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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Mar 21. 2021

행운의 여신은 언제 만날 수 있을까

김고명,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에이전시에서 샘플 테스트를 치른 후,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처음에는 잘 번역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스터디(당연히 다른 글이다. 카페에서 올리는 글로 공부한다)를 한 뒤, 또 오역이 하나 발견됐기 때문이다. 대명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못 파악했다. 문장에 매몰된 탓에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내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됐나.' '에이전시에서 번역한 것도 어떤 수준일지 뻔해.' 내 머릿속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해졌다. 그래서 잠시 쉬어가기 위해 브런치로 들어왔다(스트레스를 받으면 브런치에서 쉰다). 어느덧 70~80개씩 라이킷을 받고, 구독자 수도 90명을 넘긴 것을 보니 뿌듯하고 제 노력을 알아주신 작가님들께 정말 감사하다. 하지만 자화자찬했다가는 나태해지기 십상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해야 브런치에 더 알찬 글을 남길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분명 에세이라고 쓰고 있는데, 막상 일상 에세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정보 전달 글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얄팍하고...) 글맛(본명: 김고명)님의 책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를 읽었다. 그러나 완독 한 후, 현재 본인 상태를 점검하게 해 주는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리포터만 읽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중학생 때 원서에 빠진 적이 있었다. 중간고사를 끝내고 연합고사만을 남겨두었을 때, 고등학교 때 못해볼 일을 하자고, 이왕이면 잘난 척 한 번 해보자고 생각하며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집어 들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구어체가 남발했으나, 이때 이미 컴퓨터만 있으면 다 되는 시대에 진입했기 때문에 컴퓨터로 검색해가며 마법사의 돌은 물론 비밀의 방까지 단숨에 완독 했다(아즈카반부터는 영화로 봤다. 원서를 완독 하니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


중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감에 차오른 채 번역을 시작했다. 한겨레에서 강의를 수강한 후 카페에서 주는 원고를 번역했는데, 이럴 수가. 오역이 수두룩했다. 나무 따로, 숲 따로 놀고 있었다. 나무와 숲을 연결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게 말이 쉽지. 다시 쉬운 책을 도전했다. 드라마 별그대에서 나온 책,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이었다. 다행히 큰 오역 없이 잘 읽어 내려갔다. 이때 얻은 자신감(자만심 말고!)을 토대로, 기획할 책을 훑으며 영어 독해력 키워 나갔다. 먼저, 사전 없이 빠르게 훑은 후(이해 안 되면 사전을 조금씩 찾았다), 번역할 때 자세히 읽으며 전체 맥락을 다시 파악했다. 한국어 책도 보았는데, 분야는 역사와 역사가 아닌 분야로 나뉘었다. 후자의 경우, 씽큐베이션(체인지그라운드에서 운영하는 카페)을 통해 알게 된 책을 읽었는데, 전부 역서였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역서를 통해 번역을 하려면 얼마나 자연스럽게 내용이 흘러가는지, 얼마나 유창하게 문장을 구사하는지  수 있었다(그나저나 글맛님이 언급하신 <어린 왕자>는 아직 원서로 안 읽었다. 언제 읽을지 고민해보자).



레벨 4 정도의 글을 쓰고 있나

책에 따르면, 번역은 읽기와 쓰기가 결합된 행위이다. 그러므로 번역가는 글을 잘 써야 한다. 필력을 높이기 위해 블로그를 시작한 지 1년, 브런치는 1개월 반 정도 되었다. 저자는 주로 마인드맵을 활용한다고 했지만, 나의 경우에는 마인드맵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번역할 때는 출력된 원고에, 서평 쓸 때는 책에 메모를 하거나 밑줄을 그은 후(도서관 책은 포스트잇을 붙이고 거기에 메모한다), 서론-본론-결론을 잡아서 글을 쓴다. 즉, 메모하는 습관을 통해 아이디어를 잡은 후 계획을 세워서 글을 쓰고 있다. 레벨 4 정도의 글이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 브런치 작가 심사를 한 번에 통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독특하고 일관된 소재(역사를 좋아하는 번역가 지망생) 덕분이지, 필력 덕분인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굳이 숫자로 말하면 3 정도? 이렇게 말하고 보니, 마인드맵을 아예 안 써도 될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단, 내 글에는 메시지가 없다. 매일 도전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게 일상이 되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점점 비슷해지는 글을 보며, 어떻게 쓸지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이 책을 읽었는데 돌아오는 건 반성을 가장한 자책뿐이다. (그래도 반성은 중요하다. 그래야 레벨 3에서 4까지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필사를 우습게 여겨선 안 되는데...

책에 따르면, 번역은 연기이다. 번역은 연기처럼, 나라는 껍데기 안에 캐릭터의 개성을 주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 소설, 특히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필사했다. 딱딱하고 건조한 문장을 부드럽게 다듬기 위해, 남성적인 느낌을 완화하기 위해서였다. 즉, 번역하는 책과 비슷한 성격의 국내 작가 책을 찾아서 필사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역서를 한 권 맡았을 때 필사할지, 아니면 기획 단계에서 할지, 샘플 테스트 때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루에 15분 필사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냥 하면 되잖아!'라는 말이 나올지 모른다. 왜 이런 고민을 하냐면, 난 이미 하루에 15~30분씩 필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이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서. 그러다 보니, 집필하는 소설 장르 때문인지, 필사하는 책은 대부분 사극이나 역사소설이다. 번역할 때도 주로 고전소설을 기획하지만 예상치 못한 기회가 왔을 때 문체를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고민된다. 다른 분야의 책은 읽고 서평 쓰는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하나?(그나저나 작가님은 여성이 감성적이라고 했는데... 난 작가님이 말한 '여성'에 포함되지 않나 보다. 책 한 권 읽을 때 눈물 하나 흘리기 왜 이리 어려운지. 등장인물 감정에 이입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큰일이다).



에드워드와 캐서린이 남매에서 연인이 된 이유

저자는 추석 때 겪었던 돌발 상황을 말해준다. 저자 부부는 고속도로를 타고 있었다. 휴게소에 들러 아이에게 분유를 먹일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가도 휴게소가 보이지 않았다. 내비게이션만 믿고 경로 확인 없이 무작정 국도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처럼, 미리 경로를 확인하지 않으면,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어렵다. 번역도 마찬가지이다. 번역을 시작하기 전에 책의 주제 의식, 논조, 문체, 키워드 등을 파악하면 완성도 있는 번역이 가능하다. 문체를 완곡하게 잡을지, 강하게 잡을지, 반말로 할지, 존댓말로 할지 결정할 수도 있다.

존댓말이라고 하니, <The Incredible Honeymoon>을 번역했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원서를 읽지 않고 번역했다. 그때는 남녀주가 반말을 썼다. 21살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대학생 정도라 생각했고, 아직 연인이 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서를 완독 한 후 존댓말로 바꾸었다. 바로, 캐서린을 짝사랑한 남자 슐츠 때문이다. 에드워드가 캐서린을 아지트에 데려다 놓은 후, 슐츠는 캐서린을 턴브릿지 웰즈까지 데려다준다. 뒤늦게 캐서린을 찾아온 에드워드는 슐츠에게 캐서린을 누이동생이라고 알려준다(일단 캐서린을 데려다준 사람이니 예의를 차려야지). 그러나 뒷부분에서, 슐츠는 이미 두 사람이 연인 사이임을 눈치챘다고 나온다.


<번역으로 펼쳐지는 기상천외한 가짜결혼> 편에서 남자와 여자의 사진이 기억나는가? 캡션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픽사베이에 남매라고 검색하면 아이들만 나온다고. 그러니까 슐츠가 두 사람을 연인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두 사람을 어른이라는 증거다. 그래서 존댓말로 바꾸었다. 게다가 20세기라고 생각하면, 21살은 이미 결혼을 앞둔 어른이다(정확히는 동심을 유지한 어른아이). 아무리 어른아이여도 한두 번밖에 안 만난 사이인데, 대놓고 반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구어체를 연습하려면?

내 번역문을 가족들에게 읽힌 적이 있다. 문어체 같다, 딱딱하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10년 넘게 번역했던 현직 번역가분은 내 고민을 단숨에 알아주셨다. 텔레비전 많이 보라고 권하면서. 저자는 예능이나 영화를 보면서 구어체를 공부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second-fiddle husband'라는 단어가 있다. 부인보다 경제력이 떨어지거나 부인에게 생계에 의존해 사는 남편을 의미한다. 직역하면, '제2바이올린 연주자 남편', 의역하면 '조연 남편'이지만, 저자는 <무한도전>에서 박명수 씨가 자주 하던 말을 떠올렸다. 바로, '2인자'. 저자는 '2인자 남편'이라고 번역했다. 이처럼 예능에서의 말장난이 번역할 때 도움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내 글이 딱딱한 이유가 예능이나 TV를 거의 안 본 탓일지도 모르겠다(내가 보는 건 사극... 그것도 한 두 개만 골라서 보는 편이다).


저자는 영화도 종종 본다고 하며, 예를 하나 든다. <모범시민>에 "You manipulated me!"라는 대사가 나온다. 직역하면, '넌 날 교묘하게 이용했어!'이지만, 자막은 '넌 날 가지고 놀았어!'이다. 원문의 어감을 살린 번역이었다. 번역가는 읽기만 잘해서 될 직업이 아니다. 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하지만 영상물의 자막을 그대로 번역물에 가져다 쓰는 것은 금물. 자막도 엄연히 번역가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미드 한 편 보려 했는데 갑자기 의욕이 사라졌다.)



행운의 여신은 뒤통수가 대머리라고? 정말?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는 학벌도, 스펙도 변변찮은 사람이 번역가로 데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나와 비슷한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느끼게 해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저자의 경우, 2007년 바른번역에서 강의를 수료하고 2008년에 선생님의 추천으로 일감을 받았기 때문에 보다 빠른 시기에 번역가로 데뷔한 케이스다(요즈음은 경쟁률이 세져서 강의를 모두 수료해도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은 이상 일감을 얻기 힘들다. 신입들을 위한 공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알찬 글을 쓸지에 대해서는 좋은 아이디어를 얻지 못했다. 다만, 현직 번역가의 조언 덕분에 나를 점검할 기회뿐 아니라 용기까지 얻을 수 있었다. 저자는 대학원 시절 교수님의 명언을 하나 알려준다. "행운의 여신은 뒤통수가 대머리다. 그래서 나한테 달려올 때는 확 잡을 수 있지만 이미 지나가고 난 후에는 잡고 싶어도 잡을 머리가 없지."


기회가 오긴 했다. 몇 달 전에 이력서를 낸 에이전시에서 샘플 테스트를 제안받았다. 하지만 내가 샘플 테스트에 붙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시험을 치른 후, '그나마 출판계에서는 실력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실력을 키워야 한다. 실력이 없으면 기회가 주어져도 놓치기 십상이다. 행운의 여신은 뒤통수가 대머리이다.



<참고도서>

김고명,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해보고 싶습니다>, 좋은습관연구소, 2020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325787


<관련 포스트>

https://brunch.co.kr/@f635a2b84449453/23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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