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베네치아, 프리드리히와의 대립 : 마누일 1세(동로마)
지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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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일이 헝가리를 복속하려 했던 이유는,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와의 경쟁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세르비아 대사가 프리드리히에게 외교적 제안을 해서 마누일의 비위를 건드린 적이 있었는데, 마누일은 이를 보고 좀 더 신성로마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헝가리를 동로마의 영역으로 복속시킨 거였죠. 헝가리마저 신성로마와 가까워지면 안 되니까요. 그러면 콘라트 때와 달리 마누일은 프리드리히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었던 걸까요? 아마 로마 황제를 향한 서로의 열망이 부딪힌 것도 있고(그래서 주변 국가들을 복속시키려고 서로가 경쟁하듯 노력했고), 헝가리의 게자 2세의 동생 슈테판이 프리드리히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가 실패한 것도 두 제국이 부딪힌 원인 중 하나일 것입니다.
마누일과 프리드리히 사이의 냉전은 마누일의 부인 슐츠바흐의 베르타와 그녀의 형부 콘라트가 죽으면서, 대략적으로 1160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마누일은 프리드리히의 라이벌이었던 사자왕 하인리히에게 접근하고, 루이 7세의 십자군에 대한 불만을 가라앉히면서 툴루즈 백작 레몽 5세하고도 동맹을 모색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등의 도시국가들과도 동맹을 맺어(이 때 막대한 돈을 썼죠), 이탈리아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프리드리히의 야욕을 저지시키려 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1162년 피사,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동로마의 영역인 에피로스로 손을 뻗으려 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의 루지에로를 뒤이은 마누일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올랐죠.
그런데 이 무렵, 프리드리히와 교황청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됐습니다. 프리드리히가 북이탈리아에 여러 차례 원정을 하며 야욕의 손을 뻗으려 할 때 북이탈리아 국가들은 이에 반대하고 자치 공화국을 세우려 했으며, 교황 하드리아누스도 북이탈리아 국가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도시들은 교황의 동의가 없으면 프리드리히와 거래하지 않겠다고 나섰고, 교황은 이에 수락하며 40일 정도 기한을 둔 뒤 프리드리히를 파문하겠다고 약조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입장에서는 이 약조가 기분 좋게 들릴리 만무했습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하드리아누스가 급사를 했고, 시에나의 추기경 롤란드가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 즉위했습니다. 알렉산데르 역시 위의 약조를 무르려 하지 않았고, 끝없이 반목한 끝에 결국 1160년 프리드리히는 알렉산데르에게 파문을 당했습니다.
마누일은 프리드리히와 교황의 불화를 기회로 삼고자 했습니다. 마누일은 이 불화를 치료한다는 조건으로 교황과 협정을 맺었습니다. 바로 마누일이 로마의 '유일한' 황제라고 인정하는 협정이었죠. 그러면 마누일이 왜 로마의 '유일한' 황제 타이틀에 집착했을까요? 확실치 않지만, 북이탈리아를 정벌할 때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이탈리아를 무력으로 정벌하기 전에 그쪽 사람들의 민심을 얻어야 하는데, 로마 제국의 본고장이 이탈리아였으니까요. 이탈리아 사람들 역시 로마 제국을 숭상하고 있었기에 '내가 진짜 로마 황제야'라고 입증할 만한 협정이 있으면 민심을 얻기가 좀 더 수월하겠죠? 프리드리히도 마누일과 비슷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누일과 알렉산데르의 협정은 서방 세계에서 좀처럼 인정 받지 못했습니다. 이미 전임 교황 하드리아누스 때, 그리스와 라틴 교회의 통합이 실패한 전적도 있었고요(하드리아누스와 마누일 모두 자신이 좀 더 높은 권위를 인정받기를 바랐었죠. 계속 불화를 맺다가 교회 통합에 실패했고요) 그래서 마누일은 알렉산데르에게 막대한 자금을 제공하면서, 신학적 교리에 관해 교황 측의 편을 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알렉산데르는 마누일에게 제관을 했고, 이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는 다른 독일 왕자들과 함께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났지요. 이탈리아 국가들은 프리드리히에 반대하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맺었고, 1174년 프리드리히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 무렵 마누일과 교황은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았고, 프리드리히가 원정에 실패한 이후에도 1175년까지 교황과 마누일은 여전히 우호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래도 교황과 협정을 맺은 마누일은 북이탈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이때, 마누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폭정'과 달리, 기존의 자유와 특권을 존중하면서 정복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침 시칠리아의 굴리에모가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아들은 나이가 어렸습니다. 마누일의 손이 뻗치기 딱 좋았죠. 그러나 교황은 시칠리아가 교황의 영지라고 주장했고 이는 마누일이 선수쳐서 시칠리아와 협상을 맺으면서 일단락되었습니다. 시칠리아의 굴리에모 1세가 죽었을 때, 마누일의 딸 마리아와 굴리에모 1세의 아들 굴리에모 2세의 혼약을 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으나, 양측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무산되었습니다(이렇게 마리아는 또 결혼을 못하는...). 그래서일까요. 마누일은 협상이 무산된 것을 완화하기 위해 롬바르드 동맹을 맺은 도시들에게 재정적으로 지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탈리아 사람들과 문화적인 교류를 하면서 그들을 편하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마누일은 이때 피사, 제노바 등 베네치아를 제외한 도시들에 통상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무역을 독점하던 베네치아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누일 입장에서는 베네치아에게 모욕당한 것도 있고(베네치아인들이 무어인에게 황제옷을 입히고 비웃었던 전적이 있었죠), 베네치아가 너무 큰 특혜를 받으면서 내부 분란을 자꾸 일으키니(선대왕 요안니스가 베네치아와 해전을 벌였다가 패배한 전적도 있었고요) 언젠가 저들의 콧대를 눌러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때마침 1171년 초에 제노바 상인의 거주지가 크게 공격받는 사건이 일어났고, 마누일은 이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마누일은 이를 기회로 동로마 내의 베네치아인들을 체포하고 배를 나포했습니다. 이 소식이 베네치아 본국에 전해지자 베네치아인들은 매우 격노했지요. 제노바 사건은 마누일이 베네치아인을 체포하기 위해 날조했다는 소문도 퍼졌지요. 결국 베네치아 도제 비탈레 미카엘은 함대를 모아 동로마의 에브리포스 해협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사전에 방어 준비를 했던 동로마군 탓에 피해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도제는 콘스탄티노플에 사절단을 보내 강화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마누일은 이미 베네치아를 굴복시키겠다고 단단히 벼른 탓에 도제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도제는 다시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키오스 섬으로 향하게 했는데, 이때 역병 등으로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습니다.
베네치아 함대는 서둘러 본국으로 퇴각했지만 폭풍우 때문에 살아남은 배는 몇 척 되지 않았습니다. 도제는 간신히 본국에 도착했지만, 역병이 본국에 퍼지게 되었고, 성난 국민들의 야유를 받아야 했습니다. 국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도제 미카엘을 칼에 찔러 죽였고 새로운 도제를 선출했습니다. 새로운 도제는 마누일에게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마누일은 '로마인에게 대항해서 살아남은 자가 없다'고 무시무시하게 협박했습니다. 베네치아는 마누일이 프리드리히와 대립하는 것을 알고, 프리드리히와 연합하여 동로마를 공격하려 했지만 다른 롬바르디아 동맹 국가들에게 크게 깨지기만 했습니다. 결국 1180년 베네치아와 동로마는 평화 조약을 맺었지만, 이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몇십년 후 둘의 관계가 역전되어 4차 십자군이라는 참극을 불러일으키리란 사실을요.
한편 마누일은 베네치아 전쟁 때 프리드리히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자칫하면 동로마가 위험할 때 신성로마가 공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1171년 자신의 딸 마리아와 프리드리히의 아들 하인리히와의 결혼식을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실패하고, 1173년 프리드리히의 재상 마인츠는 베네치아와 연합하여 앙코나를 공격했습니다. 베네치아가 동로마에 복수를 할 때 신성로마를 끌어들인 것이었죠. 다만, 마누일은 피사, 제노바 등 이탈리아의 다른 국가와의 동맹을 공고히 했습니다. 결국 프리드리히와 마누일은 마누일이 죽을 때까지 자기들이 로마 황제라고 생각하며 절대 양보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8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