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책 출간: 서평단 모집, 대형 서점 입고
안녕하세요. 리나입니다.
펀딩이 끝난지 한 달이 넘게 지났고, 후원자 분들께 배송한지 2주 가까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테오도로스 2세' 편을 연재하면서 서점에 보낼 자료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카드뉴스, 보도자료, 서지정보 등....아무래도 정식 대형서점에 보낼 자료들이니 대충할 수가 없었어요 ㅠㅠ
특히 보도자료는 텀블벅의 예시페이지를 바탕으로 썼는데....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써야 했습니다. 카드뉴스는 디자이너에게 맡길까 제가 할까 고민했다가..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서 제가 만들었습니다 ㅠㅠㅠ 좀 이상해보이지만요....
그리고 서평단을 구했습니다. 책과 콩나무 카페에서 12명(2명은 스태프), 제가 개인적으로 요청한 블로거/인친 분들께 3명으로 총 15명이었죠.
서점에 입고되기 전에 구하는 게 좋겠구나 싶었거든요(홈페이지에 아무것도 없으면 허전하니까요..ㅠㅠ
다행히, 책콩에서 많은 분들이 서평단에 지원을 해주셔서 좋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요청한 분들도 흔쾌히 받아주셨고요(11분께 요청했는데 3분이 받아주셨어요!! 너무 좋았습니다).
(서평 이벤트는 계속 진행합니다. 이미 후원하신 분들, 구매하실 분들은 서평 이벤트 참조 부탁드려요ㅎㅎ)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134
어제 배본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대형서점에 입고가 완료됐다고요.
알라딘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2133210
Yes24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3739668
(현재 yes24의 판매지수가 120이네요. 이렇게 판매지수가 뜨는 걸 보니 신기합니다 ㅎㅎ)
교보문고는 중쇄를 찍으면 입고하려해요. 부수가 부족하고...무엇보다 판권지가 내지 안에 있는 게 장벽이에요...ㅠㅠㅠ
(다른 출판사들이 맨 뒷장에 판권지를 넣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건데 왜 전 그 사실을 무시했을까요. 중쇄 찍을 때 인쇄소에 이 사실을 말해야겠습니다..ㅠㅠㅠ)
보도자료
국민 스스로 왕의 목을 벤 최초의 혁명, 국민의 원성이 대륙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혁명의 성패를 좌우한 여인 헨리에타 마리아가 있었다
세계사에 기록된 최초의 혁명
큰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된 인조가 세상을 떠나고, 병자호란 때 인조를 압박했던 도르곤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유럽 전체를 뒤흔든 혁명이 일어났다. 1649년 1월 30일, 영국의 왕 찰스 1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국민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정치를 하고,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켰다는 죄목이었다. 1642년부터 1649년까지 국왕파와 의회파로 나뉘어 내전을 치렀고, 혜성처럼 나타난 올리버 크롬웰에게 국왕이 패배하면서 벌어진 결과였다.
17세기 영국, 찰스 스튜어트가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비어버린 국고와 모래 위를 간신히 붙드는 왕권, 종교 갈등으로 인한 내분뿐이었다. 장미전쟁 때 귀족 가문들이 몰살당한 이후 튜더 왕가의 국왕들이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며 종교를 개혁했지만, 종교 전쟁을 막지 못했다. 늦춘 것뿐이었다. 스코틀랜드 태생이었던 제임스 1세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잉글랜드 내에서 입지가 미약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왕권신수설’을 내세워서 종교 갈등을 해결하려 했다. 제임스 1세는 국교회와 비국교회 사이의 줄타기를 유연하게 해냈지만, 아버지보다 우직했던 찰스 1세는 반대편을 능청스럽게 설득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는 총신 버킹엄 공작과 상비군 문제로 의회의 반발을 샀고 찰스는 의회 해산으로 맞섰다. 찰스 1세는 11년간 의회 없이 혼자 통치하다가, 새로운 기도서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역사가 숨긴 왕비의 사랑과 투쟁, 그리고 용기
의회는 찰스 1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왕의 종교 문제였다. 의회는 가톨릭교도 왕비 때문에 왕이 가톨릭교에 관대하게 대한다는 이유로, 왕비 주위의 측근들을 핍박하고 왕비와 왕자들을 떼어놓으려 했다. 찰스 1세는 신실한 개신교도였지만, 가톨릭교도인 헨리에타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초반에는 총신들의 이간질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았지만, 예술적이고 고아한 국왕과 재치 있고 영리한 왕비는 점차 서로에게 감화됐다. 의회가 같은 가톨릭교도란 이유로 왕비와 아일랜드 반란군이 공모했다고 주장하고, 대간의서로 자신들의 불만을 열거하자, 화가 난 찰스가 의원들을 체포하려고 시도하면서 내전이 시작됐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을 사랑했기에, 남편을 살리고 싶었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남편이 궁지에 몰리자, 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헨리에타의 고국인 프랑스도, 같은 가톨릭교를 숭상하는 교황청도 그녀의 호소를 무시했다. 그들 입장에서 영국의 왕과 왕비는 이단에게 매몰된 사람들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1649년, 찰스 1세는 내전에서 패배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144년 전이었다. 헨리에타는 고국에서 남편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지만, 남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죽기 전에 위용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을 처형한 자가 죽을 때까지 끝까지 살아남아,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프랑스의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앙리 대왕의 딸, 절대주의의 기초를 다진 루이 13세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처럼, 남편이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군주가 돼야 하고, 이를 위해 왕의 권력이 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남편을 위해,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여했다. 그리고 같은 가톨릭교도가 박해당하는 모습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를 원칙으로 삼은 헨리에타를 사랑한 찰스 1세는 아내의 의견을 수용했고, 박해당하던 가톨릭교도에게 자비의 손길을 내밀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청교도 신자인 의원들의 사냥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의회에 굴하지 않는 왕비를 보고 역사는 ‘남편을 홀려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악녀’라고 기록했다.
내전과 혁명의 경계에 선 왕비의 일대기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국왕과 의회의 내전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불렀다. 국왕의 폭정에 맞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거친 ‘혁명’으로 기억됐으나, 20세기 후반부터 ‘수정주의 학파’가 득세하면서, 찰스 1세를 절대악, 찰스에게 맞선 올리버 크롬웰을 절대선을 보는 이분법적인 시선에서 벗어났다. 그로 인해 영국 학계에서는 청교도 혁명이 아니라 잉글랜드 내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찰스 1세를 순교자, 성군이 되고자 한 왕으로 조명하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그러나 영국에서 외지인이었던 헨리에타 마리아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갔다. 왕의 딸, 누이, 아내, 어머니로 기억될 뿐이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한때 유럽 대륙 전체를 뒤흔들었지만, 후대의 굵직한 전쟁들에 비하면 내막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생소한 청교도 혁명, 또는 ‘잉글랜드 내전’으로 불리는 사건을 찰스 1세의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의 시선에서 조망한다. 20세기 초반의 작 역사를 단순하고 파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비판을 받지만, 1900년대 초반 작품 중에서 헨리에타 마리아의 공과를 잘 분별하였다. 책장을 넘기면, 기존 역사책에서 담지 못한 그녀의 매력과 삶, 속사정을 생생히 들을 수 있다.
카드뉴스
>>카드뉴스를 새로 제작하고 있기 때문에 잠시 내립니다.
이렇게 복붙하고나니 뭔가 부끄럽네요 ㅎㅎ
(서점 광고를 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고민입니다. SNS에 홍보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컨텐츠를 만들고 있는데....SNS 광고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해서요. 하지만 서점 광고를 하려면 돈이 엄청 들겠죠ㅠㅠㅠ).
그러니...구매 의향이 있었지만 후원시기를 놓치신 분들은 Yes24와 알라딘에서 '헨리에타 마리아'를 검색해주세요 :)
(해외 배송이 가능한지는 배본사에 물어볼게요. 해외에 사시는 분들도 원없이 구매해주셨으면 좋겠어요 ㅎㅎ)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