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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ul 30. 2021

쉬운 것 같기도 하고 어려운 것 같기도 한 정치판

영국(근대): 소(小) 윌리엄 피트(1)

영국은 21세기에도 왕실이 있는 국가입니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로 알려진 입헌군주제 국가이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영국이 입헌군주제 국가였던 것은 아닙니다. 영국은 왕실과 의회가 대립하다가 1689년, '권리장전'을 제정하면서 입헌군주제를 도입했습니다.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에 반발한 의회가 제임스 2세를 축출하고 윌리엄 3세&메리 2세를 옹립하면서 권리장전을 제정한 것이죠. 이후 점점 왕의 권한이 축소되다가, 조지 1세 때부터 수상에게 통치를 위임하면서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내각에서 정치를 하는 구조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렇게 국내 정세가 안정되자, 영국은 해외에 눈독을 들이면서 팽창 정책을 펼칩니다. 아일랜드부터 시작해,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죠. 그래서 흔히 영국하면, 좋게 말하면 '대영제국', 나쁘게 말하면 '침략국'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강하기만 했던 영국도 침략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폴레옹의 침략이었죠. 당시 유럽에서 7년 전쟁-미국 독립 전쟁-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같이 굵직한 사건이 터지면서 영국의 정세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은 기세등등한 영국의 자부심을 깎아내렸죠. 당시 영국의 국정을 주도한 소(小) 피트 수상은 어떻게 난국을 해결해 나갔을까요? 



영국 최초의 부자(父子) 수상

소(小) 피트의 본명은 윌리엄 피트로, 1759년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이름도 윌리엄 피트이고 아버지 역시 영국 수상직에 재임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 소(小) 피트라고 불립니다. 아버지는 대(大) 피트라고 불리고요. 피트 부자 모두 조지 3세 시대에 재임했던 수상들이었습니다. 조지 3세는 1760년 23세에 왕위에 오른 뒤 1820년까지 60년간 재위했기에, 그만큼 조지 3세 시대를 거쳐간 수상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조지 3세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760년대, 7명의 수상이 경질되었습니다. 왜 수상이 이렇게 많이 바뀌었을까요? 조지 3세는 선대왕들과 달리 영국 태생의 왕으로 영국 내정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수상임명권을 국왕이 쥐고 있었는데, 조지 3세는 국정을 주도하기 위해 수상임명권을 남발했기 때문이죠.


영국&하노버 국왕 조지 3세, 그는 실질적인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 군주였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대(大) 피트의 사임

조지 3세가 왕위에 오를 때 대(大) 피트는 국방장관이었습니다. 대(大) 피트는 한창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던 전쟁(일명 7년전쟁)에서 영국의 승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편으로 나누어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영국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었죠. 그러나 대(大) 피트는 왕에게 실언을 합니다. 조지 3세에게 하노버 선제후령은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프로이센에게 주고 우리는 식민지 관리나 잘 하자고 말한거죠. 하노버는 당시 영국 왕실의 뿌리였습니다. 조지 3세의 증조할아버지이자 하노버 왕조의 시초인 조지 1세가 하노버 출신이었거든요. 당연히 조지 3세는 격분했고, 1761년 대(大) 피트는 사임했습니다. 피트와 연립 내각을 이끌던 수상 뉴캐슬 공작도 대(大) 피트가 사임할 때 같이 사퇴했죠. 대(大) 피트와 함께 7년전쟁에서 승기를 잡는데 일조했으나, 대(大) 피트가 조지 3세의 미움을 사자 수상 직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은 자신이 가장 총애하던 뷰트를 수상 자리에 앉혔습니다.



뷰트의 치세, 7년전쟁의 종결

왕은 중요한 것을 간과했습니다. 바로 여론이었죠. 7년전쟁을 치르느라 국고가 비어버린 상황인데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던 피트-뉴캐슬 내각을 왕이 마음대로 해산시키자 여론이 악화되었습니다. 왕은 여론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재정 부족을 이유로 프로이센에 재정 지원을 끊어버렸습니다. 프로이센의 군인들 상당수는 용병이었기에 애국심을 고취시키려면 돈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죠. 자금이 부족해진 프로이센은 패배 직전에 몰렸습니다. 그 여파로 영국(하노버)-프로이센과 대치했던 프랑스가 하노버로 진격하는 사태가 발생했죠. 여론은 겉잡은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됩니다. 뷰트는 파리 조약을 맺어서 7년전쟁을 종식시켰지만, 비어버린 국고를 채우기 위해 식민지였던 미국에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어들이면서 미국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틈을 타 영국 의회에서는 "뷰트와 국왕이 짜고 우리의 권한을 침해하려 한다"라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뷰트는 1763년 4월 수상직에서 사임하고 뷰트 내각은 급작스레 무너졌습니다. 조지 3세는 무능한 자를 수상에 앉혔다고 비난당했죠. 하지만 조지 3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국정에서 손을 놓지 않았죠. 왕은 자신의 측근이자 대(大) 피트의 처남인 조지 그렌빌을 수상으로 임명합니다.



10년의 치세, 6명의 수상

그렌빌은 영국 국고를 다시 채우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칩니다. 미국에 곡물, 홍차, 담배 등에 세금을 더 부과하려다가 반발이 심해졌죠. 결국 1765년, 조지 3세에 의해 해임당합니다. 로킹엄 후작이 뒤를 이었으나 미국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로킹엄은 1년 만에 물러났습니다. 1766년 조지 3세는 하원에 있던 대(大) 피트를 수상으로 임명합니다. 하지만 수상이 된 대(大) 피트는 미국에 대해 유화정책을 펼치려 했고, 미국에 세금을 늘려 국고를 채우려 한 의회와 부딪혔습니다. 더구나 대(大) 피트는 상원으로 옮기면서 그의 지지기반을 잃게 됩니다. 결국, 1767년 대(大) 피트는 사임하고 1년 후, 그래프턴이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래프턴도 미국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1770년에 물러났습니다. 이렇게 10년 동안 6명의 수상이 재임했고, 정국은 정국대로 불안해졌습니다.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대(大) 피트), 소(小)피트의 아버지이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잠시 안정되는 듯했으나

1770년, 조지 3세는 소꿉친구였던 노스 경을 수상으로 임명했습니다. 노스는 12년간 수상직에 재임하면서 내각을 안정시켰습니다. 조지 3세는 말 잘 듣는 사람을 수상으로 임명해서 사실상 친정을 펼쳤죠. 그러나 노스가 미국인들의 차(茶) 밀무역을 금지시키고, 영국 동인도회사가 차무역을 독점할 수 있도록 하자 미국인들의 분노는 폭발합니다. 미국인들은 미국 보스턴 항구에 정박 중이던 동인도회사 선박을 습격하여 차를 모조리 던져버렸습니다. 일명 '보스턴 차 사건'이 벌어진 거죠. 1775년 영국과 미국은 전쟁을 벌였으나,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미국 편을 들면서 영국에 불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의회는 전쟁을 끝내자고 했으나 조지 3세는 전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죠. 결국 영국은 전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여론이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자 노스는 거듭 사퇴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친정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왕은 노스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노스는 왕의 의도를 무시하고 사퇴합니다. 충격을 받은 왕은 로킹엄을 수상에 앉혔으나 로킹엄이 몇 달 내에 죽자 셸번을 수상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자 왕을 늘 비판하던 휘그당의 폭스가 셸번을 물러나게 하고 포틀랜드 공작을 수상으로 임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1783년 셸번은 강제로 물러나고 포틀랜드가 수상으로, 폭스와 노스는 각각 외무장관과 내무장관이 되었습니다.



조지 3세의 반격

조지 3세는 거침없는 성격인 폭스를 싫어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를 장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죠. 하지만 포틀랜드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과반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노스와 폭스는 '동인도회사 개혁안'을 내놓았습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무역을 하면서 많은 이익을 차지했으나 민간회사였기 때문에 정부에는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인도 회사를 관영 회사로 전환시키는 개혁안을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회사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회사로 바꾸겠다는 것이지요. 조지 3세도 동인도회사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을 원했지만, 하필 개혁안을 폭스가 내세운 점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더구나 노스와 폭스는 공직 임명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동인도회사의 관리자를 저들이 원하는 자들로 채워넣을까 봐 염려합니다. 조지 3세는 의회에 가서 이 법안을 승인하는 의원은 '국왕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선포합니다. 결국 상원에서는 법안이 부결되었고 3일 후 노스-폭스 내각은 해산됩니다. 폭스를 비롯한 각료들이 줄줄이 사퇴하고 국왕의 위신을 되찾은 조지 3세는 새로운 수상감으로 소(小) 윌리엄 피트를 지목했습니다. (2편에서 계속)


소(小) 윌리엄 피트의 1783년 모습(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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