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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Feb 02. 2023

새로운 원정을 통해 만난 신붓감

(5)안티오키아 원정 : 마누일 1세(동로마)

지난 편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165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늦게 올려요. 답댓도 있다가 달아드릴게요..ㅠㅠ 죄송합니다. 눈이 돌 것 같아요.




마누일은 시칠리아 원정을 실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누일의 탓은 아니었지만) 2차 십자군의 참패는 마누일의 유럽 외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하지만 마누일의 인생에서 항상 실패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사실 시칠리아 원정 때 더 아집을 부리지 않고 조약을 맺은 것도 현명한 선택이었죠. 그때 시칠리아도 신성로마의 프리드리히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거든요) 도리어 그는 위기를 토대로 주변국(특히 동방)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안티오키아 원정에 성공했습니다. 이때, 마누일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영화 킹오헤에서 나오는) 르노 드 사티용이었습니다.


르노와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출처: 위키백과)



안티오키아의 여왕 콩스탕스는 남편 레몽이 죽자 새로운 남편을 구해야 했습니다. 이때, 마누일은 주군의 자격으로 (이때 안티오키아는 동로마의 제후국이었으니) 콩스탕스에게 새로운 남편감을 추천하였지만, 콩스탕스는 거부하고 자신의 밑에서 일하던 르노를 택했습니다. 그런데 결혼과정이 매우 기막힙니다. 르노는 신의와 책임감이 없는 인물로 유명해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총대주교 에메리도 이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르노는 에메리를 구타한 뒤 상처에 꿀을 발라 성채 지붕 위에 묶어 놓았습니다. 벌들이 에메리의 몸을 막 쏘았고, 고통에 시달리던 에메리는 결국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르노는 흔쾌히 결혼을 했고, 에메리에게서 많은 돈을 뜯어냈습니다.

 

르노의 인성은 결혼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르노는 마누일이 군자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루벤 왕조 레오의 맏아들인 토로스와 연합해 동로마의 영토였던 키프로스를 공략했습니다. 그는 키프로스에서 약탈, 살인, 강간 등을 저지르며 키프로스를 초토화시켰습니다. 마누일의 조카 요안니스와 장군 미하일 브라나스가 용맹하게 싸웠지만, 르노는 두 사람을 가둔 뒤 불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포로들은 어마어마한 몸값을 갚지 못해 계속 르노 밑에서 감금되어 있어야 했지요. 그리고 일부러 마누일을 모욕하기 위해 동로마 사제 몇 명의 코를 잘라 콘스탄티노플을 보냈습니다.


소식을 들은 마누일은 르노의 만행에 분개했습니다. 그는 1158-59년에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킬리키아를 침공했습니다. 마누일은 토로스가 이끄는 아르메니아군을 재빨리 기습했습니다. 그리고 2주 만에 킬리키아의 모든 도시를 접수했지요. 토로스는 진작 마누일이 온다는 말을 듣고 도망쳤고, 마누일은 수소문해서 토로스를 찾으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누일이 사전에 외교로 손을 썼고(특히 안티오키아 인근의 예루살렘 왕국은 이미 마누일과 결혼 동맹을 맺은 상태였죠) 르노의 명분 없는 전쟁이 불러온 결과가 어떤지 알았기에 주위 국가들은 르노를 돕지 않았습니다.


결국 르노는 항복하겠다고, 자신이 점령했던 안티오키아 성채를 넘기겠다고 빌었지만, 르노의 만행을 톡톡히 들은 마누일은 르노를 봐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르노는 직접 거친 베옷을 입고 황제의 진영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발아래 엎드려 두 손으로 싹싹 빌었지만 마누일은 그를 만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티오키아 성채를 돌려주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보낸 사람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에 임명하고(안티오키아 정교회를 동로마의 정교회로 편입하는 것), (사실상 제국의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제국군의 안티오키아 주둔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르노의 항복을 받아들였습니다.


마누일은 안티오키아에서 성대하게 개선식을 치렀습니다. 이때 르노는 마누일의 말구종 노릇을 하며 지내야 했습니다(자업자득인데 여왕의 남편인 르노 입장에선 엄청난 굴욕...). 얼마 전 마누일의 조카(마누일의 형 이사키오스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해 인척 관계를 맺은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3세도 마누일을 환대했습니다. 마누일은 시민들에게 마상 시합을 열어주면서 정의를 베풀면서, 동로마 제국의 위상을 널리 떨쳤습니다. 예루살렘과 안티오키아 공국과의 주종관계도 분명히 했지요. 다만 이때 보두앵은 결국에 붙잡힌 토로스의 사면을 요구했고, 기분이 좋은 마누일은 토로스의 사면을 허용하되 산에서만 머물게 했습니다. 시민들은 위엄 있으면서 자비로운 황제의 모습을 보고 크게 환호했습니다.


자신의 성과에 만족한 마누일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던 중 튀르크군을 맞닥뜨렸고, 마누일은 손쉽게 튀르크군을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더 진격하지 않고 누레딘과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2차 십자군 때 붙잡힌 그리스도교 포로 6천 명을 모두 석방해주고 누레딘, 마누일과 적대하는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내주겠다는 조건 아래에서요. 마누일이 원정을 이쯤에서 그만둔 이유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모반의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입니다(이미 한 차례 반란을 일으킨 안드로니코스의 행보가 의심스러운데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튀르크가 동로마의 국경을 위협했기에, 더는 수도를 비워둘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마누일은 셀주크 튀르크의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과 싸운 뒤 항복을 받아내면서 소아시아 국경을 안정화시켰습니다.


한편 마누일은 아내 베르타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들이 필요했고(베르타는 딸 두 명을 낳았죠), 서둘러 재혼을 해야 했습니다. 마누일은 십자군 국가들과의 동맹을 위해, 이들의 딸과 결혼하기를 원했습니다. 후보군은 두 명이었습니다. 트리폴리 백작 레몽 2세의 딸 멜리장드와 안티오키아 콩스탕스의 딸(르노가 아니라 첫번째 남편에게서 얻은 딸이죠. 설마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는 이상 르노 딸과 결혼할 리가...) 마리아였습니다. 원래대로면 마누일과 친분이 있는 보두앵 3세가 밀어주는 멜리장드와 결혼할 예정이었습니다(보두앵과 마누일이 동시에 안티오키아 가문을 경계하고 있기도 했죠).


하지만 보두앵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1160년 11월 르노가 누레딘에게 포로로 잡혔기에 아내 콩스탕스가 정사를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콩스탕스는 인기가 없어서 시민들은 그녀의 아들 보에몽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상위 주군이었던 마누일이 이 문제를 위임해야 했지만 예루살렘의 보두앵은 어린 보두앵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뒤 총대주교 에메리에게 정사를 돌보라고 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콩스탕스는 마누일에게 보두앵의 행동을 일러바쳤고, 마누일은 (자신의 봉신이라고 생각한) 보두앵의 월권 행위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1161년, 마누일은 보두앵이 밀어주던 멜리장드 대신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와 재혼했습니다(물론 마리아의 얼굴이 더 아름답기도 했고요).


마누일 1세의 두 번째 아내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출처: 위키백과)



보두앵은 마리아와 마누일의 결혼 소식을 듣고 경악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실책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친척의 결혼을 축하했습니다. 소피아 성당에서의 화려한 결혼식을 본 뒤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병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162년 2월 10일, 보두앵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32세였습니다. 마누일은 보두앵을 잠시 원망했어도 막상 그가 죽으니 슬퍼했습니다. 오랫동안 쌓아올린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예루살렘의 왕위는 보두앵의 동생 아모리가 뒤를 이었습니다. 아모리와 마누일은 서로를 경계했고, 마누일은 이를 완화하기 위해 아모리와 결혼 동맹을 맺으려고 했습니다(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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