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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an 08. 2023

두 현제의 업적, 외적과 고군분투하던 그들의 인생

로마 제국 마지막 대제....(2)시대적 배경: 마누일 1세 콤니노스

지난 편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161


이번편은 동로마 충신들 편 연재할 때 썼던 글을 재탕합니다..ㅎㅎ 다음편부터 본격적으로 자료를 토대로, 연재할게요 :) 




1118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죽기 직전, 아들 요안니스에게 황위를 물려주려고 했습니다.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장자 승계가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딸 안나가 요안니스가 주정뱅이라든가, 방탕해서 황제가 되기에 모자라다는 등 온갖 중상모략을 펼쳤지만 알렉시오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나가 황제로 세우려했던 사위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유능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결국 알렉시오스가 죽고 요안니스가 공동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안나는 남편을 황제로 세우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브리엔니오스는 나라를 위해, 자신과 아내의 안위를 위해 쿠데타를 포기합니다. 동로마 제국의 법도상 반역자는 눈을 뽑는 형벌을 내려야 했지만, 마음씨 고운 요안니스는 누이를 수도원에 유폐하는 선에서 멈춥니다. 몰수했던 재산도 다시 돌려주었지요.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출처: 나무위키)



알렉시오스가 장자 승계를 고집한 이유와 브리엔니오스가 쿠데타를 포기한 이유에는 전임 황제들의 실정이 컸습니다. 알렉시오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 동로마는 몰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바실리오스 2세 이후 이슬람 세력의 진군과 노르만 세력의 습격으로 아르메니아 영역과 이탈리아 영역을 상실하는 등 영토가 좁아지고 있었죠. 쿠데타를 일으켜 콤니노스 왕조를 개창한 이사키오스 1세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해 국고를 채우고 군대를 개혁했지만, 쿠데타를 하면서 국경을 지키던 군대를 수도로 불러들이는 바람에 튀르크족이 국경선을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시민의 지지를 잃은 이사키오스는 두카스 가문의 콘스탄티노스를 후계자로 지목한 뒤 퇴위했습니다. 


콘스탄티노스가 콘스탄티노스 10세로 즉위해 두카스 왕조를 개창했지요. 콘스탄티노스 10세 역시 몰려오는 튀르크족을 막지 못했습니다. 후임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다시 아르메니아 영역을 수복하지만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한 뒤 포로가 되면서 동로마 제국의 위신은 땅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다행히 로마노스 4세가 튀르크의 술탄과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아르메니아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노스는 동로마로 돌아가자마자 쿠데타로 제위를 박탈당했습니다. 로마노스 4세의 뒤를 이은 미하일 7세는 전쟁의 여파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물가가 폭등하는 바람에 '파라피나키스(-1/4이라는 뜻)'라는 별칭까지 붙었죠. 예전에는 노미스마(당시 동로마 제국의 화폐) 1개 당 밀 1되씩 살 수 있었지만, 물가가 폭등하는 바람에 금 1개로 밀을 3/4되밖에 못 샀기 때문이지요. 결국 미하일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터뜨렸습니다. 


이때 두각을 드러낸 사람은 대(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였습니다. 전자는 동부를, 후자는 서부를 점령하면서 비등비등한 세력을 유지했죠.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지지와 유능한 장군 알렉시오스의 도움을 토대로 보타니아니스가 정권을 잡고 니키포로스 3세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브리엔니오스의 세력을 진압하느라 군대를 국경에서 불러들이는 바람에 튀르크족의 침략은 계속되었습니다. 각지에서 반란도 멈추지 않았고요. 이와 중, 후계 다툼이 발생했습니다. 니키포로스 3세는 미하일 7세의 황후 마리아와 혼인했는데, 마리아는 미하일 7세하고 낳은 아들을 황위에 올리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니키포로스 3세는 전임 황제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기회를 노린 알렉시오스는 마리아와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결국 니키포로스는 퇴위하고 알렉시오스가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했습니다.


니키포로스 3세 보타네이아테스(출처: 위키백과)


이처럼, 전임 황제들이 황위를 장난처럼 주고받은 시절을 뼈저리게 기억하던 알렉시오스는(알렉시오스 본인이 쿠데타로 황제가 되기도 했고요) 황위를 굳건히 하는 방법은 장자 승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딸과 사위를 사랑했음에도, 장남에게 황위를 물려준 것이었지요. 소(小) 브리엔니오스도 장인어른이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많은 업적을 세웠다는 사실을 기억했고요. 그러면 알렉시오스는 어떤 개혁을 해서, 자손들에게 안정된 제국을 물려줄 수 있었던 걸까요?


황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1세는 경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먼저 화폐 가치가 하락한 노미스마의 유통을 허락하되, 7/8의 금을 함유한 화폐 히피르피론을 새로 주조한 뒤, 히피르피론을 세금으로 거두어서 국고를 채웠습니다. 그 돈으로 군대의 기강을 키우고 함대를 증강했습니다. 이때 알렉시오스는 노르만 군대의 침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직 군대 재편을 끝내지 못한 그는 베네치아 용병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매수해 노르만의 침공을 막아냈습니다. 마침, 노르만의 수장 기스카르가 죽으면서 전쟁이 막을 내렸죠. 하지만 서방에서 외적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이제이' 전법을 활용했습니다. 페체네그족의 침공 때는 쿠만족을 이용해 제압하고, 쿠만족의 침공 때는 셀주크 튀르크를 이용해 제압했죠. 


하지만 오랫동안 서방 전선에 집중하다 보니 동방 전선은 방치되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튀르크군의 침공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알렉시오스는 로마 교황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다른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전 유럽인이 힘을 모아 이교도 세력과 대결하는 성전聖戰을 펼칠 생각이었죠. 이 소식을 듣고 농민들부터 영주, 기사, 군주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부대의 규모가 커졌고 알렉시오스는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떠맡게 되었죠. 알렉시오스는 한때 동로마 군대와 싸웠던 노르만 출신 보에몽도 참여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죠. 그는 십자군의 군주들에게 충성 서약을 맺고 정복한 땅을 동로마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보에몽은 기꺼이 서약을 맺지만, 툴루즈 백작 레몽과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고드프루아의 군대는 황제를 향해 화살을 쏘기까지 합니다. 알렉시오스는 자신의 사위인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에게 저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했지요. 브리엔니오스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고드프루아는 항복하고 알렉시오스에게 충성 서약을 맺었습니다.


고드프루아를 접견하는 알렉시오스 1세(출처: 위키백과)


1097년, 1차 십자군 원정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셀주크 튀르크를 패배시키고 아나톨리아(해안 지역 한정), 안티오크, 니케아 등 옛 동로마의 영역뿐 아니라 성지였던 예루살렘까지 탈환하였죠. 하지만 십자군은 자신들이 얻은 영지를 동로마에게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군이 니케아를 공격하기 전에 알렉시오스가 셀주크 튀르크에게 항복 권유를 했고, 니케아 성에 동로마의 국기를 꽂아놨거든요. 십자군은 탈환한 지역을 동로마에게 돌려주지 않고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공국 등을 세웠죠. 알렉시오스는 십자군, 특히 보에몽에게 배신감을 느낍니다. 보에몽은 알렉시오스에게 가장 먼저 충성 서약을 맺었는데, 막상 안티오키아를 손에 넣으니 가장 먼저 알렉시오스와의 약속을 어겼거든요.


결국 알렉시오스와 보에몽이 전쟁을 치렀습니다. 보에몽이 패배했고, 황제와 보에몽은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결국 보에몽은 데불 조약을 맺고, 안티오키아를 넘겨주고 알렉시오스의 봉신이 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보에몽은 실의에 빠져 죽었습니다. 알렉시오스는 아들 요안니스와 헝가리의 피로스카를 결혼시켰지요. 헝가리 왕이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점령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죠. 요안니스는 이처럼 아버지가 세운 방어 전선 덕에 좀 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타란트의 보에몽(출처: 위키백과)



1119년, 요안니스는 라오디키아를 수복하기 위해 출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 요안니스 악수흐라는 장군이 활약을 합니다. 황제의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악수흐는 선봉대를 이끌고 라오디키아를 포위했습니다. 아부 샤라는 수성을 포기하고 도망쳤습니다. 이때 요안니스가 옵니다. 요안니스는 방어벽을 쌓아서 적이 다시 오지 못하게 했죠. 그런데 갑자기 요안니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쿠데타가 터진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수도를 오래 비우기 불안해서 돌아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제 중앙군은 악수흐가 맡게 됩니다. 악수흐는 아탈레이아 북쪽 50km 지점에 있는 소조폴리스를 정복하고, 마이안데르 강 지대의 요새들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 덕에 아탈레이아를 잇는 육로가 다시 연결되었죠.


1121년, 요안니스는 페체네그족이 콘스탄티노플과 가까운 트라키아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페체네그족은 수십년 전, 선황 알렉시오스 1세에게 도륙당했기에 복수하려고 동로마로 진격한 것이었습니다. 요안니스는 소정의 병력을 가지고 트라키아로 진격합니다. 트라키아에서 페체네그족을 맞닥뜨린 요안니스는 이간질을 구사하고 많은 선물을 안기는 등 시간을 벌었습니다. 페체네그족의 족장은 점차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요안니스는 그들과 협상을 하는 척했습니다. 처음에는 동로마군에게 불리했습니다. 황제도 약간 부상을 입을 정도였지요. 페체네그족이 수적으로 더 많았고 요새에서 화살도 끊임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거든요. 결국 전차를 도끼로 부수고, 페체네그족장이 항복하면서 페체네그족 포로들은 동로마군에 편입되었습니다.


게다가 알렉시오스 1세 시절,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은 데불 조약을 맺고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었죠. 하지만 보에몽이 죽고 레몽이 안티오키아 공작이 되면서, 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요안니스는 레몽을 비롯한 라틴 귀족들을 격파하고 약탈로 응징하면서 다시 안티오키아를 수복합니다. 라틴 귀족들은 샤이자르를 봉토로 주면, 안티오키아를 떠나겠다고 했습니다. 샤이자르는 무슬림들이 차지한 영역이었는데, 요안니스는 저들을 샤이자르에 보내면 안티오크의 치안도 지킬 수 있고 안티오크와 무슬림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요안니스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샤이자르를 침공했습니다.


공성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안니스와 같이 참전한 레몽과 조슬랭은 안티오키아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무슬림 세력과 가까이 있는 샤이자르로 이사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동로마군이 무슬림군과 치열하게 싸울 동안 레몽과 조슬랭은 주사위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무슬림 지원군이 도착하고 레몽과 조슬랭은 환호하니, 황제는 저들의 배신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이때 샤이자르 측에서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황제의 봉신이 되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이죠. 심지어 70여 년 전 만지케르트 전투 때 빼앗긴 보물까지 건넸습니다. 요안니스는 무슬림과 협상을 진행합니다. 그 덕에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간접적인 지배권을 확보했죠. 요안니스는 안티오키아에 개선식을 치르면서 입성했지만, 안티오크를 직접 지배하고 싶어 했던 요안니스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레몽과 조슬랭은 황제를 몰아내기 위해 안티오크 내의 라틴인들을 선동합니다. 황제가 라틴인을 추방하고 동로마인에게 안티오키아를 넘기려 한다면서요.


샤이자르 공방전(1138)(출처: 위키백과)



이때 요안니스는 룸 술탄국이 다시 동로마를 공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두 사람에게 충성 서약만 받고 급히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 룸 술탄국을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안티오키아에 갈 수 없었습니다. 매형 브리엔니오스와 장남과 차남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거든요. 설상가상으로 황제도 킬리키아에서 사냥을 하다가 독화살을 맞아 시름시름 앓게 됩니다. 이제, 막내아들이었던 마누일이 황위에 오를 순간이 머지 않았습니다(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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