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제위계승, 2차 십자군(1): 마누일 1세 콤니노스
지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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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일 콤니노스는 1118년 11월 28일, 요안니스 2세와 헝가리의 이리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마누일은 황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위에 두 형이 죽고, 셋째 형과 둘째 숙부만 남은 상황에서 마누일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요안니스가 성격 급하고 다혈질인 셋째 이사키오스보다 온화한 성품의 마누일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요안니스는 아픈 몸을 이끌고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마누일에게 직접 제관을 씌워주고 황제복을 입혀주었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 1143년 4월 8일, 요안니스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누일은 많은 증인 앞에서 황제로 임명되었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 즉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황권이 불안정했습니다. 하지만 선황의 장례가 우선이었기에 현장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누일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충신이었던 악수흐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형 이사키오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사키오스가 반란을 일으키면 안 되니까요.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선황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바로 이사키오스를 체포했습니다. 항의하는 이사키오스를 감금한 뒤, 추방되었던 또 다른 이사키오스(알렉시오스의 둘째 아들, 즉 요안니스의 동생)도 체포했고요. 그런데 총대주교의 자리가 비었습니다.
악수흐는 마누일의 대관식을 치러줄 총대주교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현직 총대주교가 얼마 전에 죽었거든요. 악수흐는 총대주교 후보자들에게 다양한 선물을 안겨준 뒤 새 황제가 매년 은조각 200개를 지급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악수흐 덕에 지지를 확보하자, 마누일은 아무 혼란 없이 수도에서 대관식을 치렀습니다. 그런데 마누일에게 장애물이 또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마누일의 매형 요안니스 루지에로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다행히 마누일의 누이가 미리 남편의 음모를 알려서 마누일은 바로 매형을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궁중 암투가 일단락되자 마누일은 형과 숙부 이사키오스, 사촌 안드로니코스(숙부 이사키오스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감옥에 갇혔는데...왠지 풀어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를 풀어주고 200파운드의 금을 교회에 헌납했습니다. 이제 마누일에게 대항하는 황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생전 요안니스 2세는 시칠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왕 콘라트 3세(교황에게 직접 대관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황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대신 로마왕의 칭호만 받았습니다)와 동맹을 모색했습니다. 요안니스가 막내아들 마누일과 결혼할 공주를 보내달라고 콘라트에게 청하니, 콘라트는 자신의 처제 베르타를 동로마로 보내기로 약조했습니다. 그리고 베르타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을 때 요안니스가 죽고 마누일이 황제가 된 뒤였습니다. 마누일은 베르타를 보고 냉담하게 반응했지만, 콘라트와 동맹을 맺기 위해 베르타와 결혼했습니다. 베르타는 3여년 간 그리스 문화를 익힌 뒤 이름을 이리니로 개명한 뒤, 1146년 황제와 결혼했지요.
마누일이 결혼했다고 일이 끝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마누일은 현군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에 번영하는 제국을 물려받았습니다. 하지만 외적들은 끊임없이 동로마를 괴롭혔습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들은 남이탈리아에서 동로마 황제들의 영향력을 지워나갔고, 셀주크 튀르크 역시 소아시아에서 노르만인들과 똑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레반트에서는 새로운 십자군 국가들이 기세등등했고요. 발칸에서는 헝가리 왕국이 세르비아까지 영토를 넓히며 동로마를 괴롭혔지요. 마누일이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습니다.
마누일은 먼저 룸 술탄국, 그러니까 셀주크 튀르크를 공격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신부에게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기 위해 이코니온까지 직접 친정했습니다. 그런데 포위가 막바지에 이를 때즈음, 프랑스의 루이 7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위기에 빠진 십자군 국가들의 구원을 도와달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때 에데사 백국이 튀르크 세력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퍼져, 교황이 십자군을 모집한 차였거든요. 루이 7세와 콘라트 3세는 십자군에 참여했고, 50여년 전 1차 십자군 때 알렉시오스가 해주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누일이 자기들의 물자를 지원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마누일은 1차 때 십자군이 할아버지 알렉시오스에게 어떻게 만행을 부렸는지 알았기에, 머리가 지끈해지기만 했죠(1차 때 고드프루아가 알렉시오스에게 충성 바치지 않겠다고 공성전을 벌이거나, 보에몽이 충성 맹세를 어기고 안티오크를 차지하려 했다든가 등 십자군과 동로마간에 계속 트러블이 있었죠). 더군다나 마누일은 이미 포위를 풀고 튀르크와 강화 조약을 맺은 상황이었죠. 특히, 1차 때 영주들이 참여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직접 왕들이 참전하기에 자칫하면 튀르크-서방 세계와의 외교적 문제에 직면할까봐 걱정했습니다(한쪽의 편을 들면 한쪽을 적으로 돌리는 셈이니까요. 서방과 이슬람에 끼여버린 동로마의 상황...).
결국 마누일은 식량과 보급품을 지원하겠지만 모두 유료라고 루이에게 답신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왕들이 참전하니까 뭔가 다르겠지 싶어서 기대를 했지만, 콘라트의 십자군은 민중 십자군, 1차 때처럼 동로마의 영토에 들어서자마자 약탈, 살인, 강간 등을 저지르며 난동을 부렸습니다. 그들이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도달했을 무렵, 마누일은 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을 지나지 말고 헬레스폰트를 건너 소아시아로 가라고 했으나 거절당했죠. 그나마 루이의 십자군은 같이 동행한 왕비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덕에 기강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식량비로 거액의 돈을 요구하면서 마누일을 실망시켰습니다(그런데 이들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는게 마누일이 튀르크와 강화 맺은 게 이들에게는 마누일이 뒷통수를 친 것으로 보였겠죠). 마누일은 이들에게 화려하게 대접한 뒤 조심할 사항을 말해주고 어서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게 했습니다. 마누일은 저들이 잘 끝내기를 바랐지만, 제발 쓸데없는 난동을 부리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마누일의 걱정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습니다(4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