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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Jul 24. 2021

나라를 가정(嘉靖)하는 것이 신(臣)의 소임이옵니다

중국(명나라): 해서

시법에 따르면, '세(世)'라는 글자는 군주의 업적을 크게 치하할 때 쓰입니다. 태(太)가 국가를 세우고 기틀을 잡는 군주에게 쓰였다면, 세(世)는 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에게 쓰이죠. 그래서일까요. '세종(世宗)'이라는 묘호를 보면, '뛰어난 업적을 이룬 성군'을 떠올립니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청나라의 세종 옹정제, 금나라의 세종이 대표적이죠. 하지만 예외도 있습니다. 바로 명나라의 세종 가정제이죠. 가정제는 도교에 심취하여 정사를 소홀히 하고 외적의 침입을 수수방관한 암군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왜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을까요? 명나라에 성군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을텐데요. 가정제 말기에 등장한 충신 해서의 일대기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명나라의 쇠락, 도탄에 빠진 백성들

16세기 명나라는 세종 가정제가 통치하던 시기로 상당히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선대 황제였던 무종 정덕제때부터 지배계층이 부패하면서 백성들이 살기 힘들어졌죠. 정덕제는 은자 24만 냥을 들여 호화로운 별궁을 짓고 사치와 향락에 심취하였습니다. 정덕제의 총애를 받은 환관들이 조정을 농락했고요. 정덕제의 후임인 가정제는 한술 더 떴습니다. 도교를 신봉해 제례용으로 황랍 20여만 근, 백랍 10여만 근을 소모했을 뿐 아니라, 불사의 약을 만든답시고 허구한 날 궁녀들의 월경혈을 짜냈습니다. 매일 피를 바치느라 고통스러워한 궁녀들은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궁녀들은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충격에 빠진 가정제는 도교에 더 심취해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 틈을 타 엄숭이라는 환관이 가정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을 전횡합니다. 엄숭은 시찰 나갈 때마다 거하게 대접받고 값비싼 뇌물을 요구하니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명나라 제11대 황제 세종 가정제의 어진, 인터넷상에서 명나라 4대 암군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출처: 바이두)



해서의 등장

난세에는 충신이 등장하는 법일까요? 이때 해서가 등장합니다. 해서는 1550년 37세에 1차 시험에서 합격한 뒤 지방 하급 관료로 관직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법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평현에서 교편을 잡았었는데, 명나라 법에 따르면 스승은 학도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안 되었습니다. 해서는 법을 지켜서, 서원에서 학도를 만날 때 무릎을 꿇지 않고 읍만 했지요. 옆에서 학도 두 명이 무릎을 꿇으니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조롱했습니다. 


16세기 명나라 황실 가계도



포청천의 재림, 해청천

1558년, 해서는 순안을 관리하는 지방 관료가 됩니다. 그는 토지를 다시 측량해 세금이 제대로 걷히도록 하고, 부역에 관한 비리를 줄여서 백성들의 고통을 줄였습니다. 뇌물수수를 엄격히 금지하고 본인도 상관에게 막걸리 외에 비싼 뇌물을 바치지 않았죠. 억울한 백성들의 사연도 일일이 귀담아듣고요. 그래서 백성들은 부패한 관료들을 척결했던 판관 포청천의 이름을 따서, '해청천(海靑天)'이라고 칭송하였죠. 해서는 옷차림을 소박하게 갖추고 먹을 것은 직접 밭에서 재배하는 등 청렴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녹봉 외에는 금품 하나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고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지요. 남편을 여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식을 훌륭하게 교육한 어머니였기 때문입니다. 해서는 효(孝)와 충(忠)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연무경의 본성을 간파하다

해서의 강직한 성품을 잘 드러내는 일화가 있습니다. 두 번째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가정제 시대 환관 엄숭이 전횡을 부리던 시기였습니다. 해서가 관리하는 지역에 어사 언무경이 시찰을 보러 내려옵니다. 언무경은 엄숭의 양아들로, 해야 할 임무는 하지 않고 뇌물만 요구하던 인물이었죠.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청렴한 척하며 해서에게 간소하게 대접하라고 명합니다. 언무경의 인품을 알고 있는 해서는 언무경에게 "소문에 따르면 어사님이 이르는 곳마다 성대한 연회가 벌어진다고 하는데, 어사님 말씀대로 대접하면 너무 무례한 것 아닙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의 본성을 간파당한 언무경은 이를 갈았지만, 해서의 인품과 민심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으로 내려갑니다. 이후 언무경이 황제에게 해서를 참소하니, 해서는 관직을 내려놓게 되었죠.



중앙관료의 길을 걷다

엄숭이 탄핵당하고 언무경이 유배를 가자, 해서는 복직합니다. 해서의 강직한 성품과 유능함이 널리 알려지자, 해서는 1567년 53세에 호부주사로 발탁되어 서울로 올라갑니다. 그는 가정제에게 국정쇄신을 요구하는 상서를 올립니다. 도교에 심취해 정사를 돌보지 않는 가정제를 비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상소 내용이 워낙 비유적이고 직설적이라서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백성들이 가정합니다

해서는 상소에 '백성들이 가정(家淨)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집 가(家)'와 '깨끗할 정(淨)'을 나란히 붙이면 '집안이 깨끗하다'라는 의미이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이 너무 가난해서 세간살이를 다 팔아치우니 집안이 깨끗해졌다'라는 뜻이지요. 황제에게 '네가 정치를 지지리도 못해서 백성들이 이만큼 가난해진 거야'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정(家淨)'은 황제의 연호 '가정(嘉靖)'과 동음이의어였죠. '가정(嘉靖)'은 '경사스러울 가(嘉)'와 '편안할 정(靖)'자였으니, 황제의 연호를 비틀어서 대놓고 황제를 비판한 것이었습니다(참고로 연호란 황제가 즉위할 때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칭호입니다. 가정제의 경우, 즉위한 지 1년 뒤에 연호를 붙였지만요). 가정제는 상소를 내동댕이칩니다. 갈갈이 날뛰며 당장 해서를 잡아오라 명령하지만, 신하들이 "해서는 식솔들과 이별한 뒤 관을 짜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서 자신도 이 상소를 올리면 죽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간언합니다. 결국 가정제는 해서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가두고 고문만 합니다.


해서(海瑞)의 초상화, 그는 해청천이라는 별칭이 붙었다(출처: 바이두)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면하다

하늘이 해서를 도운 것일까요? 해서가 감옥에 있을 때, 가정제가 죽었습니다. 신하들이 해서의 처형을 말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처형을 미루다가 죽고 만 것입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옥리들이 해서에게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해서는 처형 직전에 위로하려고 주는 만찬이라고 여기고 먹었습니다. 나중에 가정제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먹었던 것을 토하고 황제의 죽음을 애도했죠. 해서의 강직한 성품 때문일까요? 융경제가 즉위한 뒤 해서는 석방됩니다.



개혁을 하려고 했으나

1569년, 해서는 관직을 얻고 지방으로 다시 내려갑니다. 해서는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지주가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주 중에 서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곤은 가정제가 해서를 처형하려 할 때 적극적으로 만류했던 서계의 아들이었습니다. 즉, 서계 가족은 해서에게는 생명의 은인이었죠. 서계는 온갖 회유를 했지만 해서는 원래 주인에게 토지를 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토지를 빼앗은 인물이 서계 한 명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난 일이었기에 증거나 대상자가 불분명했습니다. 결국, 토지반환정책은 흐지부지되고 해서는 서계 일파의 모함에 의해 당해 12월에 파직됩니다.



만백성의 청백리

해서는 16년간 관직생활을 하지 않고 고향에서 삽니다. 이와 중 융경제가 세상을 떠나고 만력제가 제위에 오릅니다. 만력제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장거정이 섭정을 합니다. 사람들은 해서를 수없이 천거했지만 엄숭&서계와 친분이 있었던 장거정은 해서의 강직함을 꺼려 그를 천거하지 않았습니다. 1585년 장거정이 죽은 뒤, 만력제가 해서에게 관직을 제수합니다. 해서는 다시 서울로 올라갑니다. 하지만 2년 뒤,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매우 슬퍼했습니다. 워낙 청렴결백하게 살았던 통에 장례식을 치를 돈이 부족하자 조문객들이 앞장서서 장례비를 모았다고 하니, 해서가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존경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해서가 죽은 뒤, 충개(忠介)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충성할 충(忠)', '강직할 개(介)'였으니 해서의 가치관과 잘 어울리는 시호라고 생각합니다. 해서는 어릴 때부터 큰 벼슬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유가 경전을 읽으며 성현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는 목표대로 성현이 되어서 만백성의 칭송을 받았죠. 어쩌면 가정제에게 '세종'이라는 묘호가 내려진 이유는 해서라는 충신의 목숨을 살린 덕택일지도 모릅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요.  


해서의 업적을 돌이켜보면, 떠오르는 명언이 있습니다. 노자 『도덕경』 18장에 나오는 "가정이 화목하지 않으면 효의 자애가 있게 되고, 나라가 혼란하면 충신이 있게 된다." 라는 명언이지요. 노자는 효(孝)와 충(忠)을 거부합니다. 강요된 효와 충은 의미가 없고, 마음속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감정만이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효와 충을 모두 지킨 신하의 이름을 말하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신하들이 있지요. 해서도 그 중 한 명이고요. 왜 이들의 이름은 2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회자될까요? 나라가 혼란스러울수록 간신들이 많아지니, 충신을 갈망하는 것 아닐까요. 당연한 진리를 당연하게 행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니까요. 현대 사회가 민주정으로 접어들면서 효와 충이 빛바랜 감이 있지만, 나라와 부모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공직에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항이지요. 효와 충이 자연스레 행해지는 사회가 되어서, 효와 충이 더 이상 강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드 <대명왕조1566>에 나온 해서(海瑞) (출처: 바이두)



<참고 문헌 및 자료>

강정만,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 주류성, 2017.

이태준, 「조선의 박수량(朴守良)과 명나라 해서(海瑞)의 반부패 행적 및 청렴성 비교 연구」, 『아시아문화연구36』,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4.

Ernst Wolff, 『A Preliminary Study of Hai Rui: His Biography in the Ming-Shih』, University of Illinois. 

위키백과, 묘호, https://ko.wikipedia.org/wiki/%EB%AC%98%ED%98%B8

Wikipedia, Hai Rui, https://en.wikipedia.org/wiki/Hai_Rui

Wikipedia, Jiajing Emperor, https://en.wikipedia.org/wiki/Jiajing_Emperor

维基百科, 海瑞, https://zh.wikipedia.org/wiki/%E6%B5%B7%E7%91%9E

维基百科, 『明史』, https://zh.wikipedia.org/wiki/%E6%98%8E%E5%8F%B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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