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무더운 여름, 건륭제가 별장에서 피서를 보낼 무렵 한 남자가 찾아옵니다. 새하얀 머리에 두루마리를 둘둘 올려놓고, 몸에 딱 붙는 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였죠. 괴상하게 생긴 남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영국의 왕 조지 3세가 파견한 사절 매카트니였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차, 도자기 등을 팔고 영국은 면직물을 팔면서 무역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청나라의 차는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지만, 영국의 면직물은 청나라에서 큰 인기를 얻지 못해서 영국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청나라는 공행에게만 영국과 무역할 권리를 주었는데, 공행하고 무역할 때도 청나라가 자의로 관세를 부과했죠. 사실상 영국과의 무역을 규제한 셈입니다. 영국은 청나라와의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사절을 보냅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집니다. 매카트니가 황제를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황제 앞에서는 누구든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야 했으니까요.
결국 건륭제 뒤에 영국 왕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매카트니가 한쪽 무릎을 꿇는 것으로 합의 봅니다. 하지만 조지 3세가 건륭제에게 섬을 할양해달라고 친서를 보내자, 건륭제는 불같이 화를 냅니다. 결국 1793년 가을, 건륭제는 매카트니 사절단을 영국으로 추방합니다. 이후, 청나라와 영국의 관계는 악화되다가 50여 년 후 아편전쟁으로 이어지죠.
1793년 매카트니가 건륭제를 접견하는 장면(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강건성세의 끝, 몰락의 시작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무역에서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영국이 아편을 팔아 청나라 백성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고 언급합니다. 이에 반발한 청나라가 선전포고했다가 패배해서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고요. 하지만 몽골&티베트&위구르 등 여러 국가를 정복한 강대국 청나라가 왜 영국에 패배했을까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에는 공통점이 있죠. 바로 '내우외환'입니다. 청나라는 내부적으로도 몰락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강희제-옹정제 시기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한 청나라의 관료들은 건륭제 말기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죠. 관료들이 부패해지고 백성에 대한 수탈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지요. 건륭제가 죽고 황위를 이은 가경제는 상황의 총신 화선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는데, 화선이 축재한 재산은 청나라의 20년 치 세금과 맞먹었다고 해요. 하지만 화선이 죽은 뒤, 청나라의 재정 상황은 악화됩니다. 화선 밑에서 콩고물 받아먹던 관료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데다가, 가경제가 화선의 재산을 국고에 환수하지 않고 황제 개인 비자금으로 삼았기 때문이었죠. 결국 가경제는 세금을 인상해 국고를 채우려 했고, 가혹한 수탈 때문에 고통받던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킵니다. 일명, '백련교도의 난'이었죠.
18~19세기 청나라 황실 가계도
너무 고단해 아편을 피운다
반란을 진압했지만, 진압하는 데까지 10여 년이 걸립니다. 이때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 탓에 청나라의 재정은 파탄 났습니다. 더구나 이 반란을 진압한 군대는 향용이라는 의용병이었죠. 나라에서 관리하는 군대가 아니라 지방 유지들이 세력을 모아 형성한 군대, 쉽게 말하면 의병이었죠. 청나라의 정규군인 팔기군은 직업군인인데,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다 보니 기강이 해이해졌고 반란을 진압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정규군의 무능함이 여실히 밝혀졌죠. 결국 소수민족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고 청나라 조정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어갑니다. 이때 영국의 아시아 무역을 주도하던 동인도 회사는 첩자를 보내 청나라의 상황을 염탐하고, 건륭제 시절에 비해 청나라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영국 상인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고된 삶을 사는 하층민을 찾아가 몰래 아편을 팔기 시작합니다.
임칙서의 등장
1820년 9월 2일, 가경제가 죽고 도광제가 황위에 오릅니다. 도광제는 선황 때부터 이어지는 반란을 수습해야 했죠. 게다가, 1810년대부터 아편의 수입량은 급속도로 늘어납니다. 예전에는 1년에 200상자로 엄격하게 제한했지만, 청나라의 지방 통제 능력이 약화되면서 밀무역이 성행한 탓이었죠. 밀무역을 감찰하러 온 관료들도 돈을 받고 눈감아주었고요. 도광제 때는 무려 3만 상자를 수입했고 하층민뿐 아니라 관료들까지 아편을 피울 정도로 아편 흡입이 만연해집니다. 아편은 처음에는 기분을 띄워주지만 나중에는 피우지 않으면 하루라도 못 견디게 하는 무서운 마약이죠. 사람들은 아편 때문에 허우적거리고, 대량의 은이 영국으로 유출되니 도광제 입장에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도광제 본인도 아편을 피웠지만, 과감하게 끊고 아편 근절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조정에서는 어떻게 아편을 근절시킬지 말이 오갔죠. 이때 호광 총독 임칙서가 황제에게 상소를 보냅니다.
청나라 제8대 황제 도광제, 그는 선정을 펼치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출처: 위키백과)
청백리로 칭송받다
임칙서는 1785년 중국 복건성에서 임빈일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칙서(則徐)라는 이름은 그가 태어날 때 폭우를 피해 그의 집으로 찾아온 순무(지방 장관) 서사증(徐嗣曾)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본받을 칙(則), 서사증의 서(徐)씨, 즉 서사증을 본받으라는 뜻이었죠. 당시 서사증은 청렴한 관리로 존경을 받았고 임빈일은 서사증 같은 관리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상서로운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임칙서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삽니다. 임빈일은 서당 훈장이었는데,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서러움 때문에 임칙서의 교육에 열과 성을 바쳤죠. 임칙서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흥해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이때 임칙서의 나이 27세였죠. 이후 그는 지방 곳곳에서 여러 행정직을 거치며 관리로서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인력을 모아 재해를 입은 지역을 복구해 백성들을 구제했으며, 탐관오리의 비리를 척결해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했죠. 상인들에게 자유롭게 소금을 팔도록 허용해서 지방 경제도 살렸고요. 임칙서를 존경한 백성들은 청백리로 유명했던 판관 포청천의 이름을 따서 '임청천'이라 불렀습니다.
임칙서의 초상화, 그는 당대에 청백리로 칭송받았지만 아편 전쟁이 발발한 후 전쟁을 일으킨 원흉으로 비난받았다(출처: 바이두)
아편을 근절해야 한다
임칙서가 모든 상업 행위를 허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832년부터 1838년까지 강소 순무와 호광 총독을 잇달아 맡은 임칙서는 아편 문제에 모든 신경을 기울였죠. 항상 승승장구하며 산 것 같지만, 임칙서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었거든요. 인재라고 촉망받던 형이 아편에 중독되어서 목숨을 잃었지요. 문제는 아편을 피우다가 병에 걸리고 목숨을 잃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임칙서는 아편의 수입과 거래를 전면 금지하는 '엄금론'을 펼쳤습니다. 마침 청나라 조정에서는 엄금론과 아편 판매를 합법화하되 세금을 거두자는 이금론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임칙서는 도광제에게 상소를 올려 엄금론을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추진 방안 여섯 가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였죠. 도광제는 현실적이면서 추진력 강한 임칙서를 눈여겨봅니다. 그리고 1838년 12월, 임칙서는 황제의 명을 받아 흠차대신이 되어 광주로 파견됩니다. '아편 근절'이라는 무거운 의무를 진 임칙서는 1839년 1월, 광주로 향합니다. 광주는 예전부터 외국 상인들이 들어와 아편 무역을 행하던 곳이었죠. 흠차대신이란 황제가 잠시 전권을 맡기는 벼슬직으로 흠차대신의 명은 황제의 명이나 다름없는 것이고요. 황제가 임칙서에게 얼마나 기대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편을 모두 물 속에 던져라
흠차대신이 된 임칙서는 아편의 실태를 조사한 뒤, 4천 명가량의 청나라 아편상을 체포하고 아편 3천 근을 몰수합니다. 이 사태를 목격한 영국 아편상들은 뇌물을 주려 하지만, 임칙서는 강하게 거부합니다. 그리고 영국 아편상의 아편도 몰수한 뒤, "다시는 아편 밀매를 하지 않겠다. 또 아편을 팔면 목숨을 내놓겠다."라고 서약서를 쓰게 합니다. 영국인들은 아편 1,000상자를 주고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임칙서는 이미 그들이 2만 상자가 넘는 아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임칙서는 병사들을 보내 영국인이 사는 지역을 포위하고 모든 물자를 차단했습니다.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영국 아편상들은 아편 2만 상자를 모두 내주었습니다. 임칙서는 항구 근처에 연못을 판 뒤 아편 상자를 모았습니다. 몰수한 아편을 물에 쏟아붓고 석회를 섞어 녹인 뒤, 모두 바다로 흘려보냈습니다. 20여 일이 걸리는 작업이었죠. 그리고 영국 무역 감독관 엘리엇에게 아편 한 상자당 찻잎 다섯 근씩 쳐서 보상해 주겠다고 합니다. 선심을 쓴 거죠. 하지만 엘리엇은 분통을 터뜨리고 영국 의회에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합니다.
1839년, 아편을 물 속에 던지는 모습(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아편전쟁의 시작
서양의 사정을 잘 아는 임칙서는 영국 측에서 어떤 대응을 할지 예측합니다. 일찌감치 서양 선교사들을 초빙해 서양의 실태와 서양의 군사학에 대해 알아둔 덕분이었죠. 임칙서는 전쟁을 피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전쟁 준비를 합니다. 서양식 대포와 상선을 사들이고 자체적으로 증기선과 자주포까지 만들어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국의 지리백과사전을 번역해서 『사주지(四洲志)』를 발간합니다. 『사주지(四洲志)』에는 세계 30여 개 국가의 지리, 역사, 정치 상황이 상세히 적혀 있는데, 청나라 사람들에게 서방 세계를 알리기 위한 의도였죠. 그리고 백성들의 사기를 높여 직접 참전하게 합니다. 또한 영국 군대가 조정을 공격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염려했죠. 그래서 청나라 조정에 상소를 보내, 영국과 전면전을 펼치면 승리하기 어려우니 유격전을 펼쳐야 하고, 북경의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청합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무시합니다. 임칙서는 좌절하지 않고 빅토리아 여왕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아편 무역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서였죠. 아래는 편지의 발췌문입니다.
폐하의 영예로운 나라가 우리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물을 빼앗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확보할 뿐 아니라, 그 생산물을 다른 나라에 다시 팔아서 세 배의 이익을 올리는 상황입니다. 아편을 파는 사람이 여왕이라면, 그 이익은 모두 여왕께 돌아갈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마약 판매를 승인하실 수 있습니까? 계속 이익이 들어오니, 욕망도 끝이 없는 것 아닙니까! 외국인들이 아편을 피우라고 영국인들을 유혹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나라의 군주인 폐하께서도 이에 분노하시어, 아편을 없애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1839년,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패전의 책임을 지다
영국 의회 내에서도 아편 때문에 청나라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도덕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찬성하는 의원들이 더 많았죠. 1840년 6월, 영국 군함이 광주를 습격하면서 아편전쟁이 시작됩니다. 임칙서는 준비해 놓은 무기를 깔아놓고 침략에 맞섭니다. 청나라 군대와 백성들이 매섭게 저항하자, 영국군은 광주에서 물러납니다. 대신 영국군은 천진을 함락시키고 황제가 있는 북경으로 향합니다. 결국 북경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조정 대신들은 임칙서에게 전쟁의 책임을 떠넘깁니다. 도광제도 이들의 말에 동의해 임칙서를 파면합니다. 임칙서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물러납니다. 새로운 흠차대신이 된 기선은 엘리엇과 조약을 맺어 영국군의 북경 진군을 막았습니다. 피해를 입은 영국 상인들에게 보상해주겠다는 조건으로요. 하지만 강경파들이 득세하면서 기선도 파면당하고 아편전쟁이 다시 시작됩니다. 기강이 해이해진 청나라군은 최신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1842년 8월 29일, 도광제는 영국과 난징 조약을 체결합니다. 홍콩 할양, 다섯 개 항구 개항, 배상금 지급, 공행 제도 폐지 등 청나라에 불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죠.
미완성된 충신의 죽음
파면된 임칙서는 신장 지방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유배지에서 위구르 백성들과 교류하다가 '카레즈'라는 수리 시설을 알게 됩니다. 사막 지역에서 이용하는 수로로, 땅을 뚫고 물을 공급하는 시설이죠. 임칙서는 카레즈만 있으면 눈밭에 물을 끌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카레즈를 보급하는 일에 주력합니다. 그 결과 신장이 비옥해지고 조정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1845년, 유배 생활에서 풀려납니다. 그는 다시 정계에 복직했죠.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2년 만에 사임하고 고향에서 머무릅니다. 한편 1850년, 황실에서는 도광제가 죽고 함풍제가 즉위합니다. 당해 12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임칙서는 다시 흠차대신이 되어 난을 진압하러 갑니다. 하지만 임칙서는 임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병사합니다.
복주(푸저우)에 있는 임칙서 기념관(출처: 위키백과)
중국사를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임칙서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사 교과서를 훑어보면 한 줄 정도로 언급되는 인물이거든요. 저는 학창시절, 세계사를 공부할 때 '아편을 밀수해 영국에 전쟁을 선포한 인물'로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청나라가 계속 패배하는 장면만 나오니, 임칙서하면 '괜히 객기를 부리다가 청나라를 몰락하게 만든 사람'이라고 생각했죠. '중화사상에 찌들어 영국을 무시한 인물'이라고도 느껴졌고요. 게다가 청나라는 아편을 근절하지도 못했고 서구 열강이 개입할 빌미만 주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실패한 인물'이었죠.
하지만 자료를 조사한 결과, 임칙서는 19세기 서방 세계의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서양의 무기를 들여 '양무운동'의 발판을 닦고요. 임칙서가 발간한 [사주지(四洲志)]는 임칙서의 친구가 수정하여 [해국도지(海國圖志)]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해국도지(海國圖志)]는 조선의 흥선대원군과 일본의 유신지사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요.
임칙서가 당대 조정에서 비판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지나치게 원리원칙을 중시했습니다. 임기응변이 부족했죠. 그래서 그는 아편 전쟁이 발발한 후, 아편 전쟁을 일으킨 원흉으로 비난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말기에 아편 근절 운동이 전개되면서 그의 명성은 회복되었죠. 영국 내에서도 임칙서를 존경하는 신학자가 나타나기도 했고요.
청렴결백하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외세와 맞선 인물이기 때문일까요? 현재 임칙서는 중국인에게 '민족 영웅'으로 극찬받는 인물입니다. 시진핑과 장쩌민 같은 정치인들은 '애국지사'로 찬양하기까지 했습니다. '관료들에게 비판받고 백성들에게 존경받은 인물'이라는 평도 있고요. 대만에서도 6월 26일을 '아편 근절의 날'로 삼아 임칙서의 업적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복주에는 임칙서의 기념관이 있고 미국 차이나타운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의 애국심과 강직함이 후대에 빛을 발한 것이지요.
<참고 문헌 및 자료>
강정만, 『청나라 역대 황제 평전』, 주류성, 2019.
이명랑, 『임칙서, 중국을 지켜라!』, 웅진다책, 2010.
이영옥, 「아편전쟁 시기 도광제의 아편정책」, 『동양사학연구』, 동양사학회, 2000.
이준범, 『Who? 인물 중국사: 임칙서&홍수전』, 다산어린이, 2020.
Madancy, Joyce A, 『The Troublesome Legacy of Commissioner Lin: The Opium Trade and Opium Suppression in Fujian Province, 1820s to 1920s』,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3.
W. Travis Hanes & Frank Sanello, 『The Opium Wars: The Addiction of One Empire and the Corruption of Another』, Sourcebooks; 1st edition, 2004.
위키백과, 해국도지, https://ko.wikipedia.org/wiki/%ED%95%B4%EA%B5%AD%EB%8F%84%EC%A7%80
Wikipedia, Cohong, https://en.wikipedia.org/wiki/Cohong
Wikipedia, Destruction of opium at Humen, https://en.wikipedia.org/wiki/Destruction_of_opium_at_Humen
Wikipedia, East India Company, https://en.wikipedia.org/wiki/East_India_Company
Wikipedia, First Opium War,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Opium_War#European_trade_deficits
Wikipedia, Lin Zexu, https://en.wikipedia.org/wiki/Lin_Zexu#cite_ref-7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낸 편지 출처>
Fordham University, Modern History Sourcebook: Commissioner Lin: Letter to Queen Victoria, 1839, https://sourcebooks.fordham.edu/mod/1839lin2.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