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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na Ka Jan 24. 2023

실패로 끝난 황제의 원정들(대체 뭐가 문제야)

(4)2차 십자군(2), 시칠리아 진출: 마누일 1세 콤니노스

지난 편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164




마누일이 십자군을 콘스탄티노플에서 통과시킬 틈에, 시칠리아의 루지에로 2세는 아테네, 테베, 코린토스 등 그리스권 도시들을 약탈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누일은 루지에로가 황제에게 대항한다며 분개했습니다. 마누일은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3편에서 나왔던) 악수흐, 매형 스테파노스와 함께 시칠리아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쿠만족이 비잔티움의 영토를 공격했고, 마누일은 이들의 침략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누일의 동서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왕 콘라트가 비참한 몰골로 마누일을 찾아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2차 십자군은 참패했습니다. 먼저 콘스탄티노플을 떠난 콘라트의 십자군은 룸 술탄국의 수도 이코니온으로 진군했습니다. 그는 이코니온으로 가던 중 도릴라리움에서 술탄의 군대를 맞닥뜨렸고, 그곳에서 참패했습니다. 콘라트의 이복형제 오토가 이끄는 군대도 라오디케아 근처에서 패배해 대다수 병사들이 죽거나 노예로 팔려나갔죠. 마누일에게 (제발 딴 생각하지 말라는 뜻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루이의 십자군은 니케아에서 콘라트의 군대와 합류했습니다. 콘라트의 군대는 전멸당해 극소수만 남은 상황이었죠. 더구나 콘라트는 행군하던 도중 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었습니다. 루이는 십자군의 승패가 오로지 프랑스군에게 달려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콘라트 3세의 세밀화(출처: 위키백과)



루이는 안티오키아로 행군하는 도중, 끊임없이 튀르크군의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더군다나 안티오키아로 갈 배가 부족해, 루이는 아내와 자신의 주력부대만 태우고 나머지 군은 나중에 뒤따라오게 했으나 남은 프랑스 군대는 라오디케아에서 전멸당했죠. 게다가 룸 술탄국의 술탄 장기가 암살당하고 그의 위대한 아들 누레딘이 아버지의 이름을 이으면서 십자군은 더 위험에 처하게 됐습니다. 루이의 군대는 가까스로 안티오키아에 도착했지만, 안티오키아에 있는 레몽과 조슬랭은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을 뿐더러 미남이었던 레몽과 루이의 아내 엘레오노르가 바람을 핀다는 소문까지 떠돌았습니다. 레몽은 누레딘이 형제들과 지금 권력다툼을 하는 틈을 타, 원래 목적지인 에데사가 아니라 알레포를 공격하라 했습니다. 엘레오노르 역시 레몽의 편을 들며 알레포를 공격하지 않으면 이혼하자고 했죠. 화가 난 루이는 엘레오노르를 연금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안티오크에서 맞이하는 루이 7세를 맞이하는 레몽(출처: 위키백과)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주변 용병들을 통해 군사력을 증진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에데사가 아니라 다마스쿠스로 향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이슬람 국가들 중 유일하게 누레딘에게 적대적이었고 예루살렘 왕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말이죠. 왜 십자군이 다마스쿠스를 공격했는지 의문입니다. 이미 한차례 장기에게 에데사를 구하기엔 힘이 역부족인데, 알레포는 이미 루이가 거절했으니 '이왕 빈손으로 떠날 바에는 다마스쿠스를 완전히 삼켜서 우리 수하로 만들자!'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요? 다마스쿠스 전투도 십자군이 패배했습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근처의 지리를 잘 몰랐으니, 예루살렘에서 오랫동안 몸을 구른 누레딘 군대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다마스쿠스에서 패배한 십자군은 가뜩이나 내분이 일어난 판에 더 심하게 내분을 벌였습니다. 루이는 남성편력이 심한 엘레오노르가 살라딘과 바람을 펴서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다그치기도 했죠. 결국 두 사람은 사이가 계속 안 좋아져 이혼을 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누레딘에게 함락당하면서 2차 십자군은 마누일에게 안 하느니만 못한 전투가 되었죠. 시칠리아와 쿠만족이 말썽을 부리던 차에 적을 또 만든 셈이니까요. 십자군 사이에서는 동로마 영지 내에서 튀르크군에게 공격받은 것을 핑계로 마누일의 군대가 튀르크와 연합하여 십자군을 공격했다는 소문도 퍼졌지요.


한편 마누일의 시칠리아 원정은 어떻게 됐을까요? 마누일은 자신의 조카딸 테오도라와 콘라트의 동생 하인리히를 결혼시켜 동맹을 더 강화한 뒤 베네치아에게서 도움을 받기로 약조했습니다. 그는 1149년 시칠리아가 차지한 코르푸 섬을 탈환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마누일은 하늘 위로 열심히 투석기를 쏘아올렸지만, 방어군은 재빨리 화살과 돌로 대응했기 때문이지요. 식량도 1년치 이상을 비축하고 있었기에 굶겨 죽이기도 쉽지 않았죠. 질질 늘어지는 포위전에 베네치아 군사들은 짜증을 부립니다. 그리스군이 보는 가운데, 에티오피아 노예에게 황제복을 입히는 짓까지 저질렀죠(와 인성 보소). 마누일이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베네치아 군사들의 행동을 알게 된 마누일은 격분했을 것입니다. 마누일은 빨리 코르푸를 점령하기 위해 대책을 취했습니다. 그는 악수흐에게 안코니를 작전 기지로 사용하라고 명령한 뒤 그를 남겨놓고, 자신은 동쪽으로 우회했습니다.


결국 몇 달 뒤 코르푸가 함락됐습니다. 마누일의 새로운 전략 덕도 있고, 방어군 측에서 누군가가 배신한 덕도 있었지요. 그런데 세르비아군이 헝가리 국왕의 지원을 받아 중간에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마누일은 폭동의 배후에 시칠리아 국왕 루지에로가 있다고 생각했지요. 마누일의 추측이 정답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았지만, 이때 루지에로는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가 돌아온 루이를 설득해 반(反) 동로마 동맹을 꾸리자고 설득했습니다. 가뜩이나 시칠리아에 이슬람인이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루지에로였기에, 마누일은 루지에로에게 더 위협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십자군에서 유일하게 마누일에게 우호적이었던 콘라트 덕에 '동로마군을 무찌르기 위한 십자군'은 결성되지 않았지만, 십자군과 동로마 사이의 갈등은 계속 지속되어 50여년 후에 파국으로 치닫고 말죠('4차 십자군'을 말하는 것입니다. 4차는 저번 테오도로스 2세 편에서 다루었으니 마누일 편에서는 다루지 않을 예정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제관을 받는 루지에로 2세(출처: 위키백과)



그런데 1152년 콘라트 3세가 죽었습니다. 이와 중 루지에로는 헝가리 왕 게자 2세와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마누일은 헝가리 원정을 이끌었고 1154-55년에 마누일과 게자는 평화 협상을 맺었고, 게자의 동생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망명을 오면서 어느 정도 헝가리와 평화를 유지했지요. 그리고 세르비아의 폭동을 진압한 뒤 마누일은 동서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이, 콘라트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1세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해 동맹을 유지했죠. 교황에게도 돈을 뿌려 교황도 자신의 편으로 포섭했습니다. 음흉한 루지에로가 1154년에 세상을 떠나자, 마누일은 시칠리아 원정을 본격적으로 준비했습니다.


마누일은 남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하기 위해 1155년, 미하일 팔레올로고스(여기에도 팔레올로고스가)와 요안니스 두카스 장군을 이탈리아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바리를 시작으로, 트라니, 조비나초, 안드리아 등 아풀리아의 해안 도시들이 줄줄이 항복했습니다. 바리가 이탈리아에 남은 최후의 동로마 영토인데다가 루지에로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굴리에모가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었죠. 미하일은 남이탈리아의 영토 회복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듯했죠. 마누일의 '옛 로마 제국이 영광 달성'이라는 꿈은 조만간 이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마누일의 남이탈리아 원정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콘라트에 비해 마누일과 유대감이 부족했던 프리드리히는 좀처럼 그리스군을 돕지 않았고, 미하일 역시 현지에서 고압적으로 행동해 현지인의 원성을 샀기 때문입니다. 음흉한 루지에로보다 굴리에모는 어리석고(굴리에모는 평화조약을 맺어주면 선왕이 차지했던 그리스 영토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죠. 이걸 보고 마누일은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몸이 약하다고 생각한 마누일의 추측과 달리, 굴리에모는 격렬하게 항쟁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압적이긴 해도 뛰어난 장군이었던 미하일이 세상을 떠나고, 범용한 인물인 요안니스가 군사를 지휘하면서 추세는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요안니스는 여러 차례 시칠리아 군에게 패배한데다가, 용병들이 급료를 주지 않는다고 파업하기까지 했죠. 요안니스는 결국 시칠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마누일은 급히 알렉시오스 악수흐를 보내 전세를 역전하려 했지만, 알렉시오스가 안코나를 획득했어도 전세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마누일의 원대한 꿈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프리드리히가 막대한 돈을 받고도 비협조적인 자세로 나섰으니, 마누일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프리드리히가 북이탈리아를 차지하고 남이탈리아까지 넘보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지요. 이 무렵, 마누일의 아내 베르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비록 외국인 출신 황후였고 마누일은 사생아를 여럿 두며 베르타를 멀리했지만, 마누일과 베르타 사이에서 딸 두명이 있는 것을 보면 마누일이 베르타를 완전히 모른 척한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녀는 이름을 이리니로 개명하고 그리스 문화에 친숙해지기 위해 열렬히 노력했지요. 또한 마누일이 전쟁을 나갔을 때, 대신 정사를 돌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1154년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여러분이 아시는 그 안드로니코스 맞습니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대신 반란을 진정시키기도 했습니다. 베르타가 죽었을 때 마누일은 막 울기도 했지요. 베르타가 죽자 마누일과 프리드리히 간의 동맹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마누일은 즉각 프리드리히의 반대편에 지원을 해서 그의 야망을 좌절시켰습니다. 그리고 더 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마누일은 굴욕을 무릅쓰고 시칠리아와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시칠리아 역시 동로마군의 침략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순순히 조약을 맺었습니다. 시칠리아는 동로마가 차지한 안코나를 동로마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신, 남이탈리아 영역은 시칠리아측이 차지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포로로 잡혀있던 요안니스 두카스 장군도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었지요(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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