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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Mar 24. 2021

1930년대 경성을 꽃피운 사랑이야기

이철,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2020년 5월, 소설 <경성탐정록>을 읽었다. 셜록홈즈를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버전으로 각색한 소설로, 유학생, 양반가의 자제, 상인, 신여성, 부랑자 등 다양한 인간의 군상이 나왔다. 5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주인공이 고정되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피카레스크식 소설), 그중 광화사 편에서 신여성의 모습과 그녀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잠깐 나온다(스포 될까 봐 여기까지). 당시 신여성, 소위 모던 걸이나 모던 보이들은 잘난 부모 밑에서 편히 살던 방탕아로 인식되었다. 특히, 여성의 경우 '미적 대상', '남자에 종속된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여성이 배운다'는 생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기생이나 부자의 첩 정도가 그녀들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이었다. 실제로  <근대의 책 읽기>에 따르면, 1930년을 기준으로 한글과 일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여성은 1.9%, 한글 또는 일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여성은 10.5%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10% 내외의 여성들 덕분에 여성에게도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자유롭게 연애할 권리가 주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연애를 했을까? 100년 전 구시대적인 사상에 맞서기 위해 이들은 어떤 도발을 했을까? 이들이 주도하기도 하고, 끌려가기도 했던 일제 강점기의 연애 사건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을 펼쳤다.


1930년대 경성의 풍경(출처: 핀터레스트)



조선 최초의 로미오와 줄리엣, 장병천과 강명화

강명화는 빈농의 딸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평양 기생의 수양딸이 되었다. 그녀는 경성으로 올라간 후 영업하기 시작했고, 절세의 미기라는 극찬을 받으며 남성들의 구애를 받았다. 명월관의 송별연 자리에서 백만장자 장길상의 아들 장병천을 만났고,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한다. 유학을 가려던 장병천은 유학을 포기하고 강명화와 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장길상은 두 사람의 연애를 반대했고, 강명화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기생 생활을 중단해야 했던 강명화는 장길상 앞에 떳떳하게 나서기 위해 장병천과 같이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면 그나마 장길상이 그녀를 받아들여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학을 가니, 조선인 유학생들이 그들에게 폭언하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백만장자의 자식이 기생첩을 거느리고 편히 산다면서. 어쩔 수 없이 경성으로 돌아온 두 사람. 강명화는 장길상을 찾아가지만 문전박대를 당한다. 돈도 바닥나고 세간의 비난 때문에 버티지 못한 강명화는 장병천의 품에서 음독자살을 택했다. 장병천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넉 달 뒤, 강명화를 따라 음독자살을 한다.


두 사람이 죽은 후, 언론계는 '비련의 주인공'으로 미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춰 출판계에서도 <강명화전>, <강명화 실기> 등 이들의 연애사를 다룬 책을 출간하기 시작하고 3,4쇄를 찍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영화계에서는 <비련의 곡>이란 영화를 상영하였다. 살아있을 때는 욕을 하더니 죽고 나서야 이들을 미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교를 중시하던 조선시대에는 부자, 군신, 부부, 장유 간 도리를 바탕으로 한 개인 간의 우정만 나타났었다. 남녀 간 관계에서는 중매결혼이 대세였고, 결혼 후에는 부부간 유별을 중시했다. 하지만 서양 문물의 교육을 받은 모던 걸, 모던 보이들은 '남녀가 직접 만나 결혼하는 관계'를 꿈꾸며 구시대적 사상에 맞서려 했으나 견고한 편견 탓에 좌절하고 자살을 했다. 이후, 연애에 대한 젊은이들의 열정이 뜨거워져서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풍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서로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다, 나혜석과 김우영

참판 집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일본 유학 중, 엘렌 케이의 자유연애, 자유 이혼론을 받아들였다. 엘렌 케이의 사상에 따르면, 참된 연애란 두 남녀의 몸과 마음이 합치되는 것, 즉 몸도 마음도 서로가 서로에게 끌려야 진정한 연애였다. 나혜석은 최승구와 사랑을 나누었으나 최승구는 병으로 일찍 죽는다. 그 와중, 나혜석 오빠의 친구 김우영이 나혜석에게 끊임없이 구애하였다. 그러나 나혜석은 예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김우영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의 강권에 못 이겨(예술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김우영과 결혼했다. 이때 그녀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할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할 것'. 나혜석에게 흠뻑 빠진 김우영은 이 조건을 모두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으로 유럽에 왔으나, 나혜석은 최린과 사랑에 빠져 첫날밤을 치렀다. 파리 유학생들 사이에서 나혜석과 최린의 염문설이 떠돌았고, 이에 분개한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했다. 강압 아닌 강압 때문에 나혜석은 이혼 도장을 찍는데, 문제는 김우영도 신정숙이라는 여성과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쌍 바람을 피운 두 사람은 이후 상반된 길을 걷는다. 김우영은 재혼 후 전라남도청 상공과장으로 재직하면서 행복하게 살지만, 다시 화가로 살려고 했던 나혜석은 좀처럼 일이 풀리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몸에 축적되었고 화재로 인해 그림이 소실되어 충격받아 병에 걸렸다.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강의를 하려 하지만, 학생들은 나혜석의 강의를 배우러 오지 않는다. 여성, 특히 이혼녀에 대한 관습 때문에 피해 입었다고 생각한 나혜석은 최린에게 정조 유린에 대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한다. 당시 친일파 거두였던 최린은 자신의 평판 때문에 몇 천 원의 돈을 주고 나혜석더러 소송을 취하하게 했다. 이때 그녀는 '정조는 취미다'라는 글을 써서 봉건적인 조선 사회에 저항했으나, 중일전쟁, 조선 내에서의 파쇼 통치 강화, 장기화되는 불황 등 당시 혼란스러운 사회상 때문에 나혜석의 발언은 머지않아 잊힌다. 이후 그녀는 고독과 가난 속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1948년 길 위에서 사망한다.  


사실, 나혜석이 말년에 가난해진 이유는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만은 아니다. 신사 참배. 내선일체, 창씨개명 거부 등 일제에 맞선 행동의 영향이 더 클 것이다. 당시 규모 있는 미술전은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반면 중추원 참의였던 김우영은 일본 밑에서 안락하게 살았다. 하지만 사실 1930년대에는 여성에게 더 가혹한 사회적 잣대가 요구되었다. 남성은 첩을 여럿 두어도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나, 여성에게는 정조가 강요되었다. 그래서 나혜석은 무분별한 사대주의자(서양에서는 외도가 진보로 받아들여짐)로 비난받기도 했다. 아마 나혜석이 최린과 바람을 피우고도 떳떳했던 이유는 김우영의 바람기 탓도 있지만, 당시 사회상에 저항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 같기도 하다.


나혜석(좌), 김우영(우) 부부의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여자를 사랑한 여자, 홍옥임과 김용주

홍옥임과 김용주는 동덕여고보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김용주는 아버지의 강요로 중학생이었던 심종익에게 시집을 가면서 학교를 중퇴한다. 기혼자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현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남편 때문에 머지않아 좌절한다. 홍옥임은 이화여고보로 전학하고 공부할 방을 따로 마련해줄 정도로 아버지는 그녀를 많이 아껴주었다. 그러나 홍옥임은 아버지의 외도로 충격을 받고, 남성을 경멸하게 된다(아버지도 어쩔 수 없구나). 남성들에게 질린 두 사람은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는다. 우정을 넘어 애정을 느끼는 두 사람. 하지만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철로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세간에서는 동성애자들의 정사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규정만 했을 뿐, 동성애에 대한 비난이나 조소는 거의 없었다. 집안에서는 두 사람이 사랑하는 관계였음을 생각해 거리낌 없이 함께 화장까지 했고, 이광수의 부인 허영숙도 세 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사실, 여학교나 기숙사에서 사랑을 거리낌 없이 나눈 여학생들이 태반이었다. 주위에 여학생들밖에 없고,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아도 어릴 때는 내외를 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프로이트의 이론과 서양 의학의 영향으로 동성애를 병적 상태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그런데도 여성들 간의 동성애는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결혼식까지 올린 여성 동성애자도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 남편, 남자 형제에게 의지하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연스레 같은 여성에게 의지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모함인가? 구여성의 저항이었나? 남편을 독살한 여자, 김정필

1924년, 김정필은 남편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유명해진 이유는 김정필이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방청하러 법원으로 몰려온 사람들 때문에 재판부는 시끌시끌했고 재판이 연기되자, 각양각색의 투서가 날아왔다. '김정필은 무고하다.' '그녀가 독살했으니 사형해라.' '투서자들 모두 사형에 처하라.' 등. 특히, 마지막 투서의 경우, 강우규 의사가 사형당할 때는 투서 한 장 보내지 않아 놓고서 남편 독살한 여자에게는 투서를 보내니 참 우습다며 현실을 꼬집고 있었다. 당연히 재판부에서는 투서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판이 재개되었으나 불리한 증언들이 이어졌고, 해부 결과 증언과 일치하면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조선인 변호사의 열렬한 변호도 소용이 없었다. 김정필은 억울하니 상고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상고장을 제출하지 않았고 결국 수감 생활을 한다. 12년 후, 김정필은 가출옥으로 출소했으나 그녀는 끝내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녀가 살해했는지 모함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1920~30년대에는 신문에 실리기만 하면 무조건 미인이 되었다. 살인해도 미인, 독립운동해도 미인, 자살해도 미인으로 신문에 실렸다. 신문 구독자 대다수인 남성들의 감각을 자극해 구독자를 늘리려는 언론 때문이었다. 둘째, 김정필이 살인한 게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구여성도 자유연애와 낭만적 결혼을 꿈꾸었다. 모던 걸, 모던 보이들 사이에서는 자유연애와 낭만적 결혼 열풍이 불었으나 구여성의 삶은 여전히 비참했다. 12, 13세 등 어린 나이에 강제로 시집가서, 남편이 첩을 두고 살아도, 술과 노름에 빠져 살아도 참아야 했다(일제시대 총독부와 지주들의 가혹한 착취로 인해 당시 농민들은 술, 노름, 금광 등에 쉽게 빠져들었다). 심지어 아내를 팔아넘기는 남편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는 중이었고, 구여성들도 자유연애, 결혼을 꿈꾸었다. 하지만 사회의 장벽은 너무나 견고했다. 이혼하고 싶어도 사실상 이혼할 수 없었고, 어찌어찌 이혼하더라도 평생 비인간적으로 살게 되었다. 결국 가정과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을 살해하는 여인이 생겨났다. 수법은 주로 음독. 힘을 쓰지 않고도 살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1930년대에 수감된 살인범 100명 중 47명이 여성이었고 그중 31명은 남편 살해죄였을 정도로, 남편 살해는 흔한 범죄였다.



세 번의 결혼을 한 붉은 연애의 투사, 허정숙

허정숙은 중국으로 유학 가던 중 임원근을 만났다. 임원근의 소개로 사회주의연구소에서 박헌영, 김단야와 함께 같이 사회주의를 공부하게 된 허정숙. 그러나 제1차 조선공산당 탄압 사건 때 임원근은 반일 운동 혐의로 체포되었다. 남은 공산당원들끼리 제2차 조선공산당을 모의하던 중 허정숙은 송봉우와 연애하고 있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분파 간의 대립이 있었는데, 송봉우와 임원근은 다른 분파 소속이었고, 당원들은 허정숙을 배신자로 몰아갔다. 그러나 송봉우도 구속되면서 허정숙은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 떠나는 허정숙은 미국의 사회상과 여성 운동을 연구하였다. 출소한 임원근은 아내가 떠났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 다른 여성과 재혼하였다. 이후, 사회주의 운동을 포기하고 상인으로 변신했는데 아마 허정숙의 배신 때문인 것 같다. 한편 허정숙은 귀국 후 출소한 송봉우와 거리낌 없이 연애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남성 편력을 대놓고 조롱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민족 변호사로 존경받는 허헌이었고, 허정숙도 동아일보에 다닐 때 월급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치고 여성인권운동 및 사회주의 공부를 한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다. 대신 '붉은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조선의 콜론타이'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연애는 개인의 일, 매력을 느끼면 육체적 결합은 자유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송봉우하고도 머지않아 헤어진다. 송봉우가 남경군관학교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그는 출소한 후 감옥에서의 끔찍한 고통 때문에 전향을 선택했다. 그녀는 조국의 독립과 혁명을 버린 사람과 사랑할 수 없다며 송봉우와 결별했다. 이후, 최창익이라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와 함께 옌안 등지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전개하다가, 1945년 조국의 독립을 맞아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최창익이 새로운 여성과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흔쾌히 이혼했다. 싸움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허정숙은 이혼 후에도 전남편과 다른 여성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할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악소문이 떠돌았다. '일곱 번을 결혼했다.' '최창익이 임원근의 가명이다.' 등(독립 운동가들의 여성관도 당시 조선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악소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북조선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거쳐 북한에 정권이 수립된 이후 내각 관료인 문화선전상에 취임하였다. 녀에게 잠시 고비가 찾아오니 바로 최창익 때문이었다. 최창익은 1956년 김일성 개인 우상 숭배를 비판하며 반김일성 투쟁을 벌였다. 김일성은 1958년 조선노동자 대표 회의에서 거짓 증인을 내세워 최창익을 비판하게 했는데, 그중 한 명 허정숙이었다. 최창익은 쿠데타 기도 혐의로 체포된 뒤 소식이 끊겼고, 허정숙은 몇 년 간 공백을 거친 후 북한 내 최고위층으로 자리 잡고 1991년 아흔 살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악소문에 시달렸어도 그녀가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독립운동가로서의 명망과 명석한 머리, 정세를 바라보던 눈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제시대에는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로,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김일성에게 충성하며 살아남았고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북한 내 최고위층으로 자리 잡았다. 실력이 좋으면 사생활쯤은 용이된 걸까.


남북연석회의에 축사를 낭독하는 허정숙, 1948.04.05(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한 때 간통죄 폐지 문제로 시끌시끌했던 적이 있다. 불륜이 도덕의 문제인지, 법의 문제인지 논란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때 첩을 거느린 남자들, 정조가 취미라고 외친 나혜석처럼 바람은 단순히 사생활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면 법으로 제재해서라도 막아야 할 범죄일까? 사실, 후자 쪽이긴 한데... 내가 미혼이라 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기혼자분들은 불륜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는 것조차 내가 먹고살만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제 강점기 시절, 자유연애는 소수 부유계층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농민들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들의 연애 놀음을 듣지도 못하고 들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먹고 살기 빠듯한 농민들에게 연애란 남의 일이었을 테니까. 비록 입소문을 타고 몇 달, 몇 년 후에 전해 들었을 수는 있어도 자유롭게 연애해서 결혼할 권리는 이들에게 구름 위의 떡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구여성들도 연애하고자 하는 욕망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고, 이러한 욕망이 뒤틀려 남편 살해 같은 극단적인 일까지 벌인 게 아닐까. 비록 살인을 용인할 수는 없어도 자유연애를 위해 몸을 던진 사람들, 정조를 부정한 여인들 덕에 현재의 연애관이 성립되었다고 생각한다(뒤집어보면 돈이 있어야 연애할 수 있다는 뜻이다). 비록 현재 관점으로 이해가 안 가긴 해도, 현재의 연애관과 비슷하면서 닮은 점이 있다. 그러니 그 시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절절한 사랑과 사랑했기에 느낀 아픔을 들여다보자.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참고도서>

이철,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다산초당, 2008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601325

천정환, <근대의 책 읽기>, 푸른역사, 2014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135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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