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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un 27. 2021

도적의 아내에서 나라를 개국한 왕비로

명나라 초대 황제 홍무제(주원장)의 황후: 효자고황후 마씨(중국)

전근대 시절, 왕을 내조하는 것이 왕비의 덕목이라 여겨졌습니다. 내조의 사전적 의미는 '아내가 남편을 돕는다'라는 뜻이죠. 이처럼 내조라 하면 남편을 뒷바라지한다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왕비는 왕의 아내이기 전에 한 나라의 국모였습니다. 만백성에게 모범이 되어야 했죠.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명부와 외명부의 수장으로서 왕족, 종친, 문무백관의 아내들을 관리하는 업무도 맡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업무들은 나라의 기틀이 잡혔을 때 가능했죠. 막 나라를 세우기 시작했을 때는 기틀을 잡는 게 중요했죠. 이때 왕비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명나라의 태조 홍무제의 황후, 효자고황후 마씨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협객의 수양딸, 마수영

효자고황후 마씨의 본명은 수영입니다. 명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내린 시호는 '효자정화철순인휘성천육성지덕고황후'이지만, 너무 길어서 황후가 되기 전에는 '마수영', 황후가 된 후에는 마씨 성을 따서 '마황후'라 부르겠습니다. 마수영은 1332년 안휘성 숙주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무인이었는데, 미천한 집안이었죠. 마수영의 어머니는 마수영을 낳자마자 죽고 아버지는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마수영이 어렸을 때 객사하고 맙니다. 이후 마수영은 아버지의 친구 곽자흥의 수양딸이 됩니다. 곽자흥은 젊어서부터 협객들과 어울린 인물로 홍건적(원나라 말기 몽골족에게 억압받던 한족들이 일으킨 반란군)에 가담하였죠. 마수영은 전족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곽자흥은 전쟁을 치르느라 바쁘다 보니 전족을 할 만한 형편이 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족이 뭐냐면, 발을 작게 만들어주는 신발이에요. 단순히 발 사이즈가 작은 게 아니고 어릴 때 천으로 꽁꽁 묶어서 발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죠. 당시에는 발이 작은 여자가 미인이었기 때문에 유행한 풍습이었어요(여담이지만, 전족은 천 년가량 유지된 풍습이죠. 송나라 때부터 1911년 신해혁명으로 폐지될 때까지요). 아무튼 마수영은 발이 큰 것이 수치스러워 항상 치맛자락에 감추고 다녔는데 바람이 불면서 발이 노출되었고 이후 대각마황후(大脚馬皇后, 황후 마씨가 전족을 하지 않아 발이 큼을 비꼬는 말. 출처: 위키백과)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해요.



효자고황후 마씨의 초상화(출처: 바이두)


주원장의 등장

1352년, 곽자흥은 수만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호주성을 점령합니다. 이때 주원장이 등장하죠. 주원장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탁발승으로 살았습니다. 탁발승은 집을 떠돌면서 문 앞에서 시주를 달라고 하는 스님을 뜻합니다. 말이 좋아 스님이지 사실상 동냥 요구하는 거지와 다를 바 없었죠. 하지만 주원장은 곽자흥의 수하가 된 뒤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해 홍건적 내의 2인자까지 되었습니다. 마수영은 곽자흥의 주선으로 주원장과 혼인합니다. 곽자흥이 두 사람을 혼인시킨 이유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주원장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주원장의 능력을 경계하여 애초에 주원장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려는 계책이라는 설이죠. 이리보나 저리보나 정략혼인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금술이 좋았습니다. 마수영은 총명하고 박학다식한 인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주원장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특히, 천하를 평정할 때 주원장에게 사람을 죽이지 말고 포섭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죠. 이러한 가르침 덕분에 주원장이 폭주하는 것을 그나마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총 5남 2녀를 낳았습니다. 그중 넷째 아들의 이름은 주체로, 훗날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가 되었죠.



떡을 숨겨서 남편을 구하다

이후 주원장은 세력을 키우고 고향에서 병사를 증원합니다. 1355년 주원장은 대군을 모은 뒤 원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출병합니다. 이때 마수영과 가족들은 화주에 남았죠. 가족들이 두려움에 떨자 마수영은 가족들을 다독일 뿐만 아니라 병사들을 위해 물자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또한 양부 곽자흥이 주원장을 틈틈이 의심할 때마다 마수영은 주원장을 위해 여인들을 포섭해 남편에 대해 좋게 말하도록 하였죠. 설상가상으로, 곽자흥의 두 아들이 주원장의 능력을 시기하였습니다. 이들은 주원장이 모반했다고 거짓 보고하여 주원장에게 누명을 씌웠죠. 그런 뒤, 주원장을 감금하여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굶겼습니다. 그러자 마수영은 뜨거운 떡을 옷 속에 숨기고 남편에게 가져다주려고 하였습니다. 양모가 이를 발견하자 마수영은 어쩔 수 없이 자초지종을 털어놓았습니다. 양모가 곽자흥에게 진실을 말하니 화가 난 곽자흥은 두 아들을 매질하고 주원장을 석방시켰습니다. 이때 마수영의 가슴에는 큰 화상 자국이 남게 되었습니다.


홍건적 시절의 주원장(출처: 바이두)


남편의 승리를 위해

1356년, 곽자흥이 죽은 뒤 주원장은 난징을 정벌하고 반란군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리고 당시 남부 지방에서 위세를 떨치던 한림아의 신하가 되어 활약합니다(나중에 보면 압니다. 주원장은 절대 남 밑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요). 1360년, 당대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주원장과 진우량이 용만(중국 저장성 원저우에 있는 구. 출처: 두산백과)에서 격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마수영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병사들을 위로하고 안심시켜 주원장이 승리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죠.



황후가 되다

1363년 주원장은 파양호 전투에서 승리한 뒤, 1년 후 진우량을 격파하고 스스로 '오왕'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한림아를 난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 한림아가 익사합니다(주원장이 일부러 죽인 것 같은 느낌입니다). 또 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이 원나라에 투항하자 사실상 주원장이 남부 지방의 지도자가 되었죠. 드디어 1368년, 주원장이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명나라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마수영은 명나라의 황후가 되었죠. 어릴 때 어렵게 자란 마수영은 황후가 된 뒤에도 검소하게 살아갑니다. 흉년이 들면 마황후는 푸성귀를 먹으며 백성들의 어려움에 공감하였고 옷이 낡아도 기워서 입었습니다. 또한 공주와 후궁들과 직접 옷을 만들었고, 어렵게 사는 백성들에게 옷을 나누어주기도 하였죠. 그래서 신하들과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마황후를 그린 그림(출처: 바이두)


중국 최고의 국모, 마황후

그러나 마황후가 중국 최고의 국모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는 주원장의 폭주를 제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원장은 황제가 된 후, 어마무시한 숙청을 단행합니다. 홍무제는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도왔던 공신들과 그 일족을 모조리 죽였죠. 무려 1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해요(고문 방법이 워낙 경악스러운데 독자분들의 멘탈을 위해 적지 않겠습니다). 마황후는 죄 없는 사람이 숙청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마황후가 구한 사람에는 대학사 송렴이 있습니다. 좌승상 호유용이 모반을 했다는 이유로 홍무제가 호유용을 처형하려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송렴의 손자가 이 사건에 연루됩니다(<역사가 버린 2인자>를 다시 연재할 때 명나라의 관리 하나를 다룰 겁니다. 이 사건은 그때 다시 설명할게요). 이 때문에 송렴까지 죽게 될 위험에 처합니다. 마황후는 송렴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했으나 홍무제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마황후는 홍무제에게 수라상을 올렸는데, 고기와 술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홍무제가 이유를 묻자 마황후는 머지않아 죽을 송렴을 위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원장은 순간, 송렴에게 측은함을 느꼈습니다. 결국 송렴을 죽이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그칩니다.


명나라 태조가 된 주원장(홍무제) (출처: 바이두)


발이 커도 괜찮습니다

마황후는 백성들에게 자애로운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 마황후는 전족을 차지 않았기 때문에 발이 컸습니다. 사람들은 몰래몰래 마황후를 비웃었죠. 이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민가에 발이 큰 마황후를 비웃는 그림이 나붙었습니다. 백성들은 이 모습을 보고 낄낄거렸습니다. 잠행을 나온 홍무제가 이 광경을 보고 그 백성들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마황후는 내가 발이 큰 건 사실이니 처형하지 말라고 하였죠. 홍무제는 황후의 말을 듣고 백성들을 용서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또 중국에서는 새해를 맞으면서 대문 앞에 그림을 붙이는 풍습이 있는데, 홍무제는 잠행을 나왔다가 발 큰 여자가 수박을 안고 있는 그림을 발견합니다. 마황후를 비웃는 것이라 생각한 홍무제는 그 집 대문 앞에 '복(福)'를 붙입니다. '이 집을 몰살하겠다'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죠. 그러자 마황후는 그 마을의 모든 집에 '복(福)'을 붙이게 합니다. 홍무제는 무슨 집에 '복(福)'을 붙였는지 몰라 헤매다가 '복(福)'을 거꾸로 붙인 집을 발견합니다. 홍무제는 그 집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마황후는 '복이 온다(到福:도복, 다오푸)'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복(福)'을 거꾸로 붙인 것이다, 황제가 집에 찾아오니 당연히 복이 오는 것 아니겠냐고 말합니다. 중국어에서 '倒'는 '거꾸로 하다'라는 뜻으로, '倒福(도복)'은 '복(福)이 뒤집어졌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倒(도)'는 '이르다, 오다'라는 뜻을 가진 '到(도)'와 동음이의어죠. 즉, '도복'은 '복이 뒤집어졌다'라는 뜻과 '복이 온다'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홍무제는 황후의 말을 듣고 그 집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후 백성들은 마황후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새해마다 '복(福)'을 거꾸로 붙이기 시작했고 이는 중국의 풍습으로 자리 잡았죠.


드라마 <대각마황후>의 마황후(출처: 바이두)



마황후는 1382년, 향년 51세의 나이로 승하하였습니다. 홍무제는 식음을 전폐하고 황후의 죽음을 슬퍼했죠. 평생 다른 황후를 들이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폭주하여 신하들을 무차별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태자가 말대꾸했다는 이유로 죽이려 했는데, 태자가 도망가다가 그림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마황후가 주원장을 업고 도망치는 그림이라 태자를 용서해 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마황후를 중국 최고의 국모로 평가합니다. 빈털터리였던 주원장이 한 나라의 태조가 되기까지 착실히 내조했을 뿐 아니라 주원장의 폭주도 막아주면서 억울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주었기 때문이죠. 백성들에게 한없이 관대한 황후였기도 했고요. 이처럼 만인의 국모로 칭송할 만한 인물, 우리나라에는 누가 있을까요? 다음 주까지 찾아보겠습니다.



<참고 자료>

나무위키, 효자고황후, https://namu.wiki/w/%ED%9A%A8%EC%9E%90%EA%B3%A0%ED%99%A9%ED%9B%84#fn-6

나무위키, 홍무제, https://namu.wiki/w/%ED%99%8D%EB%AC%B4%EC%A0%9C?from=%EC%A3%BC%EC%9B%90%EC%9E%A5#s-2.1.6

위키백과, 효자고황후(명나라), https://ko.wikipedia.org/wiki/%ED%9A%A8%EC%9E%90%EA%B3%A0%ED%99%A9%ED%9B%84_(%EB%AA%85%EB%82%98%EB%9D%BC)

위키백과, 송렴, https://ko.wikipedia.org/wiki/%EC%86%A1%EB%A0%B4

위키백과, 곽자흥, https://ko.wikipedia.org/wiki/%EA%B3%BD%EC%9E%90%ED%9D%A5

혼창통, 중국 최고의 황후: 내조의 황후, "마각이 드러나다"의 마황후(馬皇后), 힘겨움을 이겨낸 어제를 사랑합니다, 2019.01.12,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honchangtong&logNo=22144026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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