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헝가리 원정 : 마누일 1세(동로마)
계속 병원다니느라 글을 질질 끄는 바람에.....퀼이 많이 낮아졌어요..ㅠㅠ
양해 부탁드립니다...ㅠㅠㅠ
지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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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두앵이 죽은 후, 마누일이 예루살렘 왕국과의 친분을 회복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모리는 마누일이 예루살렘을 온전히 정복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경계했습니다. 루이 7세가 한창 동로마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모집할 때, 아모리는 안티오키아 공국에 편지를 써서, 너희가 십자군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셀주크 튀르크나 그리스의 침략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여기서 그리스는 동로마죠). 이때 안티오키아는 마누일의 처남 보에몽 3세(마누일의 아내 마리아의 남동생)가 하림 전투(1164년 8월)에서 패배한 후 동로마의 속국이 되고 있었죠. 아모리는 자칫하다 자기들도 안티오키아의 신세가 될까봐 두려워했는데(실제로 보에몽은 마누일과 함께 있을 때 마누일 옆의 낮은 황좌에 앉았다고 합니다), 마침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가 내전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아모리는 이집트를 정복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누레딘이 사전에 보에몽 3세와 레몽 3세를 포로로 잡았기 때문에, 아모리는 몸값을 먼저 확보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이집트의 주요 거점들이 동로마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죠. 아모리는 몸값을 구할 겸 동맹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동로마와 손을 잡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평화 조약으로 알렉산드리아를 넘겨 받은 것 외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아모리는 마누일과 2년 가까이 협상을 거친 끝에, 마누일의 조카손녀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했습니다. 이때 두 사람은 함께 이집트 원정을 진행하자고 논의한 뒤, 원정을 치르기 위해 동로마의 군대와 아모리의 군대는 아스칼론에서 연합했습니다. 사실 아모리는 마누일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를 원치 않았지만, 이집트가 살라딘에게 함락당하자 아모리는 콘스탄티노플로 직접 가서, 마누일에게 보상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마누일은 성대한 의식을 열고, 아모리를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인정하면서, 상위 군주라는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습니다.
예루살렘 왕과 다시 인척 관계가 되어, 동방 외교를 안정시킨 마누일은 헝가리로 눈을 돌렸습니다. 1161년 5월 31일 헝가리의 왕 게자 2세가 죽었는데, 1156년에 마누일은 남이탈리아 원정에 전념하기 위해 게자와 평화 조약을 맺었었습니다. 게자가 죽자 헝가리 왕실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원래부터 헝가리를 동로마 제국의 영역으로 만들고자 했던 마누일은 헝가리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마누일의 어머니인 헝가리의 이리니가 게자 2세의 증조부 게자 1세의 동생 라즐로 1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마누일에게는 헝가리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할 명분이 충분했습니다.
마누일은 게자의 동생 스테판에게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마침 게자의 동생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망명했습니다. 마누일은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한 스테판 3세의 숙부(스테판 4세, 게저 2세의 동생)에게 물자를 지원해 형에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탓에 스테판 3세는 몰래 도망을 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스테판 4세가 마누일의 조카와 결혼한 뒤 헝가리의 왕이 되었는데, 스테판 4세는 동로마에 편향적인 정책을 펼쳐서 헝가리 귀족들의 불만을 샀습니다. 이 틈을 타 스테판 3세가 숙부를 가두고, 다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마누일은 재빨리 스테판 3세와 친해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절을 보내, 스테판 3세를 왕으로 인정하되 왕의 동생 벨라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마누일은 벨라에게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등의 영토를 준다면, 벨라와 자신의 딸 마리아 콤니니(위의 아모리의 아내 마리아 콤니니와 동명이인)를 결혼시키고 벨라를 추후 왕위계승자로 생각하겠다고 스테판에게 말했습니다. 스테판은 흔쾌히 마누일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벨라는 알렉시오스라는 이름을 얻고 전제군주(despot)로 선언되었습니다.
이렇게 까지만 읽으면 동로마와 헝가리 사이에 평화가 지속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테판 3세는 동로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성로마의 프리드리히 1세를 끌어들인 뒤, 벨라의 영지인 달마티아를 탈환했습니다. 그리고 스테판 4세가 머물렀던 시르미온을 향해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마누일은 직접 친정을 감행했는데 룸 술탄국과 세르비아까지 끌어들인 대규모의 전투였습니다. 결국 헝가리군이 물러나고 시르미온 지역을 수복했으나 동로마 측의 손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 헝가리는 시르미온을 되찾기 위해 다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고, 건강이 나빠진 마누일은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라는 장군에게 대신 헝가리와 맞서 싸우게 했습니다.
콘토스테파노스의 군대에 튀르크, 쿠만, 독일 용병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헝가리군 총사령관 데네스는 3개의 사단으로 편성해 공격할 준비를 했습니다. 동로마의 궁수들은 돌격을 감행했고, 헝가리군 전체가 앞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자 오른편에서 헝가리군이 공격했고, 동로마군은 좌익과 우익에서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이때 동로마의 람파르다스라는 장군이 헝가리 사령관 주변의 군대를 공격했고, 콘토스테파노스는 정신을 차리고 중앙에서 돌격을 했습니다. 그러자 헝가리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마구잡이로 도주했습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의 대승으로 끝났고, 헝가리측은 평화 조약을 맺는 대신, 시르미온은 물론 달마티아, 크로아티아가 동로마의 영역으로 넘기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동로마에 공물을 바치고 동로마측에서 요청하면 군대까지 공급하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스테판 3세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고, 헝가리를 뒤에서 돕던 신성로마제국의 영향력도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1169년 약혼한 벨라와 마리아 콤니니의 결혼식을 치르려 할 때, 새로 맞이한 황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아들 알렉시오스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마누일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벨라와 딸의 약혼을 취소하고 벨라를 전제군주에서 부제의 직위로 좌천시켰습니다. 대신 1172년 벨라의 형 스테판이 죽자 마누일이 밀어준 덕분에 벨라가 왕이 되었고, 그덕에 헝가리와 동로마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아들이 태어날 때, 마누일의 나이가 50이 넘었다는 점이었습니다(7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