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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05. 2021
조국과 결혼한 수상, 군주의 마음을 사로잡다
영국(근대): 소(小) 윌리엄 피트(2)
1편: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것 같기도 한 정치판
1편에서 이어집니다.
조지 3세 시대 재임했던 수상들(소(小) 윌리엄 피트 재임 전까지)소(小) 피트의 등장
1783년, 소(小) 윌리엄 피트는 24살이었습니다. 그는 거물 정치인을 배출한 집안 출신이었죠. 아버지는 수상직을 역임했던 대(大) 피트였고, 어머니는 대(大) 피트 이전의 수상 조지 그렌빌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집안의 명성에 맞게 소(小) 피트는 1773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해 정치철학&고전&역사&수학 등을 섭렵합니다. 14살에 케임브리지에 입학해서 공부할 정도였으니 머리도 좋았던 것이죠. 그는 케임브리지 재학 당시, 훗날 노예무역제 폐지로 이름을 날리는 윌리엄 윌버포스를 만납니다. 윌버포스는 그의 평생 지기가 되었고 윌버포스와의 관계는 소(小)피트가 정치판에 발을 디디는 바탕이 됩니다. 하지만 소(小) 피트는 몸이 병약해서 3년 만에 정식 학위를 받지 못하고 졸업했습니다. 5년 후, 아버지 대(大) 피트가 세상을 떠나자 채텀 백작 직위는 형이 물려받았습니다. 소(小) 피트는 소정의 재산을 물려받고 재산을 토대로 법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덕에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습니다.
정치판을 흔든 젊은 정치인
이후 소(小) 피트(이하 피트)는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1780년 9월에 낙선했지만 1781년 1월 보궐선거에 당선되어 하원의원이 되었죠. 당시 노스가 한창 미국 독립전쟁을 지속하던 시기였습니다. 피트는 야당이었던 휘그당의 편에 서서 전쟁을 반대하고 미국과 화해할 것을 주창합니다. 또한 부정선거를 견제할 수 있는 개혁안을 단행합니다. 덕분에 그는 의회의 혁신을 이끌 '젊은 정치인'으로 주목받았습니다. 1782년 7월, 셸번이 수상이 되자 피트는 셸번과 친하게 지냈고 폭스는 두 사람을 경멸했죠. 폭스의 강압 때문에 셸번이 수상직에서 물러납니다. 자신을 비난하고 다니는 폭스를 눈엣가시로 여긴 조지 3세는 피트에게 수상직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하원에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그는 왕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결국 노스와 폭스의 연립 내각(수상은 포틀랜드)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피트는 그들에게 굴하지 않고 뇌물 및 부패한 자치구를 해결하고자 노력합니다. 마침 폭스와 노스가 동인도회사 개혁안으로 인해 의회의 지지를 잃어가던 상황이었죠. 왕뿐만 아니라 민중들도 피트를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버렐 컬렉션에 있는 소(小) 피트의 초상화(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영국 최연소 수상이 되다
조지 3세는 노스와 폭스 두 사람을 대놓고 견제합니다. 하지만 폭스는 국가의 재정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 개혁안이 필요하다고 끝까지 주창합니다. 이때 피트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라고 반발합니다. 노스와 폭스가 세금 확보를 빌미로 동인도회사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운영하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조지 3세도 피트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왕이 '동인도회사 개혁안에 찬성하는 자는 왕의 적으로 간주하겠다'라고 선포하자, 상원에서 이 개혁안이 부결됩니다. 결국 왕이 노스-폭스 내각을 해산시키자 포틀랜드는 수상직에서 물러납니다. 1783년 12월 19일, 조지 3세는 피트를 수상으로 임명합니다. 하지만 하원은 20대 중반의 피트가 수상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창합니다. 국정을 주도하기에 너무 어리다고 생각한 것이죠. 1784년 1월, 불신임 결의(의원내각제를 정치 형태로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의회가 내부 투표로 내각을 신임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하는 제도. 불신임 결의가 통과되면, 내각은 의회를 해산하거나 스스로 총사직해야 한다. 출처: 위키백과)가 통과되자, 피트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하지만 피트는 굴하지 않고 수상직을 끝까지 유지하려 합니다. 왕과 상원의 지지를 토대로 휘그당의 폭스와 겨루기로 하죠. 결국 그는 휘그당에서 나와 토리당의 당수가 된 뒤 1784년 3월, 총선거를 치릅니다. 노스-폭스 내각의 부정부패에 질린 민중들은 피트를 지지했고 다행히 피트는 총선거에서 압승합니다.
내정 개혁을 우선으로
피트는 내각을 형성한 뒤, 내정 개혁을 단행합니다. 1785년, 부패한 자치구의 대의권을 없애고 소규모 선거구를 활성화시켜 더 많은 사람이 선거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죠. 참고로, 18세기 영국에서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의 자치구에 있는 성인 남성 중 1/1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트는 선거구를 더 잘게 쪼개서 좀 더 많은 사람에게 투표할 기회를 주려 한 것이죠. 이렇게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한 뒤, 그는 재정 혁신도 단행합니다. 당시, 영국은 미국 독립 전쟁의 여파로 국채가 2억 4300파운드에 달했습니다. 매년 예산이 2,400만 파운드였는데 그중 1/3을 이자로 지불하던 상황이었죠. 예산보다 빚이 더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1786년, 피트는 펀드를 설립해 매년 100파운드의 돈을 축적해 이자를 갚았습니다. 그 덕에 1792년, 국채는 1억 7000만 파운드까지 내려갔죠. 또한 차&포도주&담배 등 쉽게 밀수되는 상품들의 관세를 낮추어서 상인들의 교류를 활성화했죠. 몰래 사고파는 것 이왕이면 아예 합법화해서 조금이라도 세금을 받아보자는 취지였죠. 이렇게 세관 수입을 1년에 200만 파운드씩 늘렸습니다. 1799년, 연 200만 파운드 이상에 대해 10%의 소득세를 부과해서 국고를 채우기도 했죠.
1793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주창하는 소(小) 피트(출처: 위키백과)1차 대프랑스 동맹을 형성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합니다. 피트가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무렵이었죠.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영국 지주들은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봐 두려워합니다. 영국 의회는 개혁파와 반대파로 나뉘어서 싸웠죠. 5년 후, 피트는 개혁파 중 일부를 처형하고 인신 보호 영장 신청을 금지시키면서, 반대파의 편을 듭니다. 1년 전, 프랑스는 왕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했었거든요. 영국도 왕이 처형되서 무정부 상태가 될까봐 두려웠던 거죠. 피트는 자국 보호를 빌미로 오스트리아&프로이센&스페인&네덜란드 등과 함께 1차 대프랑스 동맹을 형성해 프랑스를 공격하죠. 하지만 피트는 전쟁을 치르면서 기껏 모아 놓은 국고를 탕진합니다. 게다가 프랑스군의 우세로 프로이센과 스페인 등이 이탈합니다. 그리고 1797년 나폴레옹의 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자 1차 대프랑스 동맹은 와해됩니다.
아일랜드의 반란
하지만 피트는 계속 프랑스와 전쟁할 기회를 노립니다. 이 틈에 아일랜드가 독립을 주창했죠. 미국이 독립하고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은 것이었습니다. 아일랜드의 민중 75%가 가톨릭을 믿는 것을 알던 피트는 똑같이 가톨릭을 믿는 프랑스와 아일랜드가 동맹을 맺을까봐 두려워합니다. 이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피트는 아일랜드 의회에게 '반 가톨릭 법', 즉 아일랜드 내의 가톨릭 신자를 탄압하는 법을 완화하라고 설득했으나 실패했죠. 결국 아일랜드에서는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고, 피트는 반란군 1,500명을 사형시키는 등 극단적인 정책을 취합니다. 반발이 더욱 거세지자 피트는 아일랜드 의회에 많은 돈을 주고 의원들을 매수해서 아일랜드 의회 내에 자신의 편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1800년,'연합법'을 통과시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 스코틀랜드)에 아일랜드를 합병합니다. 결국, 아일랜드 의회는 와해되고 반란도 흐지부지됩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재개했으나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피트는 러시아&오스트리아&터키&포르투갈 등과 2차 대프랑스 동맹을 체결하고 프랑스를 공격했죠.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하고 프랑스와 평화 조약을 맺자, 영국을 제외한 모든 동맹국이 이탈합니다. 결국 영국은 홀로 나폴레옹군을 상대하게 되었죠. 피트는 영국 편에 설 국가들을 더 확보하기 위해 아일랜드에 유화정책을 펼치려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치에 입문할 권리를 주려 했죠. 당시 영국은 성공회 신자만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거든요. 조지 3세는 대관식을 치를 때 영국 국교회를 보호하기로 약속했다면서, 피트의 주장을 강하게 반대합니다. 가톨릭 신자에게 반감을 품은 의회와 민중도 피트에게 등을 돌렸죠. 결국 1801년 2월 16일, 사면초가에 몰린 피트는 수상직에서 물러나고 피트의 친구 헨리 에딩턴이 수상이 됩니다.
소(小) 피트의 친구이자 영국 17대 수상 헨리 에딩턴(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마지막에 타오른 불꽃
에딩턴은 프랑스와 평화를 유지하려 합니다. 그래서 1802년 아미앵 조약을 맺었죠. 그런데 말이 좋아 평화이지, 죄수 석방 및 각종 식민지 이권 이양, 보상 요구 등 프랑스에 유리한 조항 뿐이었습니다. 프랑스에 무릎을 꿇은 셈이었죠. 더구나 조약을 맺은지 1년 만에 나폴레옹이 영국을 다시 침공하자, 에딩턴은 전국적으로 비난을 받습니다. 민심을 잃은 에딩턴은 사임하고 조지 3세는 다시 피트를 불러들입니다. 피트는 1804년 5월 10일 다시 수상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유럽 전 대륙을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냈습니다. 피트는 오스트리아&러시아&프로이센을 다시 끌어들여 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1805년 10월, 넬슨의 활약으로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연합군이 대승을 거둡니다. 이때 피트는 "유럽의 구원자"로 칭송받았고, 그는 연회장에서 이러한 연설을 남겼습니다.
"제가 명예를 느낄 수 있게 해준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하지만 유럽은 사람이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국이 스스로 노력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영국이 이를 본보기로 삼아 유럽을 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소(小) 윌리엄 피트, 트라팔가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남긴 말
그러나 울름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연합군이 대패하면서 피트는 충격에 빠집니다. 그는 대패 소식을 듣고 얼굴이 파랗게 질렸는데, 이때 "지도를 치우게. 앞으로 10년간 이런 건 볼 필요가 없을 걸세."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땅으로 뒤덮인 지도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이후 피트는 시름시름 앓다가, 1806년 1월 23일에 사망합니다. 그는 미혼이었고 자식도 남기지 않았기에 의회에서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시신은 2월 2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고 수상직은 피트의 사촌 윌리엄 그렌빌이 승계합니다.
소(小) 피트의 사촌이자 영국 19대 수상 윌리엄 그렌빌(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1815년, 아서 웰즐리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키면서 영국의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피트가 죽은지 9년만이었죠. 그뿐만 아니라 피트 사후, 피트의 친구 윌리엄 윌버포스가 노예제 폐지를 법원에 호소하면서 1807년 노예무역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노예제도가 완전히 폐지된 것은 1833년입니다). 윌버포스가 노예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창할 때 수상이었던 피트는 윌버포스를 지원했고, 나폴레옹이 영국을 침공할 때 피트가 해군력을 증강시켰을 뿐 아니라 능수능란한 외교력으로 이탈했던 동맹국들을 다시 포섭했으니, 피트가 노예제 폐지와 나폴레옹 전투 승리의 기반을 마련한 셈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었기에 안타까움이 더해집니다.
국민들이 수상의 노력을 알아준 것일까요? 소(小) 윌리엄 피트는 현재까지 영국인의 존경을 받는 수상입니다. 조국을 너무 사랑한 탓에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많은 재정을 허비했고 조국 안정을 명분으로 아일랜드 국민을 탄압했지만, 미국과의 전쟁으로 파탄 난 재정을 굳건하게 했고 다수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고 노예제를 철폐하려고 노력하는 등 조국을 위해 헌신을 바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넬슨과 함께 프랑스의 침략에서 조국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도 영국인들의 머릿속에 깊게 남은 것 같고요. 독선적이던 조지 3세의 신임도 얻은 것도 피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노력 때문이겠지요. 용기와 만용 사이를 아슬하게 줄타기했던 소(小) 피트 수상의 일대기를 여기서 마칩니다.
영국의 16&18대 수상 소(小) 윌리엄 피트(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