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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ul 01. 2021

만인의 국모여도 서러운 건 어쩔 수 없다

조선 제4대 왕 세종의 왕후: 소헌왕후 심씨(한국)

안녕하세요. 리나입니다. 원래 수요일에 올리려 했는데, 하루 늦어버렸네요. 사실 제가 어제 드라마를 보느라 하루 미루었습니다;;; 어릴 때 본 <연개소문>이 그렇게 재밌을 줄은 몰랐어요. 병맛 돋는데 이상하게 재밌는 드라마입니다. 100부작인데, 중국 편만 골라 볼 겁니다(사실 연개소문이 아니라 수양제를 본). 오늘은 발해의 정치사를 보느라, 글을 늦게 쓰게 됐어요. 자료가 없어서 거의 추측으로밖에 알 수 없는 발해의 역사. 그만큼 발해가 관심을 못 받아서 안타깝습니다. 기회 되면 발해사도 다뤄보고 싶습니다(하고 싶은 게 참 많네요). 잡설 집어치우고 <왕을 지킨 여자들> 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왕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에 대해 다루어볼 예정입니다. 워낙 많은 드라마에서 다루었던 인물이니만큼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해, 간략하게 맛보기 식으로 정리하겠습니다. 평소대로 나무위키와 위키백과를 짜깁기해서 쓰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개국공신, 아버지는 종1품 대신

소헌왕후 심씨는 1395년(태조 4년), 심온과 안씨의 장녀로 태어납니다. 심온은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인데, 심덕부는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조한 개국공신이었죠. 그 덕에 조선이 건국된 뒤 청성백에 봉해지고 판문하부사, 영삼사사, 좌정승을 거친 인물이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문하부, 회계, 첨의부 등 각종 부서의 최고 관직을 맡은 거죠. 아버지 심온은 형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공조판서, 의정부 참찬, 의정부 찬성 등을 역임했습니다. 판서와 참찬은 정2품이고 찬성은 종1품이니 아버지도 부서별로 좋은 관직을 도맡았습니다. 즉, 심씨는 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높은 집안의 따님이었습니다. 애초에 중전이 되려면 높은 집안 출신일 수밖에 없으니 별로 놀라운 사실은 아닌 것 같네요(장희빈이 중인 출신인데 한미한 집안이라고 까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요).



미래의 대왕을 만나다

심씨는 1408년 태종의 세 번째 아들인 충녕대군(훗날 세종)과 혼인합니다. 태종의 여동생 경선공주가 소헌왕후를 충녕대군의 배필감으로 추천했는데, 경선공주는 심덕부의 여섯째 아들 심종과 혼인했죠. 즉, 경선공주는 아버지 동생의 아내이니, 심씨의 숙모였던 겁니다. 그만큼 심씨는 왕실과 연계가 깊은 인물이었어요. 이때 충녕대군은 대군이었기 때문에, 심씨는 아직 세자빈이 아니었어요. 대신, 경숙옹주에 봉해졌죠. 여담이지만, 조선 초기에는 대군의 부인, 왕의 후궁, 왕의 서녀, 개국공신의 어머니와 처, 왕세자빈의 어머니, 종친의 딸 등을 모두 '옹주'로 봉했다고 해요. 세종 때부터 왕의 서녀만 옹주라고 봉하기로 정했고요(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나 1418년 양녕대군이 행실 때문에 폐세자가 되자 태종은 총명한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이때 심씨는 세자빈이 되어 경빈으로 봉해집니다. 그해 8월, 충녕대군이 왕으로 즉위하고 심씨는 왕비가 됩니다.



친정이 숙청당하다

심씨가 중전이 되면서, 심온은 국구(왕의 장인)가 됩니다. 심온은 영의정을 겸임하는데, 영의정은 조선시대 의정부의 정1품 관직이니 비로소 모든 정치를 총괄하는 최고 관직에 올랐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심온을 영의정에 제수하라고 명한 사람은 태종이었던 것이죠. 태종은 살아서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태종 이방원하면 떠오르는 게 뭡니까. 숙청이죠. 태종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뒤 원경왕후의 친정을 숙청했습니다. 외척이 득세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들 세종의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심씨의 친정을 숙청할 계획을 세웁니다. 즉, 태종은 심온의 경계심을 흐리기 위해 미끼를 던졌습니다. 심온이 미끼를 덥석 물자 태종은 심온을 강상인 사건에 연루시킵니다. 강상인이 세종에게 군사 업무를 보고했는데, 태종은 상왕인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자 이것을 상왕을 무시한 행위로 간주합니다. 태종은 강상인을 직접 국문하면서,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이 거론되게 합니다. '심온이 했지' '했다고 말해'라고 하면서요. 이때 심온은 세종대왕의 즉위를 명나라에 고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습니다. 태종은 심온이 돌아오기 전에 강상인과 이 사건에 연루된 증인들을 처형합니다. 결국 대질 심문할 기회를 잃어버린 심온은 평안북도 의주에 도착하자마자 사약을 받고 죽습니다. 심온의 일족들은 모두 죽거나 귀양을 가거나 노비가 되었죠. 이때 심온의 숙청에 개입한 대신들은 소헌왕후를 폐출시켜야 한다고 세종에게 주청합니다.



다행히 폐비가 되지 않았으나

하지만 세종은 현숙하고 인자한 소헌왕후를 반려자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소헌왕후에게는 죄가 없으니 폐출시키지 말아달라고 간청합니다. 태종은 세종의 청을 들어줍니다. 그 덕에 소헌왕후는 중전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태종 입장에서도 소헌왕후를 살려준 이유가 있어요. 태종은 외척이 득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심씨 일가를 숙청한 건데, 또 중전을 들이면 또 외척을 숙청해야 했기 때문이었죠. 더구나 소헌왕후는 아들을 세 명이나 낳았고 또 임신 중이었어요(여담이지만, 세종이 정말 자식을 많이 낳았어요 아들이 18명이고 딸이 7명인가 그럴 거예요. 소헌왕후에게서는 아들 8명, 딸 2명을 낳았어요. 다른 면에서 능력 있는 분이죠). 소헌왕후를 폐비시키고 새로운 중전을 맞으면 후계 구도도 복잡해지죠. 아버지가 계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모습을 보고 피바람을 일으킨 태종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헌왕후만큼은 살려주었다고 추측합니다. 이후 소헌왕후는 안정을 취하고 내명부를 통솔하였으나, 세자빈 휘빈 김씨, 순빈 봉씨가 연달아 사건을 터뜨립니다.


이도경_소헌왕후 진영 昭憲王后 眞影_견본중채_159×130cm_2016(출처: 네오룩)



내명부의 골칫덩어리들

문종(아직 왕세자 시절이에요. 편의상 문종이라 부를게요)의 세자빈 휘빈 김씨는 문종의 총애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문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시녀의 조언을 듣고 술책을 부립니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신의 앞코를 벤 뒤 불태워서 가루로 만든 뒤, 그 가루를 술에 넣어서 문종에게 먹이려 했죠.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이번에는 뱀이 교미할 때 흘린 기운을 수건으로 닦아서 차려 했습니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였고, 세자빈은 미래의 국모가 될 몸인데 감히 미신을 행했다? 용납할 수 없죠. 소헌왕후는 시녀를 국문해 진상을 알아냅니다. 이를 토대로 세자빈을 추궁하자 세자빈은 순순히 자백하죠. 소헌왕후에게서 사실을 들은 세종은 격노해 시녀를 참수하고 세자빈을 폐출시킵니다. 그리고 순빈 봉씨를 새로운 세자비로 봉합니다. 그러나 순빈 봉씨는 세자를 사로잡기 위해 더 경악스러운 짓을 저지릅니다. 투기, 미신 숭배는 물론이고 임신했다고 속이기도 했습니다. 그중 순빈을 폐위시킨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궁녀와 동침을 했기 때문이었죠. 즉, 세자빈이 동성애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소헌왕후는 순빈을 크게 질책합니다. 결국 순빈도 폐비가 되고 세자의 딸(훗날 경혜공주)을 낳은 권승휘(훗날 현덕왕후)가 세 번째 세자빈이 됩니다.


광화문에 있는 세종의 동상(출처: 픽사베이)



소헌왕후는 민중들에게서 자애로우면서 엄정한 국모로 평가받았습니다. 세종이 부재했을 때 만삭의 몸으로 화재 사건을 전두지휘하기도 했고, 세자빈 사건 때 적절히 대처했죠. 또한 후궁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명부를 안정시키려 노력했고요. 하지만 생애 후반에 불교에 의지하면서 집현전 학자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세종은 중전의 불심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아마, 중전이 된 뒤 힘든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불교에 귀의했으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태종 사후에도 세종은 친정을 복권시키지 못했습니다. 태종의 유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이때 소헌왕후는 어머니와 아들들(광평대군, 평원대군)을 잃었죠. 결국 병에 걸린 소헌왕후는 1446년 3월 24일 50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승하하였는데, 적어도 수양대군은 부모님에게는 효도를 다했다고 해요. 만일 단종이 즉위할 때까지 소헌왕후가 살아있었다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란 추측도 많이 합니다. 만인의 존경을 받았으나 주위 사람들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고 일찍 죽은 소헌왕후, 그리고 앞으로 조선에 닥쳐올 미래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참고 자료>

나무위키, 소헌왕후, https://namu.wiki/w/%EC%86%8C%ED%97%8C%EC%99%95%ED%9B%84#s-2.2

위키백과, 소헌왕후, https://ko.wikipedia.org/wiki/%EC%86%8C%ED%97%8C%EC%99%95%ED%9B%84

위키백과, 조선 세종,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C%84%B8%EC%A2%85

위키백과, 심온, https://ko.wikipedia.org/wiki/%EC%8B%AC%EC%98%A8

위키백과, 심덕부, https://ko.wikipedia.org/wiki/%EC%8B%AC%EB%8D%95%EB%B6%80

나무위키, 휘빈 김씨, https://namu.wiki/w/%ED%9C%98%EB%B9%88%20%EA%B9%80%EC%94%A8

나무위키, 순빈 봉씨, https://namu.wiki/w/%EC%88%9C%EB%B9%88%20%EB%B4%89%EC%94%A8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옹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68749&cid=46622&categoryId=46622



<사진 출처>

네오룩, 조선의 왕비 영혼을 만나다, https://neolook.com/archives/20170531b


*네이버 블로그에도 게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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