대리와 금융 운영 대리, 내가 뒤를 이을 선배 인턴. 전체 사무실은 ㄷ 모양이었는데 두 갈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면 개발팀, 법무팀을 거쳐 세일즈와 운영팀의 순서였다. 지금 생각하면 공기 하나 통하지 않고 끊임없이 회전되는 모양의 답답한 공간이었지만
그때 당시 누군가에겐 기가 죽을 만큼 압도적인 사옥이었다.
운영팀의 책상은 통유리 앞에 배치되어 따갑도록 쨍한 햇살이 자리를 안내하듯 비추고 있었다.
운영팀의 대리는 누군가와 학교 동문으로 2년 선배였다. 그녀는 작은 키에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있었는데 동그란 안경 사이로 웃는 모습은 어딘가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처음 온 인턴에게 자신은 허물없이 지내는 상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퇴사를 앞둔 인턴에게 끊임없이 조잘대곤 했다. 대리는 일주일 내내 하이톤의 목소리로 자신을 두고 어딜 가냐며 퇴사하는 인턴을 책망하고 있었고 한참 어린 인턴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쓱한 공기를 채우기 바빴다. 둘만 애틋한 그 사이를 누군가는 스스로 불청객이라 여기며 인수인계 책자를 일주일 내내 정독하는 수밖에 없었다.
약 50페이지에 달하는 인수인계서는 각종 금융법과 분석법을 읊고 있었다. 50페이지의 무게감은 낯선 이름의 12종의 보고서보다 학교 동문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가까웠다.
사람이 서로 동지애를 갖는 방법은 자신의 무의식과 연결된 어두운 사실을 공유하는 것이다.
완전히 밑바닥은 아닌, 하지만 자신의 곪은 부분과 연결되어 있던 기억의 한 조각.
그래서 만일 이 사람이 경박스럽게 떠든다고 해도 크게 타격받지 않을,
하지만 공유하는 순간 서로의 고통을 어렴풋이 공감할 수 있는 사실들.
“난 사실 자격증 시험 준비했었다? 그 시험 실패하고 뭐할지 막막해서 개발 언어도 배우다가 여기서 일하게 됐어” 사실 대리는 운영팀의 정규직이 아닌 CS팀의 계약직이었으며 정말 피나는 노력 끝에 공채를 얻을 수 있던 것이었다. 똑 부러지는 대리가 실은 대단한 시험까지 도전했다는 것이, 실패 후에도 빠르게 개발 언어를 배우고 정규직 자리까지 도달하다니.. 누군가에겐 도전 앞에서 머뭇거리던 자신의 소심함이, 사소한 실패에도 작아지던 자신의 뚝심이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단지 친해지고 싶던 대리가 아닌 취업의 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전지전능한 신은 언제 무력화될까. 신자의 기도가 부실할 때? 신자의 수가 줄어들 때? 누군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신은 조금씩 금이 가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무너지고 있었다. 유일한 남자였던 팀장은 자신의 무능함과 무분별한 발언은 생각지도 못한 채 여자들의 등쌀에 못 이긴다며 해고당했고
곧이어 나의 신도 이직을 통보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본부장의 인심 때문일까, 인심 좋게 올려준 연봉 때문일까.
나의 신은 머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의기양양한 복귀와는 다르게 신은 더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텁텁한 감옥 같은 사옥에서 그녀는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느끼는 듯 했다. 안경 너머의 눈은 더 날카로워졌고 옆팀과 떠들던 여고생 같은 대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회사에 대한 선망 어린 눈빛을 신은 코웃음으로 반응했다.
“현대자동차랑 현대엘리베이터랑 같니? 우린 현대엘리베이터 같은 거야. 당장 없어져도 아무도 몰라”
당신이 말한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는 이제 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인턴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신이 내리는 처벌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인수인계서를 추가로 15장을 만들었지만 신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새로운 인턴의 입사 날에도 모든 열의를 잃은 채 지겹다는 말만 되뇌이고 있었다.
퇴사 이후에도 새로운 인턴은 감히 신에게 질문하지 못하고 과거가 된 누군가에게
조심스러운 카톡으로 질문했다. 듣기론 2달 후 그 인턴은 대기업에 합격해서 나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