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오스만 제국의 꿈>이라는 드라마가 방영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을 다룬 팩션다큐이지요. 드라마를 방영하면서 전문가가 나와서 해설을 해줍니다. 픽션이 섞였지만, 동로마와 오스만 입장을 모두 고려한 균형잡힌 관점으로 전개되지요. <오스만 제국의 꿈>은 제목에 걸맞게 메흐메트 2세가 주인공입니다. 그는 제2의 알렉산더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계획합니다. 메흐메트에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장애물이었지요. 그는 뛰어난 외교술과 추진력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합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위해 처절히 맞섭니다. 사실, 콘스탄티노스에게는 살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메흐메트는 콘스탄티노플만 넘겨주면 모레아의 총독으로 임명해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콘스탄티노스는 거부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이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도 했지만, 천 년의 역사를 유지하고 있는 동로마의 수도였으니까요. 선조들이 물려준 유산을 함부로 적군에게 넘겨줄 수 없었지요. 결국 수성전에 들어가고, 콘스탄티노스는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죠. 서유럽에서 도움을 줄 것이라고 희망고문하지만, 배는 오지 않았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당합니다. 콘스탄티노스는 전사하고, 2200년 로마의 마지막 황제로 이름을 남깁니다. 워낙 영화와 같은 순간이었기에,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죠. <오스만 제국의 꿈>이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고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하면 떠오르는 대표 인물 메흐메트 2세는 추진력 있고 정복욕이 강한 인물입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애국심과 책임감이 강한 인물이고요. 특히, 콘스탄티노스의 경우 친왕 시절 군공을 세운 적이 있기에 만일 멸망 직전이 아니라 전성기 시절에 태어났다면 명군이 될 것이라는 가정도 있지요. 그런데 그것 아시나요?메흐메트의 추진력&정복욕과 콘스탄티노스의 애국심&책임감을 모두 갖춘 인물이 동로마의 전성기 시절에 있었다는 것을요. 정확히는 난세를 극복하고 막 기지개를 펴던 시기지만요. 그는 바로 콤니노스 왕조 때 나타난 세 명의 현군을 충실히 보필한 명장 요안니스 악수흐입니다. 동로마가 중흥기를 맞이한 시절, 악수흐의 능력은 언제, 어떻게 빛을 발할까요?
콤니노스 왕조의 가계도, 콤니노스 중흥기를 이끈 세 명의 현군은 노란색으로 칠했다.
튀르크족 포로에서 황제의 절친으로
요안니스 악수흐(이하 악수흐)는 1087년 니케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로마 역사가 요안니스 킨나모스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그를 튀르크인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악수흐가 페르시아인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니케아는 룸 술탄국의 지배를 받았고, 동로마 역사가들은 동방의 인물들을 뭉뚱그려 '페르시아인'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저는 악수흐가 튀르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악수흐는 원래 포로 출신이었습니다.1097년 1차 십자군이 니케아를 점령했을 때 알렉시오스 1세에게 포로로 바쳐졌지요(1차 십자군 시작 과정은뛰어난 역사가, 처가의 그늘에 묻힌 충신에 나옵니다). 알렉시오스는 비록 포로였지만 악수흐가 총명하고 충직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를 가신으로 키우기로 결심합니다. 이후 악수흐는 황실에서 자라다가,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이자 공동황제였던 요안니스(훗날 요안니스 2세)를 만납니다.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주군과 가신의 관계를 넘어 소울메이트가 됩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요안니스 2세, 그는 '마음이 아름다운 황제'로 유명했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황제와 황녀의 화해를 중재하다
1117년 알렉시오스는 붕어하기 전, 요안니스를 후계자로 지목했습니다. 요안니스의 누이 안나가 남편을 황제로 올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그러나 매형 브리엔니오스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고 안나의 죄를 고발했지요(뛰어난 역사가, 처가의 그늘에 묻힌 충신의 주인공 브리엔니오스입니다). 단독황제가 된 요안니스는 안나의 재산을 몰수하고 유폐하는 선에서 끝냅니다. 그는 '마음이 아름다운 황제'이니까요. 요안니스는 안나의 재산을 악수흐에게 양도합니다.하지만 악수흐는 정중히 거절합니다. 황녀의 재산을 받는 순간, 황족들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귀족들의 견제를 받게 될 것은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지요. 그는 주군에게 안나를 용서해달라고 요청하면서, 황제 남매의 화해를 주선했습니다. 요안니스는 몰수한 재산을 안나에게 돌려줍니다. '자비로운 황제'라는 이미지를 구축해 민중의 인기도 확보하고요. 요안니스의 불안했던 황권을 안정시키는 데 악수흐가 어느 정도 일조한 셈입니다.
라오디키아 수복 작전
당시 동로마는 선황 알렉시오스 1세가 방어 전선을 구축한 덕에 좀 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한마디로, 옛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차지했던 고토를 수복하겠다는 야망을 품을 수 있었던 거죠. 요안니스는 정복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악수흐를 제국군 총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동로마 내 최고위직을 맡은 악수흐의 위세는 하늘을 찌릅니다. 황실에서 그를 만날 때면 모두 고개를 숙여야 했죠. 이제 그의 위세를 활용할 시기가 다가옵니다. 룸 술탄국의 아부 샤라가 항구 도시 아탈레이아와 니케아 사이에 있는 라오디키아를 차지합니다. 강을 건너려면 우회해서 육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죠. 1119년, 요안니스는 라오디키아를 수복하기 위해 출정하기로 결심합니다.황제의 중앙군이 도착하기 전에, 악수흐는 선봉대를 이끌고 라오디키아를 포위합니다.아부 샤라는 수성을 포기하고 도망칩니다. 이때 요안니스가 옵니다. 요안니스는 방어벽을 쌓아서 적이 다시 오지 못하게 했죠. 그런데 갑자기 요안니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습니다. 아마 쿠데타가 터진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수도를 오래 비우기 불안해서 돌아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제 중앙군은 악수흐가 맡게 됩니다. 악수흐는 아탈레이아 북쪽 50km 지점에 있는 소조폴리스를 정복하고, 마이안데르 강 지대의 요새들을 손에 넣었습니다.그 덕에 아탈레이아를 잇는 육로가 다시 연결되었고 악수흐는 원정의 성과에 흡족해합니다.
검은 원이 니케아(현: 이즈미르), 주황 원이 아탈레이아, 니케아와 아탈레이아 사이의 빨간 네모가 라오디키아, 연두 강이 마이안데르, 초록 원이 콘스탄티노플(현:이스탄불)이다
위기에 빠진 황제를 구하다
1121년, 악수흐가 룸 술탄국과 전투를 치를 무렵 수도에 있는 요안니스는 급보를 듣습니다. 페체네그족이 콘스탄티노플과 가까운 트라키아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죠. 페체네그족은 30여 년 전, 선황 알렉시오스 1세에게 도륙당했기에 복수하려고 동로마로 진격한 것이죠. 하지만 요안니스에게 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중앙군은 이미 악수흐에게 보냈기에 수중에는 3천~5천 명 정도의 병력밖에 없었거든요. 중앙군이 올 때까지 수도에서 기다릴지 고민했으나,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지 않은 요안니스는 소정의 병력을 가지고 트라키아로 진격합니다. 트라키아에서 페체네그족을 맞닥뜨린 요안니스는 이간질을 구사하고 많은 선물을 안기는 등 시간을 법니다. 페체네그족의 족장은 점차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요안니스는 그들과 협상을 하는 척하면서, 악수흐를 기다립니다.그리고 악수흐는 중앙군을 이끌고 페체네그족을 기습 공격합니다.
페체네그족을 전멸시키다
처음에는 동로마군에게 불리했습니다.황제도 약간 부상을 입을 정도였지요. 페체네그족이 수적으로 더 많았고 요새에서 화살도 끊임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거든요. 적군의 전차에 둘러싸인 황제와 악수흐는 아예 요새로 진격해 전차를 부수기로 결심합니다.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한 거죠. 둘은 병사들에게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명령한 뒤 양옆을 지키라 하고 도보로 진격합니다. 그리고 전차를 도끼로 부숩니다. 사기가 꺾인 페체네그족은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지만, 이미 화살과 보급품을 보관하던 전차가 부서진 상태라 전세는 페체네그족에게 불리하게 돌아갑니다. 이틈에 근위대가 도끼로 페체네그족을 공격합니다. 결국 페체네그족의 족장은 항복하고, 페체네그족의 포로들은 동로마군에 편입됩니다.
샤이자르를 주면 물러가리다
알렉시오스 1세 시절, 안티오크 공국의 보에몽은 데불 조약을 맺고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었습니다.하지만 보에몽이 죽고 레몽이 안티오크 공작이 되면서, 다시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요안니스는 레몽을 비롯한 라틴 귀족들을 격파하고 약탈로 응징하면서 다시 안티오크를 수복합니다. 라틴 귀족들은 샤이자르 를 봉토로 주면, 안티오크를 떠나겠다고 합니다. 샤이자르는 무슬림들이 차지한 영역이었는데, 요안니스는 저들을 샤이자르에 보내면 안티오크의 치안도 지킬 수 있고 안티오크와 무슬림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요안니스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악수흐&레몽&조슬랭과 함께 샤이자르를 침공합니다(뛰어난 역사가, 처가의 그늘에 묻힌 충신의 주인공 브리엔니오스도 참전합니다).
파란색이 안티오크, 초록색이 무슬림의 영역이다. 노란색으로 체크한 샤이자르는 안티오크와 무슬림 영역 사이에 있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샤이자르에서 승리했지만
공성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총사령관이었던 악수흐가 부상을 당할 정도였죠.하지만 레몽과 조슬랭은 안티오크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무슬림 세력과 가까이 있는 샤이자르로 이사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동로마군이 무슬림군과 치열하게 싸울 동안 레몽과 조슬랭은 주사위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국 무슬림 지원군이 도착하고 레몽과 조슬랭은 환호하니, 황제는 저들의 배신에 분노가 치밉니다. 이때 샤이자르 측에서 협상을 제안합니다. 황제의 봉신이 되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이죠. 심지어 70여 년 전 만지케르트 전투 때 빼앗긴 보물까지 건넸습니다. 요안니스는 무슬림과 협상을 진행합니다.그 덕에 그는 안티오크에서 간접적인 지배권을 확보했죠. 요안니스는 안티오크에 개선식을 치르면서 입성했지만, 안티오크를 직접 지배하고 싶어 했던 요안니스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레몽과 조슬랭은 황제를 몰아내기 위해 안티오크 내의 라틴인들을 선동합니다. 황제가 라틴인을 추방하고 동로마인에게 안티오크를 넘기려 한다면서요.
황제의 임종을 지키다
이때 요안니스는 룸 술탄국이 다시 동로마를 공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결국 황제는 두 사람에게 충성 서약만 받고 급히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 룸 술탄국을 격파합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안티오크에 갈 수 없었습니다. 매형 브리엔니오스와 장남과 차남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거든요. 설상가상으로 황제도 킬리키아에서 사냥을 하다가 독화살을 맞아 시름시름 앓게 됩니다. 그는 악수흐에게 명을 내립니다.막내아들 마누일을 후계자로 삼겠다고요. 악수흐는 셋째 아들 이사키오스가 적절한 후계자라고 명목상 설득합니다. 이사키오스가 형이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악수흐도 마누일이 적법한 후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성격 급한 이사키오스와 달리 마누일은 온화한 성품이었거든요. 악수흐는 병사들에게 황제의 명을 전합니다. 황제는 아픈 몸을 이끌고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마누일에게 직접 제관을 씌워주고 황제복을 입혀줍니다.요안니스는 사흘 뒤, 1143년 4월 8일에 세상을 떠납니다.
요안니스 2세의 동생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요안니스 2세의 셋째 아들 이사키오스와 동명이인이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마누일의 킹메이커
마누일은 많은 증인 앞에서 황제로 임명되었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 즉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황권이 불안정했습니다. 하지만 선황의 장례가 우선이었기에 현장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누일은 악수흐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형 이사키오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이사키오스가 반란을 일으키면 안 되니까요. 사실 마누일은 악수흐가 이사키오스와 친했기에 악수흐를 믿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이사키오스와 악수흐가 공모했다고도 생각했지요. 마누일의 의심을 눈치챘던 걸까요? 악수흐는 마누일의 예상을 깨고 명을 착실히 이행합니다.그는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선황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바로 이사키오스를 체포합니다. 항의하는 이사키오스를 감금한 뒤, 추방되었던 또 다른 이사키오스(알렉시오스의 둘째 아들, 즉 요안니스의 동생)도 체포하고요. 이제 악수흐는 마누일의 대관식을 치러줄 총대주교를 찾아다니기 시작합니다. 현직 총대주교가 얼마 전에 죽었거든요. 악수흐는 총대주교 후보자들에게 다양한 선물을 안겨준 뒤 새 황제가 매년 은조각 200개를 지급할 것이라고 전합니다. 이렇게 지지를 확보하자, 마누일은 아무 혼란 없이 수도에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됩니다.
황실 다툼에 휘말리다
대관식을 치렀다고 해서 황위를 노리는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누일의 매형 요안니스 루지에로가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다행히 마누일의 누이가 미리 남편의 음모를 알려서 마누일은 바로 매형을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궁중 암투가 일단락되자 마누일은 형과 삼촌 이사키오스, 사촌 안드로니코스(삼촌 이사키오스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갇혔어요)를 풀어주고 200파운드의 금을 교회에 헌납합니다. 그리고 1145년부터 1146년까지, 선황이 미처 끝내지 못한 안티오크 정벌에 나섭니다.그런데 원정 중, 황족들 간에 다툼이 벌어집니다.마누일의 형 이사키오스와 안드로니코스, 악수흐가 한자리에 있었는데 선황 요안니스와 현황 마누일 중 누가 더 무예 실력이 뛰어난지 논쟁을 벌였죠. 악수흐와 이사키오스는 요안니스를 지지했는데, 안드로니코스는 마누일을 지지했죠. 결국 이사키오스가 안드로니코스를 칼로 내려치는 상황까지 벌어집니다. 가신들의 중재 덕에 큰 싸움을 비화되지는 않았지만, 악수흐는 황족들의 다툼을 부추긴 죄로 더 이상 황제의 깃발을 들 수 없게 됩니다.
마누일 1세의 사촌 안드로니코스, 훗날 안드로니코스 1세로 즉위한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코르푸 탈환 작전
1148년, 마누일은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에게 빼앗긴 코르푸를 탈환하기로 결심합니다. 악수흐와 콘테스테파노스가 황제와 함께 원정에 참여했죠. 육군은 악수흐, 해군은 콘테스테파노스가 지휘했으나 콘테스테파노스가 전사하자 모든 군대는 악수흐가 지휘하게 되었죠. 그런데 코르푸에서 포위전을 벌이던 중, 베네치아 측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베네치아가 동로마 해군 함대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포위전이 장기화되자 베네치아 측에서 못 버티겠다고 한 거죠. 황제가 주력군으로 합류했는데도 갈등이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악수흐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는 폭동을 일으킵니다.결국 악수흐는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했죠.1149년, 악수흐는 코르푸를 포위해 노르만족을 굶겨서 항복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1~2년 뒤, 그는 오랜 전쟁에 지쳐 사망합니다.
1180년경 마누일 1세 치세 동로마의 지도, 연보라색이 동로마의 영역이다(출처: 위키백과)
"그는 전쟁에 능할 뿐 아니라 일할 때도 민첩하고 기민했다. 고귀하고 관대한 성품 덕에 그의 보잘것없는 신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1155~1213)
악수흐는 동시대 사람들에게서 많은 찬사를 받았습니다.대주교 미하일 이탈리코스는 그를 "로마 제국을 지탱하는 탑", "난공불락의 성벽"이라고 불렀습니다. 악수흐의 죽음 직후 태어난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도 위와 같은 찬사를 보냈고요.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모든 사람이 그를 찬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로마 황실 내에서 튀르크계 파벌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죠. 마누일도 악수흐를 적극 등용했지만, 이사키오스와 친분이 있었던 악수흐를 내심 믿지 못했고요. 결국 악수흐 사후 그의 자손들은 반란 혐의로 기소되었고 그와 연계된 귀족들이 망명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악수흐에게 많은 찬사를 보낸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입에 발린 말일 수도 있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소리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악수흐가 역사에 기록 남은 몇 안 되는 명장이자 충신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동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 서양에서 흔치 않은 절대군주제 국가이고, 중세 시대의 기사도 정신까지 더해져 '군인 황제'를 추구한 국가였기에, 황제부터 뛰어난 명장이었죠.그래서 황제 밑에서 활동한 장수들의 활약은 좀처럼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악수흐가 찬사를 받은 이유는 그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악수흐는 자신의 충정을 의심받을 때, 애국심과 책임감을 발휘했으니까요.그는 이사키오스와 친분이 있었지만, 벗이자 주군이었던 선황과의 의리를 유지하기 위해, 마누일이 더 적합한 황제감이라고 생각했기에 마누일을 황제로 받들었죠. 악수흐의 안목은 정확했습니다. 마누일은 선황이 이룩한 제국을 번성시켜, 훗날 대제의 칭호를 받았으니까요. 또한 악수흐는 황실 다툼에 휘말려 벌을 받았지만, 억울함을 표출하지 않고 원정에 참여해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의 영역을 회복하겠다는 포부가 있었고, 그 포부를 이루는 것만이 나라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비록 샤이자르는 정복하지 못하고 죽었지만요(샤이자르 정벌은 악수흐 사후 마누일이 합니다).난세를 극복하고 조국이 다시 부흥하려던 시기,개인의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나라를 위해 포부와 뚝심을 유지한 악수흐의 일대기를 여기서 마칩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 훗날 대제 칭호를 받는다(출처: 위키백과)
<참고 문헌 및 자료>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가람기획, 2003.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바다출판사, 2016.
Choniates, Nicetas,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ēs』, Detroit: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84.
Cinnamus, Ioannes, 『Deeds of John and Manuel Comnenus』, New York and West Sussex, United Kingdom: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6.
Magdalino, Paul, 『The Empire of Manuel I Komnenos, 1143–118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Treadgold, Warren, 『A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and Society』, Stanford, California: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