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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Oct 04. 2021

내 죄로 눈이 멀고, 눈이 멀어도 전장에 나가고

동로마(중세):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

<배경: 콘스탄티노플에 입장하는 루지에로 드 플로어(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동로마의 황제로 회귀하다』라는 역사대체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요안니스 4세로, 8살에 황제가 되어 11살에 폐위되었습니다. 이후 눈이 뽑히고 40여 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세상을 떠난 비운의 황제이죠. 어린 황제를 폐위시킨 장본인은 섭정이자 선황의 측근이었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로, 훗날 미하일 8세로 즉위하는 인물입니다. 30여 년이 지나서, 미하일 8세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가 황제가 된 뒤 요안니스를 찾아갑니다. 안드로니코스는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면서 요안니스에게 나를 진정한 황제로 인정해 줄 수 있냐고 묻습니다. 이미 중늙은이가 된 요안니스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사료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때,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갑니다. 30여 년 전, 미하일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하루 전날로요. 주인공의 영혼은 노인이지만, 몸은 11살 어린아이였던 것이죠. 미래를 아는 주인공은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저자는 '회귀'라는 소재를 활용해 비운의 황제 요안니스 4세를 부활시켰습니다. 재기할 기회를 준 것이지요.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도 소설 속 요안니스 4세처럼 극적으로 부활한 인물이 있습니다. 창창한 20대 시절, 전쟁터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눈이 뽑혀 30여 년간 갇혀 있었죠.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그는 전쟁터에서 다시 활약합니다. 그의 이름은 14세기 동로마 제국의 명장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입니다.


요안니스 4세, 그는 8살에 즉위한 후 11살에 폐위당했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아버지는 황제의 조카, 어머니는 군사령관의 딸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는 1270년대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동로마의 장군 미하일 타르카니오티스와 마리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외할아버지는 기병대 선봉대장이자 제국 총사령관인 알렉시오스 두카스 필란트로피노스로, 그는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지요. 친할머니는 마르타 팔레올로기나로, 당시 재임하던 황제 미하일 8세의 누이였고요. 친가는 황실과 혈연관계이고, 외가는 군대의 최고위직이니 한마디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거죠.


팔레올로고스 가문의 가계도. 황제는 파란색으로, 주인공은 노란색 네모 상자로 채웠다.



추락하는 동로마

치세에 태어났다면, 필란트로피노스는 호의호식하면서 편하게 살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태어났을 시기, 동로마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습니다.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잠시 멸망합니다. 동로마 황제가 요청하면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는데 말이죠. 라스카리스 가문의 테오도로스 1세가 니케아에 다시 제국을 건립하고 1261년, 미하일 8세가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부활합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옛 영광을 잃고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미하일은 수도를 재건하려고 노력했고 그 덕에 콘스탄티노플은 활기를 되찾기 시작합니다.



미하일의 콤플렉스

미하일에게는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11살짜리 요안니스 4세의 눈을 뽑고 폐위시켰다는 점이었죠. 요안니스 4세는 요안니스 3세(요안니스 3세는 테오도로스 1세의 사위입니다. 성은 바타체스이지만 테오도로스의 딸과 혼인하면서 라스카리스 가문의 일원이 됩니다)의 적손이자, 테오도로스 2세의 아들이었죠. 요안니스 3세가 달걀을 팔아 왕관을 만들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자선 사업을 해서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는데, 그 손자를 무단으로 폐위시켰으니 백성들은 미하일이 얼마나 밉겠어요. 미하일에게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눈을 돌렸죠. 미하일은 유럽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시칠리아&베네치아&불가리아 등과 전쟁을 치르면서 외교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결국 동맹 확보를 위해 정교회와 서방의 가톨릭 교회의 통합을 시도하지만, 라틴인을 증오한 백성들은 미하일에게 크게 반발합니다. 백성들은 콘스탄티노플을 황폐화시킨 라틴인의 만행을 뚜렷하게 기억했을 테니까요. 미하일은 교회 통합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면서 더 민심을 잃었습니다. 다행히 혼인과 뇌물 회유 등을 통해 재위 후반기에 서방세계와의 외교 관계를 안정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많은 재정을 소모했기에 동로마는 파산 지경에 이릅니다.


라스카리스 가문의 가계도, 황제는 파란색으로 칠했다.



필란트로피노스의 등장

1282년, 미하일 8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가 단독황제가 됩니다. 안드로니코스는 부황의 실책을 무마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합니다. 먼저 교회 통일을 취소하고,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군을 해체했습니다. 그런데 하필 이때 튀르크족이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했습니다. 몽골에 의해 셀주크 튀르크국이 멸망하자 튀르크족이 터전을 잃었기 때문이죠. 안드로니코스에게는 튀르크족을 진압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결국 아나톨리아 지역 대부분이 튀르크족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렸죠. 안드로니코스는 5촌 조카인 필란트로피노스를 아나톨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고위 궁정 작위를 하사해서 튀르크족을 막을 임무를 부여합니다.


미하일 8세,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하고 팔레올로고스 왕조를 열었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양보다 싸게 팔리는 튀르크 포로들

필란트로피노스는 아나톨리아에서 주로 활동합니다. 그는 아나톨리아에 있는 미시아에서 튀르크군을 물리치고 동로마의 지배권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이동해 님파이온에 근거지로 두고, 계곡을 샅샅이 뒤져 튀르크군의 공습을 저지하였죠. 멜라누디온 요새를 탈환하고, 히에론, 밀레투스 등을 튀르크군으로부터 되찾았고요. 튀르크군에게 필란트로피노스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튀르크군은 몽골군의 공습도 받던 상황이었죠. 양쪽에서 공격받던 튀르크군은 필란트로피노스의 군대에 합류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포로들이 군대에 들어왔는지, 사제이자 학자였던 막시무스 플라누데스는 "양이 이슬람교도 포로들보다 더 비싸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265년경 지도, 보라색이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고 빨간 동그라미를 친 곳이 아나톨리아이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나보고 황제가 되라고?

아나톨리아에서 필란트로피노스의 위상은 급부상합니다. 반면, 유약한 황제 안드로니코스의 위상은 격하되었죠. 높은 세금과 튀르크족의 침략 때문에 신음하던 아나톨리아 주민들은 필란트로피노스더러 황제가 되라고 부추기기 시작합니다. 그는 주민들의 청을 듣고 망설입니다. 선뜻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으니까요. 그는 황제에게 아나톨리아를 떠나고 싶다고 전합니다. 소용없었습니다. 황제는 반란의 기운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도리어 황제는 필란트로피노스에게 리디아 지역을 그의 부하이자 동료인 리바다리오스에게 이양하라고 명했죠. 1295년 여름, 필란트로피노스는 트랄레이스에 있을 동안, 튀르크 장군에게 히에론 지역을 빼앗기게 됩니다. 다행히 히에론을 탈환했지만,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넙니다.


미하일 8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2세, 그의 치세에 튀르크족이 부상했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반란 눈이 멀다

1295년 가을, 필란트로피노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동로마에 퍼집니다.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아나톨리아 주민들에 대한 황실의 푸대접과 끊임없는 침략 탓이었다고 추측합니다. 필란트로피노스도 황제에게 토사구팽 당할까 봐 두려워했을 것이고요. 아무튼,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그는 아나톨리아 지역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제의 동생 테오도로스를 붙잡으면서, 그는 수세에 몰립니다. 동로마의 다른 총독들이 그의 태도를 보고 돌아섰기 때문이죠. 테오도로스의 장인이자 필란트로피노스의 동료였던 리바다리오스는 필란트로피노스를 체포하기 위해 계책을 꾸밉니다. 크리스마스 무렵, 리바다리오스는 그에게 카이사르('부제'라는 뜻, 황제 다음가는 권위를 상징한다)란 칭호를 붙여줄 테니, 나와 만나자고 하죠. 필란트로피노스는 리바다리오스를 찾아가지만, 리바다리오스에게 매수된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고 눈이 뽑힙니다.



난장판이 된 콘스탄티노플

필란트로피노스의 반란이 진압된 후, 아나톨리아 총독은 황제의 사촌인 요안니스 타르카니오티스로 대체됩니다. 20대였던 필란트로피노스는 창창한 나이에 종적을 감췄고, 그의 이름은 세간에서 잊힙니다. 그가 사라지자, 제국은 수세에 몰립니다. 안드로니코스는 해군을 해체한 뒤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용병을 들이기 위해 두 나라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무역하도록 허락했었습니다. 그런데 둘은 서로 무역권을 차지하려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이들을 제지하려 했지만 두 나라는 자기들끼리 강화조약을 맺었죠. 베네치아는 한 술 더떠서 황제에게 보상까지 요구합니다. 안드로니코스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고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무역을 허락합니다.



오스만 제국의 등장

동방에서는 1299년,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제국을 세우면서 튀르크군이 급부상합니다. 하지만 타르카니오티스는 그들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황제의 아들이자 공동황제인 미하일 9세가 직접 군을 이끌기도 했지만, 미하일은 마그네시아에서 참패했습니다. 오스만은 마르마라의 남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니코도미아, 니케아 등 대형 도시들을 유린했고 미하일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했죠. 결국 안드로니코스는 사납기로 유명한 카탈루냐 용병을 고용해서 튀르크군을 막으려 합니다. 카탈루냐 용병은 튀르크군을 몰아내고 키오스, 렘노스 등을 점령했지만, 정복지를 동로마에 돌려주지 않고 자기들이 눌러앉았죠. 더구나 이들은 튀르크군과 협력해 동로마 영역을 노략질하면서 동로마를 파탄으로 빠뜨립니다. 결국 카탈루냐 용병의 수장이었던 루지에로가 암살당했지만, 이에 분노한 카탈루냐는 동로마를 공격합니다. 다행히 1311년, 카탈루냐가 아테네에 공국을 세우면서 동로마를 떠납니다. 하지만 트라키아, 테살로니카 등의 동로마의 비옥한 땅이 황폐화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시조 오스만 1세(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30년 만에 부활한 필란트로피노스

이와 중, 튀르크군은 계속 아나톨리아를 공격했습니다. 아이딘은 에페수스를 차지하고, 오스만은 트리코키아 요새를 점령해 니코메디아와 니케아의 연락선을 두절시켰고, 카라만은 이코니온을 손에 넣었죠. 결국 동로마는 아나톨리아 영역 대부분을 상실했고 황제는 속수무책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1323년, 총대주교 예사이아스는 황제에게 필란트로피노스를 다시 필라델피아로 보내라고 주청합니다. 필라델피아는 아나톨리아에 남은 동로마의 마지막 영토였죠. 그리고 1년 후, 절박했던 안드로니코스는 필란트로피노스를 사면하고 필라델피아의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이제 필란트로피노스는 팔팔한 젊은이가 아니었습니다. 50을 넘긴 중늙은이였죠. 늙고 앞도 보지 못하는 그에게는 싸울 힘이 없었습니다. 황제도 한 번 반란을 일으킨 그를 신임하지 못했죠. 하지만 튀르크군은 필란트로피노스를 두려워하면서도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필란트로피노스가 등장하자 튀르크군은 바로 포위를 풀고 도망갑니다. 그 덕에 충분한 돈과 군대 없이도 리디아 지역을 수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필란트로피노스는 재기에 성공합니다.


1300년경 지도, 분홍색이 동로마(비잔틴) 영역이다. 필란트로피노스가 사라진 후 필라델피아를 제외한 아나톨리아 영역 상당수를 상실했다(출처: 위키백과)



레스보스의 총독이 되다

필란트로피노스는 1327년까지 필라델피아 총독으로 재임합니다. 1년 뒤, 그는 황제에 의해 필라델피아 총독직에서 해임되고 레스보스 섬의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그런데 이 황제는 안드로니코스 2세가 아니었습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였죠. 1320년대, 할아버지와 손자가 내전을 벌였고 손자가 승리합니다. 1328년 안드로니코스 2세가 퇴위하자 안드로니코스 3세가 단독황제로 즉위했고요. 이때 참모는 요안니스 칸타쿠제노스였는데, 그는 새 황제에 걸맞게 새로운 관료들을 뽑고 싶어 했습니다. 필란트로피노스는 50대 노인이었지만, 30여 년간 활동하지 못했고 할아버지의 견제를 받은 데다가 젊을 때 이름을 날렸으니, 손자 입장에서는 그를 총애할만했죠. 그가 한창 활약할 때 안드로니코스 3세와 칸타쿠제노스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귓동냥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안드로니코스 3세도 칸타쿠제노스처럼 필란트로피노스를 신임합니다. 그래서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9년에 키오스 영주 마르티노 자카리아에게서 레스보스 섬을 탈환한 뒤, 필란트로피노스를 레스보스 섬의 총독으로 임명했죠.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 그는 할아버지와 내전을 벌여 황위를 차지했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눈이 멀어도 전장에서 활동하리

1335년, 레스보스는 제노바 영주 도메니코 카타네오에 의해 다시 점령당합니다. 1336월 6월, 안드로니코스는 레스보스를 되찾기 위해 83척의 함대를 소집합니다. 함대는 필란트로피노스가 이끌었죠. 필란트로피노스는 수도인 미틸레네를 제외한 레스보스 전체를 점령합니다. 계속 포위하다가 11월, 도메니코가 항복하자 그는 레스보스는 물론 포카이아까지 점령해 황제에게 바칩니다. 또한 튀르크군에게 뇌물을 주어서 레스보스를 끝까지 보존합니다. 황제는 그의 업적을 크게 치하했죠. 그런데 안드로니코스 3세가 갑자기 사망하고 어린 아들 요안니스 5세가 즉위합니다. 새로운 내전이 발발하면서 동로마는 파국으로 치닫지만, 필란트로피노스가 이를 알았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1340년대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지요.




"그는 팔레올로고스 시대의 벨라사리우스다."
-역사가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1295-1360)


당대인들은 필란트로피노스를 큰 목소리로 극찬했습니다. 동시대의 역사가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는 그를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활약한 명장 벨라사리우스에 빗대기도 했죠. 하지만 저는 어린 나이에 억울하게 눈을 뽑히고 40여 년간 유폐된 황제 요안니스 4세를 떠올렸습니다. 필란트로피노스는 요안니스와 달리 마냥 억울한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반란을 일으켜서 아나톨리아 지역을 정복했던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눈이 뽑히고 30여 년간 갇혀 지내다가, 극적으로 부활한 필란트로피노스의 모습에서 소설 『동로마의 황제로 회귀하다』의 요안니스 4세가 얼핏 보였습니다. 저자는 필란트로피노스처럼 요안니스 4세에게 부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소설을 집필한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사실 필란트로피노스가 난세가 아니라 치세에 태어났다면, 부활할 기회가 있었을지 의문이 듭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필란트로피노스를 사면한 이유는 그의 죄를 용서했다기보다, 해군을 해체한 탓에 튀르크군의 침략을 막을 군인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생각하니,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기회를 얻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회를 얻은 후에는 자만하면 안 되고요. 필란트로피노스가 사면 받은 뒤, 나이가 들어도, 눈이 멀어도 제국을 위해 헌신한 이유는 자신의 죄를 반성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한 번 얻은 기회를 다시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면받은 후, 극적으로 제국의 영토를 탈환했어도 자신이 차지하지 않고 황제에게 반환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요.


주군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필란트로피노스는 브리엔니오스, 악수흐와는 결이 약간 다릅니다. 는 쇠락하는 동로마 제국에게 호흡기를 붙여준 명장이었지만, 이미 한 번 반란을 일으킨 전적이 있지요.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필란트로피노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개인의 야망 때문이라기보다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저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하일 8세 이후 콘스탄티노플 재건에 주력을 기울인 나머지, 아나톨리아 백성들은 중앙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된 채 튀르크군의 침략에 시달렸지요.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필란트로피노스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전적은 필란트로피노스의 업적에 오점을 남겼지요. 필란트로피노스도 자신이 실책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는 극적으로 사면 받은 후에 제국을 위해 충성을 바치다가 죽었지요. 좋게 말하면 백성을 구하겠다는 포부, 나쁘게 말하면 자만심에 차올라 일으킨 반란 때문에 파국으로 치달았다가 30여 년 후 복직했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다시 복직했다는 기쁨에 차올랐을까요. 아니면, 파멸된 제국을 보고 씁쓸함을 느꼈을까요. 선뜻 궁금해집니다.


플라비우스 벨라사리우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활약한 장군으로 훗날 명장이자 충신의 대명사가 되었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참고 문헌 및 자료>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가람기획, 2003.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바다출판사, 2016.

Bartusis, Mark C, 『The Late Byzantine Army: Arms and Society 1204-1453』, Philadelphia, Pennsylvan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7.

Nicol, Donal M,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 1261 - 1453(Second ed.)』, London: Rupert Hart-Davis Ltd, 1993.

Radivoj, Radic (16 September 2003). "Alexios Philanthropenos". Encyclopedia of the Hellenic World, Asia Minor. Athens, Greece: Foundation of the Hellenic World.

Wikipedia, Alexios Philanthropenos, https://en.wikipedia.org/wiki/Alexios_Philanthropenos

Wikipedia, Andronikos II Palaiologos,

https://en.wikipedia.org/wiki/Andronikos_II_Palaiologos

Wikipedia, Andronikos III Palaiologos,

https://en.wikipedia.org/wiki/Andronikos_III_Palaiologos

Wikipedia, John IV Laskaris, https://en.wikipedia.org/wiki/John_IV_Laskaris

Wikipedia, Michael VIII Palaiologos, https://en.wikipedia.org/wiki/Michael_VIII_Palaiolo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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