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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Mar 16. 2021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꾼 사람들

정유경, <왕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브런치에서 엘아라(본명: 정유경)님의 글을 읽게 되면서 이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브런치북 출간 프로젝트에서 은상을 받은 작가님의 작품일 뿐 아니라, 이 작가님의 글을 읽고 서양사를 좋아했던 시절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때까지만 해도 역덕이었던 나란 사람. 그러나 지금은 역덕으로만 머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역사의 정의 때문이다. 역사란 사건들의 '객관적인' 기록 또는 과정을 의미한다. 즉, 역사학자나 교수들, 역사책을 집필하는 사람은 최대한 객관적 사실에만 집중해야 한다. 누군가 죽어도 그냥 '죽었다',  왕위를 잃으면 '왕위를 잃었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건이란 인물들이 일으키고 그 사건이 모여서 역사가 되는 것인데... 과연, 역사 속 인물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인물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살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사학과 대신 국문학과로 진학했고, 현재 내 꿈은 역사소설을 쓰는 사람, 좋은 역사책(주로 소설이나 문학)을 발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중, 인상 깊은 인물 7명(정확히는 11명)을 뽑아 인물들의 심정을 생각해보았다. 원래 알던 사람도 있고 새로 알게 된 사람들도 있다. 혹시 아는가. 먼 훗날, 여기 나온 인물들을 가지고 소설을 집필하게 될지(과연 누구를 가지고 쓰게 될까).




정복왕 윌리엄의 콤플렉스

윌리엄은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1세의 외아들이다. 그는 사생아였지만, 아버지 덕에 정식 아들로 인정받았고, 신하들은 그의 앞에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그는 야심이 강한 인물이라 노르망디령(프랑스 소속)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대체 충성을 다하는 신하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를 인정해줘서 고마워했을지, 아니면 별 것 아니란 생각을 했을지. 아무튼, 그는 해럴드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자 해럴드가 자신이 받아야 할 왕위를 가로챘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은 헤이스팅스 전투를 치르고, 윌리엄이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윌리엄에게 반발하는 잉글랜드 귀족들을 상대해야 했다(왕위 얻기가 이렇게 힘들다). 그는 주요 지방 정복 후 귀족들을 무력으로 압박한 후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다. 윌리엄은 왜 잉글랜드의 왕위를 노렸을까? 그리고 왜 모든 사람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을까? 외지인이기 때문에 말이 안 통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어릴 때부터 신하들에게서 떠받들여진 탓에 사람과 타협할 줄 몰랐을 수도 있다. 모든 게 다 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지만 그 와중 사생아라는 콤플렉스가 무의식적으로 깔려있을 수 있다. 훗날, 프랑스어가 잉글랜드 왕실의 공용어로 자리 잡았는데 어쩌면 윌리엄은 노르망디 귀족이라는 신분을 과시해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려 한 게 아닐까?



정략혼의 희생양이 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공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르면서 슐레지엔을 빼앗긴다. 그녀는 프로이센을 경계하기 위해 프랑스(에스파냐, 시칠리아, 나폴리, 파르마 공작령을 통치)와 손을 잡는다. 그녀의 세 딸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 사람들과 결혼하게 된다. 마리아 아말리아는 파르마 공작 페르디난도에게, 카롤리나는 나폴리 가문 페르디난도에게, 안토니아는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훗날 루이 16세)에게 시집을 간다. 어머니 때문에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한 세 딸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말리아는 어머니를 매우 증오했던 것 같다. 어머니에게 편지 한 통 안 쓰고, 자식들에게 어머니 이름도 붙여주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녀의 비참함과 증오심이 짐작된다. 카롤리나는 어머니를 닮은 야심가였다. 사랑 대신 야심을 택한 그녀는 나폴리의 실질적인 지배자 타누치 후작을 실각시키고, 해군 증설, 상업 개혁 등을 추진해서 나폴리를 강국으로 이끌었다. 카롤리나도 어머니를 호의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를 닮아가다니... 이렇게 해야 살아남기 편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안토니아(프랑스 명: 마리 앙투아네트)도 마찬가지로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는 두 언니와 달리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고 자식과 정원 가꾸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처참한 궁핍에 시달리던 국민들과 전쟁 및 사치 비용으로 국고를 탕진한 왕실 덕분에 혁명이 일어났고 그녀는 단두대에서 처형당다. 처형 이유는 아들과의 근친상간. 판결 내용을 듣고 재판 내내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는 죄의 시인을 거부한다. 비록 국민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던 그녀였으나, 자신뿐 아니라 아들에게도 치욕을 안겨준 재판부에 수치심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미 그녀의 처형을 결정되었고, 카롤리나는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후, 카롤리나는 프랑스에 적개심을 품고 평생 프랑스어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의 나폴레옹에게 나폴리 왕국을 빼앗기고 자신의 딸이 혁명을 주도한 오를레앙 집안의 자제와 혼인했으니 얼마나 분할까. 역사는 개인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다.


마리아 아말리아(좌), 마리아 카롤리나(중),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투아네트)(우)(출처: 나무위키)


땅을 지키기 위해 남편을 바꾼 여장부 마르레테(새롭게 알게 된 인물 1)

마르가레테는 아버지에게서 티롤 백작령을 상속받는다. 아버지 하인리히는 딸의 상속을 공고히 하기 위해 보헤미아 국왕/룩셈베르크 백작의 셋째 아들 요한 하인리히와 딸의 혼인을 주선한다. 그는 룩셈 베르크 가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심산이었으나, 요한과 마르가레테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더구나 룩셈베르크 가문은 티롤 지방에서 인기가 없었고 그녀는 이런 분위기를 활용해 남편을 쫓아낸다. 하지만 두 사람의 파혼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편은 룩셈베르크 출신이고 시아버지는 보헤미아의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운 세력 확보를 위해 비텔스바흐 출신 루트비히와 다시 혼인한다. 결국 룩셈베르크 가문과 비텔스바흐 가문의 격돌하고, 마르가레테와 루트비히는 전쟁에 승리하지만, 교황의 파문이 철회되지 않은 상태여서 교회에서 세례나 미사 등 성무를 할 수 없었다. 중세시대에 성무를 하지 못하는 것은 크나큰 치욕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자연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마르가레테 부부의 탓으로 돌렸다. 기껏 승리했는데 평화는 찾아오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재혼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스스로 혼인 상대를 고를 수 없는 현실에 한탄했을까. 그래도 자식을 오스트리아의 자녀와 혼인시켜서 어찌어찌 파문을 처리했는데 남편과 아들이 죽었다. 그러나 그녀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당시 여성은 남자 가족이 있어야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남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를 후계자로 삼은 뒤, 루돌프 4세 동생이었던 알브레히트 3세가 슈테판 2세와 협정을 체결하면서 티롤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영지로 남았다. 자신의 상속을 확고히 한 마르가레테. 한이 풀렸던 것일까. 그녀는 다음 달 빈에서 사망한다. 겉으로 볼 때는 적들에게서 영지를 지킨 여장부였던 마르가레테. 그러나 능수능란한 처세술과 강인한 의지 속에는 가족들이 죽어도 슬퍼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혼인하지 못했던, 그럼에도 슬픔을 티 내지 못했던 그녀의 비극적인 심정도 느껴진다.



나폴레옹의 정적 베르나도트, 스웨덴의 왕이 되다(새롭게 알게 된 인물 2)

스웨덴에서 칼 13세가 죽은 후, 스웨덴 의회에서 왕위 계승 문제가 논의되었다(스웨덴은 신권이 강한 나라여서 의회의 입김이 강하다). 이때 프랑스의 육군 원수, 베르나도트를 왕위 계승자로 선출하자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하노버와 헤센 지방에서 총독으로 있으면서 한자 동맹을 활성화하고 그 지역의 경제를 발전시켰고, 뤼베크에서 스웨덴 포로들을 호의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웨덴 사람들은 스웨덴의 적들을 타개했던 군인 출신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베르나도트를 구스타브의 화신으로 여겼던 것 같다. 베르나도트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그는 뛰어난 검술 솜씨와 화려한 언변으로 프랑스 대혁명 때 육군 장교의 지위에 올랐다. 프랑스에서는 귀족이 아니면 장교에 오를 수 없었지만, 시대적 상황을 이용해 신분의 벽을 깼다. 그는 나폴레옹의 인척이면서 정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베르나도트가 나폴레옹을 황제로 인정했으나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사실 공화정을 추구했던 장교들 때문이기도 한데... 이리해도 욕먹고 저리 해도 욕먹는다). 초반에는 스웨덴의 여론을 모르고 군인으로 살기 바랐던 베르나도트.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적 베르나도트가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자신의 양아들 외젠을 스웨덴 왕위 계승 후보자로 추천했다. 스웨덴에서는 외젠을 거부했다. 자칫하다가 나폴레옹 제국에 편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베르나도트의 즉위를 허락한 나폴레옹. 베르나도트가 선거 운동을 시작하자 스웨덴 의회는 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베르나도트는 칼 요한으로 개명하고 스웨덴에서 칼 14세로 즉위했다. 이후 나폴레옹과의 관계를 끊고 철저히 스웨덴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 이 모습을 보고 프랑스 국민들은 배신감을 느꼈으나 스웨덴은 환영했다. 충실하게 자신의 조국에 충성을 다한 인물 베르나도트. 군인으로서 프랑스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 한 순간에 스웨덴에게 충성하기는 어려웠을 텐데... 단순히 국왕으로서 책무를 다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정적으로 여겼던 나폴레옹에게 반감을 느꼈던 것일까? 궁금해진다.


칼 14세 요한(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찰스 1세, 의회에 의해 처형당한 최초의 국왕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왕위에 오른다. 메리 스튜어트와 헨리 스튜어트의 아들이었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망명했던 탓일까. 어린 시절부터 애정을 갈구했고, 총신들과 성적인 관계까지 가졌다. 그래도 안정적으로 아들 찰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아버지처럼 자신의 통치권을 강하게 주장한 찰스 1세는 사사건건 의회와의 대립한다. 제임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면서 자신만의 종교 정책을 강요했는데, 이를 보고 자란 찰스 1세도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이다. 찰스 1세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정확한 사료는 없지만, 내 생각에 찰스 1세도 사랑을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애정결핍은 대물림된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식을 사랑할 줄 모른다.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랬을 텐데 잉글랜드 의회든, 스코틀랜드 사람들이든 다들 자신의 정책에 반기만 들어서 자신만의 아집이 강해졌을 수도 있다. 아무튼 찰스 1세의 실책에 실망한 의회는 왕에게 반기를 들었고, 잉글랜드는 왕당파와 의회파로 나뉘어서 내전을 치른다. 의회파의 승리로 끝나고 찰스 1세는 처형을 당한다. 찰스 1세는 처형당하기 직전 자식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을 용서하라'.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비록 나라를 내란으로 몰아갔지만 죽음 직전 왕의 의연한 모습에 동정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 자식들을 만났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자식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었을까? 사랑을 주었든 안 주었든 자식을 남기고 먼저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못했던 것 같다.


찰스 1세(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페드루 1세의 즉위와 몰락(새롭게 알게 된 인물 3)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침공했을 때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피난을 간다. 포르투갈 국민은 왕이 나라를 버렸다는 사실에 반발했으나, 브라질 국민들은 환영했다. 포르투갈 왕실 가족들이 브라질로 오면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아니라 포르투갈 군주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이 되었고, 여러 정책들을 브라질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포르투갈에서 왕의 귀환을 촉구하는 혁명이 일어나자 국왕 주앙 6세는 후계자 페드루를 남겨 놓고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주앙 6세는 페드루에게 포르투갈로 귀환하라고 연락했으나 브라질 국민들은 페드루가 남기를 바랐다. 페드루는 브라질 제국을 선포하고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브라질 출신 국민들과 포르투갈에서 이주한 국민들 사이의 내분이 일어난다. 이 와중, 페드루 1세의 측근과 주위 상인들은 모두 포르투갈 출신이서 브라질 사람들과 마찰이 일어났다. 결국 중앙 정부에 반대하는 반란 일어났고 반란군을 강력하게 처벌하는 페드루 1세. 하지만 반란은 더 심해지기만 했다. 무역이 끊기고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국민들의 생활은 더 궁핍해지고, 페드루 1세의 인기는 점차 시들해졌다. 이 모습을 보면서 페드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후회할까? '처음에는 좋았는데... 국민들이 나보고 여기 남아달라 해서 남았는데...' 하면서. 아니면 과거의 인기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하지만 국민들은 그의 심정을 이해해주지 못했다. 그가 황후를 냉대하고 정부를 총애하자 그의 인기는 갈수록 추락했다. 결국 황후가 아이를 유산하고 사망하자 공개적으로 황제를 비난하는 브라질 국민. 이때 페드루는 주앙 6세가 포르투갈에서 사망하고 왕위를 이어받아야 했다. 고심 끝에, 그는 자신의 딸에게 왕위를 잇도록 하고 브라질에 남았다(그래도 브라질을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던 것일까. 환대받았던 과거를 그리워한 걸까). 그는 다시 브라질에서 정책을 펼치려 하지만 시대는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7월 혁명 발생했다. 황제의 측근들은 도리어 페드루 1세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행사를 가지려 했을 뿐 아니라 내각을 마음대로 개편하려 했다. 마침내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고위 장교들까지 등을 돌려 이에 가담했다. 페드루 1세는 5살짜리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망명한다(측근들 책임이 크지만 측근들에게 휘둘린 페드루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마냥 그를 동정하기는 어렵다. 나는 왕이 아니라 국민이니까, 국민들의 처참한 생활도 이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동생들을 물리치고 황위에 오른 쿠람

인도 무굴제국의 3대 황제 아크바르는 살림을 비롯한 향락에 빠진 아들들에게 실망하고, 손자 쿠람과 쿠스람을 더 총애한다. 아들들이 향락에 빠진 이유는 아크바르가 아들들에게 큰 권한을 주지 않았고 할 일이 없어 무력해진 탓이었다. 손자들만 총애했던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던 탓일까. 살림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황실 여성들의 중재로 화해했으나, 아크바르가 사망하고 살림이 자한기르로 즉위한 후 아들들과의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처음에는 아들 쿠람을 총애하는 자한기르. 그러나 자한기르는 어릴 때부터 향락에 빠져 산 탓에 알코올 중독에 걸린 탓에 종종 의식을 잃었고, 이를 틈타 그의 총애를 받던 황후 누르자한 집안이 권력을 장악했다. 누르자한의 견제를 피해 쿠람은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마할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유랑했다. 누르자한은 자신을 잘 따르는 자한기르의 막내아들 샤르야를 후계자로 정했다. 이 소식을 듣고 아버지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생각한 쿠람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쿠람과 그의 가족들은 자한기르의 추격을 피해 이곳저곳을 도망쳤다. 결국 유랑생활에 지치고 아들들이 죽자 쿠람은 자한기르에게 용서를 구했다. 자한기르는 쿠람을 용서했으나 쿠람의 세력 하에 있던 요새를 내놓으라,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라 명령했고 쿠람은 자포자기해버린다. 황위는 기대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한기르가 사망하고 누르자한의 권력도 사라지면서 쿠람은 다시 기회를 얻는다. 누르자한의 오빠 아사프칸은 재빨리 쿠람 편에 선다(권력 앞에 가족도 없다). 샤르야는 아사프칸에게 군대를 이끌고 대항했으나, 전장 경험이 없었던 샤르야는 아사프칸에게 패배한다. 쿠람에게 귀띔하는 아사프칸. 이를 듣고 쿠람은 아사프칸에게 은밀히 이복동생과 조카들을 죽이라고 했고, 아사프칸은 명령을 이행했다. 쿠람은 무굴제국의 5대 왕으로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타지마할로 유명한 샤자한이다.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의 모습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비록 다른 나라의 역사이지만 우리나라의 역사와 닮은 모습(부모의 강요에 의해 정략결혼하는 여인/권력을 놓고 대립하는 부자/시대에 휩쓸려 처형당하거나 망명한 왕들/왕권과 신권의 대립 등)이 종종 보였고, 이를 통해 군주, 아니 한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의 도리와 지나치게 자신의 의견을 고수해서도 안 되고 측근들에게 휘둘려서도 안 되고 정세에 따라 유연적으로 통치해야 하는 그들의 고뇌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희미해져 가던 서양사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준 작품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바로 장미전쟁(잉글랜드의 수양대군과 단종이라 불리는 리처드 3세와 에드워드 5세, 리처드 3세의 또 다른 적수 헨리 7세의 권력 다툼)이 이 없다는 점이다. 너무 유명해서 빠진 걸까. 아니면 백년전쟁과 너무 가까운 시기였기 때문일까. 그래도 페드루 1세, 마르가레테, 베르나도트 같이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내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이 작품 덕분에 서양사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치밀하고 방대하게 자료조사를 한 뒤(외국 논문도 수두룩한 걸로 보아 작가님께서는 영어도 잘하시는 것 같다) 깔끔한 필체로 정리해주신 엘아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참고도서>

정유경, <왕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시공사, 2017.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697958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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