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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ul 04. 2021

내...너를 지키리라 맹세했거늘..

청나라 제11대 황제 덕종 광서제의 여인: 각순황귀비 타타랍씨(중국)

사실 중국 청나라 시대 인물을 하려고 했는데 누구로 할지 고민했습니다. 청 태종의 여인 해란주와 청 덕종의 여인 진비 중에서요. 그러다가 진비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소헌왕후와 마황후가 개국 초창기 때 왕비였으니, 이번에는 나라가 몰락할 때의 여인을 다루고 싶거든요. 하지만 홍타이지와 해란주도 매력적인 인물이라, 나중에 다시 <왕을 지킨 여자들>을 연재할 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글 한 편 쓰는데 짧으면 3시간, 길면 6시간이 걸려서, 많이 쓰지 못하거든요. 청나라 말기는 이미 많이 공부했다고 생각해서 쉽게 도전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난해하고 진도가 안 빠졌습니다. 그래도 쓰다 보니 매력적인 인물인 것 같아 계속 진행했습니다. 다 쓰고 나니 뿌듯하면서 애틋하네요. 아무튼,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쓴 뒤 브런치북을 발간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런치북은 내일쯤 나올 것 같아요. 아무쪼록 이번에도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원래 황제가 될 수 없었으나

진비를 설명하기 전에, 진비를 총애했던 황제 덕종 광서제를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광서제가 진비를 맞아들일 때쯤, 광서제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면 왜 광서제가 진비를 총애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거든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1871년 8월 14일, 광서제는 청나라 8대 황제 도광제의 일곱째 아들 순친왕과 서태후의 여동생 엽혁나랍씨에게서 태어납니다. 본명은 애신각라 재첨이었죠. 도광제-함풍제-동치제 순으로 황위를 잇고 있었으니 재첨은 황위와 거리가 먼 존재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황위를 받지 않고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살 운명이었어요. 하지만 동치제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자,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서태후(함풍제의 후궁, 동치제의 어머니)는 재첨을 황위에 올립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요. 재첨의 아버지 순친왕과 서태후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도 하고요. 순친왕에게서 일방적으로 아들을 빼앗아 서태후가 양자로 삼았다고도 해요.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재첨이 황위에 오를 때 나이가 세 살이었다는 거죠. 아직 말도 제대로 떼지 못한 아이였으니, 서태후가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어서 재첨을 황위에 올린 거였어요. 결국 재첨은 1874년 2월 25일, 청나라 11대 황제(묘호: 덕종, 연호: 광서)로 즉위합니다.


19세기 청나라 황실 가계도(출처: 내 손)


바람 잘 날 없는 꼭두각시 황제

한때 몽골, 티베트, 대만, 홍콩 등 거대한 영토를 확보해 아시아의 강국으로 자리 잡았던 청나라. 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자, 청나라는 1,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2차 때는 프랑스도 합류)에게 대패하고 태평천국운동 같은 전국적인 민란이 발발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청나라는 서구 열강에 맞서기 위해 양무운동을 추진하면서 신식 무기를 제작하고 증기기관을 수입하는 등 개혁을 하기 시작합니다. 재첨의 아버지 순친왕과 공친왕은 서태후의 묵인 아래 양무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공친왕이 실정으로 민심을 잃자 순친왕의 입지가 올라갔죠. 그런데 1881년 서태후와 같이 국정을 이끌던 동태후가 의문의 죽음을 당합니다. 왜 태후가 두 명일까요? 청나라에는 태후가 두 명이 있었어요. 황제가 죽은 뒤 후궁의 자식이 황위를 잇는 경우가 늘자, 아예 태후를 두 명씩 두어서 내무부를 관리하게 하였죠. 황후는 모후황태후, 후궁(원자의 생모)은 성모황태후가 되었습니다. 함풍제가 죽을 때 동태후는 황후였고 서태후는 후궁이었으니 서열상 동태후가 위였어요. 동치제가 황제가 된 후, 섭정이 된 두 사람은 권력 문제로 자주 다투었습니다. 광서제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동태후가 죽었을 때 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설이 퍼집니다. 두려워진 순친왕은 1885년 북양 해군 지휘권을 받았는데도 서태후에게 바짝 숙이고 지냅니다. 아버지의 비굴한 모습을 보고 자란 광서제는 서태후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1887년, 광서제는 16살로 성년이 되었지만 서태후는 계속 섭정을 합니다.


함풍제의 후궁, 동치제의 생모 서태후(자희태후) (출처: 바이두)



혼인을 하긴 했는데

성년이 된 광서제는 혼인을 해야 했습니다. 광서제는 계속 전권을 휘두르려는 서태후에게 슬슬 불만을 품기 시작했죠. 하지만 대놓고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광서제는 욱하는 성격이었고 환관들을 자주 매질했다고 하는데, 아마 서태후에게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모습에 서태후는 살짝 두려움을 느꼈는지, 혼인식을 마치면 은퇴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광서제는 태감들에게 바로 은퇴식을 준비하라고 명합니다. 며칠 후 서태후는 자금성에서 쫓겨나 새로운 거처로 옮겼죠. 이후 광서제는 서태후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태후는 몰래 광서제의 혼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광서제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황후로 맞이하려 했지만, 서태후가 선수쳐서 광서제를 자신의 조카 엽혁나랍씨(훗날 융유황후)와 혼인시킵니다. 융유황후는 서태후가 시키는 대로 광서제의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광서제의 아내라기보다 서태후의 조카에 더 가까웠죠. 광서제는 이러한 융유황후를 경멸하기 시작합니다. 융유황후가 들어오려 할 때마다 광서제가 신발을 집어던질 정도였죠. 결국 부부관계는 파탄이 나고 광서제를 간섭하려던 서태후의 계략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광서제의 발악

19세기 말,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에게 강제로 홍콩, 연해주, 베트남 등을 할양하면서 쇠퇴하고 있었던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고 대대적으로 개혁하면서 신흥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특히,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간섭 문제를 두고 다투다가, 동학농민운동 때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군사를 보냈습니다. 이 무렵, 광서제는 서태후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고 있었죠. 1894년, 20대가 된 광서제는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이홍장 등 군벌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고집합니다. 그런데 청나라는 무기를 서구식으로 바꾸었지만, 내부 분란과 부패 문제로 전쟁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여담이지만 서태후가 환갑잔치하느라 군비를 낭비했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결국 이홍장이 사비 털어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결국 청나라는 패배하고 일본은 아시아의 강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가뜩이나 서양 국가들에게 패배를 거듭하던 와중, 일개 섬나라라고 생각했던 일본한테까지 패배하자 민심은 청나라 황실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광서제는 패전의 책임을 떠안아야 했죠.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의 어진(출처: 바이두)



진비를 만나다

이때 광서제의 총애를 받은 여인 타타랍씨가 등장합니다. 타타랍씨는 1876년생으로 광서제보다 다섯 살 어렸습니다. 1889년, 13살에 입궁하여 진빈으로 봉해졌고 이후 서태후의 생일을 맞아 진비로 승진합니다. 기센 황후와 서태후에게 질린 광서제는 진비를 총애합니다. 진비는 궁중의 암투나 권력 다툼을 싫어했고 다른 여인들처럼 꾸미지 않고 남장을 즐겼습니다. 당시 광서제는 발기부전에 시달렸는데 남장을 즐기던 진비는 광서제에게 잠자리를 바라지 않아서 진비가 총애 받았다는 말도 있지요.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성격이라 광서제의 예민한 성격을 잘 견디기도 했고요. 총명하고 아는 것도 많아서 광서제에게 외국어를 배우거나 광서제가 정책을 추진할 때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진비를 질투한 융유황후는 서태후에게 진비가 총애를 빼앗았다고 고자질합니다. 진비가 정치에 간섭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서태후. 1894년, 청일전쟁이 한창일 때 서태후는 진비가 매관매직했다는 보고를 듣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이 사건을 묵인해 줄 테니 청일전쟁에 관한 보고를 내게 전하라고 하죠. 결국 진비는 귀인으로 강등되고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처형하면서 사건을 마무리 짓습니다. 서태후가 청일전쟁의 진행 방향을 모두 알게 되면서 광서제는 점차 곤란해지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자, 서태후는 이 틈에 진비와 광서제의 편을 들던 대신들을 축출합니다.



100일 천하로 끝난 황제의 개혁

광서제는 어떻게 하면 민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일본이 싫어도 배울 건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광서제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방하기로 결심합니다. 1898년 6월 11일, 광서제는 조서를 내려 변법을 선언하니, 이것이 바로 '변법자강운동'이었죠. 광서제는 강유위, 양계초 등의 개혁파의 의견을 받아 100가지가 넘는 개혁안을 발표합니다. 헌법 제정, 과거제 개혁, 의회 설립, 서양식 학교 제도 도입, 농상공업 진흥 정책 등을 추진하면서 청나라의 틀 자체를 바꾸려 하였죠. 처음에는 서태후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1898년 7월 19일, 광서제가 개혁에 방해되는 세력을 숙청하고, 이토 히로부미 등을 초빙하여 고문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자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수구파는 광서제의 정책에 반발합니다. 이를 눈치챈 광서제는 군사의 교육을 담당하던 원세개에게 서태후의 감시를 맡겼지만, 원세개는 광서제를 배신하고 황제의 행보를 서태후에게 고합니다. 결국 1898년 9월 21일, 수구파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광서제는 자금성에 갇히게 됩니다. 강유위, 양계초는 일본으로 망명하고 다른 개혁가들은 사형당하면서 변법자강운동은 100여 일 만에 물거품이 되었죠. 광서제가 변법자강운동을 추진할 때 진비는 옆에서 적극적으로 조언하였습니다. 광서제가 유폐될 때 진비는 종수궁 뒤편 북삼소에 갇혔죠. 진비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태감의 훈계(말이 좋아 훈계지 욕하는 수준)만 들으며 살아야 했습니다.


광서제의 후궁 진비(각순황귀비)의 사진(출처: 바이두)



진비의 최후

변법자강운동까지 흐지부지되자 청나라인들은 서양인들을 극도로 증오했습니다. 청나라 곳곳에서 폭동이 터져 나왔죠. 이때 의화단이 등장합니다. 의화단은 백인 선교사나 외교관들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중국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습니다. 머리색, 눈동자 색이 특이하면 무조건 죽였죠.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을 비롯한 8개의 서구 열강은 의화단을 진압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광서제는 서구와 강화 조약을 맺자고 주장했지만 유폐된 광서제에겐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서태후는 광서제의 주장을 묵살하고 의화단의 편을 듭니다. 그리고 1900년 6월 21일 연합국에게 전쟁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1900년 8월 14일, 연합국은 베이징을 점령했습니다. 2달 만에요. 베이징은 초토화되고 청나라인들은 마구잡이로 학살당합니다. 다급해진 광서제와 서태후는 변복을 하고 피난을 떠납니다. 이때 진비는 우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진비의 나이 24세였죠. 청나라 조정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정절을 위협받은 진비가 스스로 우물에 몸을 던졌다고 발표합니다. 하지만 태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태후가 진비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습니다. 이때 진비가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고 빌었다는 말도 있고, 진비가 서태후에게 '황제는 베이징에 남아있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서태후가 (사실상) 진비를 죽인 게 확실합니다. 광서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 끔찍한 사태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1901년 청나라는 신축조약을 체결하고, 피난 갔던 광서제는 베이징으로 돌아옵니다.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외국군의 베이징 주둔을 허용해야 했죠.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것입니다. 광서제는 변법자강운동 때 추진했던 개혁을 다시 하려고 합니다. 1908년 흥정헌법대감을 발표해 청나라를 변모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광서제가 1908년, 37세의 나이로 승하하면서 개혁은 흐지부지됩니다. 서태후도 비슷한 시기에 사망했습니다. 당시 광서제는 병사했다고 발표했지만 100년 후, 광서제의 유골에서 비소 성분을 추출하면서 독살당한 것으로 결론납니다. 한편 진비는 각순황귀비로 추증되었다고 해요. 평소 진비에게 "천자인 내가 있으니 아무도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던 광서제. 하지만 가뜩이나 힘이 없던 광서제가 허수아비로 전락하자 진비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광서제 본인도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한 채 독살당했고요. 사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청나라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때 내정간섭을 실시하면서 우리나라와 악연을 맺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청나라가 쇠퇴하는 모습과 서구 열강들의 내정 간섭으로 반식민지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편 이 쓰립니다. 비록 우리나라와 악연이 있는 황족들의 이야기이지만 막판에 우리나라와 비슷한 길을 걸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서구 열강의 침략과 수구 세력의 반발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죽은 광서제와 진비에게 연민의 감정을 바치고 싶습니다.


광서제와 진비의 사진(출처: 바이두)



<참고 자료>

나무위키, 광서제, https://namu.wiki/w/%EA%B4%91%EC%84%9C%EC%A0%9C

나무위키, 변법자강운동, https://namu.wiki/w/%EB%B3%80%EB%B2%95%EC%9E%90%EA%B0%95%EC%9A%B4%EB%8F%99

나무위키, 의화단 운동, https://namu.wiki/w/%EC%9D%98%ED%99%94%EB%8B%A8%20%EC%9A%B4%EB%8F%99

위키백과, 각순황귀비, https://ko.wikipedia.org/wiki/%EA%B0%81%EC%88%9C%ED%99%A9%EA%B7%80%EB%B9%84

중국인물사전, 진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66348&cid=62066&categoryId=62066

History2, 광서제와 그의 후궁 "진비"의 비극적인 최후, 히스토리의 역사산책, 2019.04.10, https://blog.naver.com/joonho1202/221510284589

트러블메이커, 서태후가 우물에 빠뜨려 죽인 광서제의 진비 타타라씨(珍妃 他他拉氏), 2020.04.22, https://blog.naver.com/st01136/221923098472

중은우시, 광서제의 비극: 동년, 사업 그리고 애정, 중국,북경,장안가에서, 2020.01.16,

https://blog.daum.net/shanghaicrab/16156840

위키백과, 함풍제, https://ko.wikipedia.org/wiki/%ED%95%A8%ED%92%8D%EC%A0%9C#%EA%B8%B0%EB%85%84%EA%B3%BC_%EC%97%B0%ED%98%B8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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