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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Sep 22. 2021

뛰어난 역사가, 처가의 그늘에 묻힌 충신

동로마(중세):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배경: 십자군들(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1097년 초반,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 급보가 도착합니다. 무려 10만 명이 넘는 십자군 부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이었지요. 이미 민중 십자군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알렉시오스의 머리가 지끈해집니다. 동방의 셀주크 튀르크를 몰아내기 위해 교황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는데, 생각보다 부대 규모가 커져서 골칫거리가 되어버렸죠. 그래도 알렉시오스는 농노와 아녀자, 노인으로 이루어진 민중 십자군과 달리 규율을 갖춘 정규군이니 조금 낫지 않을까 위안을 삼습니다. 그는 십자군의 군주들에게 충성 서약을 맺어서, 동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 점령한 땅은 동로마에게 넘기라고 요구합니다. 그러자 군주들은 갈갈이 날뜁니다. '네가 뭔데 우리한테 충성을 요구하냐고' 반발했죠. 특히,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이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맺은 몸이라고 외쳤습니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여버린 이 상황. 알렉시오스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알렉시오스의 밑에서 활약한 동로마의 충신,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의 일대기를 통해 알려드리겠습니다.




파탄에 이른 제국

1차 십자군을 요청하면서 세계사 교과서에 존재감을 드러낸 알렉시오스 1세. 그는 사실 '콤니노스 중흥기'의 스타트를 끊은 명군이었습니다. 알렉시오스는 파탄 직전에 이른 동로마에게 호흡기를 붙여서 300년 이상 지속될 원동력을 불어넣었죠. 알렉시오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 동로마는 몰락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바실리오스 2세 이후 이슬람 세력의 진군과 노르만 세력의 습격으로 아르메니아 영역과 이탈리아 영역을 상실하는 등 영토가 좁아지고 있었죠. 쿠데타를 일으켜 콤니노스 왕조를 개창한 이사키오스 1세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해 국고를 채우고 군대를 개혁했지만, 쿠데타를 하면서 국경을 지키던 군대를 수도로 불러들이는 바람에 튀르크족이 국경선을 침범하기 시작했죠. 결국 시민의 지지를 잃은 이사키오스는 두카스 가문의 콘스탄티노스를 후계자로 지목한 뒤 퇴위하고, 콘스탄티노스가 콘스탄티노스 10세로 즉위해 두카스 왕조를 개창합니다. 콘스탄티노스 10세 역시 몰려오는 튀르크족을 막지 못했습니다. 후임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다시 아르메니아 영역을 수복하지만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패배한 뒤 포로가 되면서 동로마 제국의 위신은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다행히 로마노스 4세가 튀르크의 술탄과 평화 조약을 맺으면서, 아르메니아를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노스는 동로마로 돌아가자마자 쿠데타로 제위를 박탈당했죠.


알렉시오스 1세, 그는 '콤니노스 중흥기'의 스타트를 끊었다(출처: 나무위키)



알렉시오스 1세의 즉위

로마노스 4세의 뒤를 이은 미하일 7세는 전쟁의 여파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물가가 폭등하는 바람에 '파라피나키스(-1/4이라는 뜻)'라는 별칭까지 붙었죠. 예전에는 노미스마(당시 동로마 제국의 화폐) 1개 당 밀 1되씩 살 수 있었지만, 물가가 폭등하는 바람에 금 1개로 밀을 3/4되밖에 못 샀기 때문이지요. 미하일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터뜨립니다. 이때 두각을 드러낸 사람은 대(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였습니다. 전자는 동부를, 후자는 서부를 점령하면서 비등비등한 세력을 유지했죠.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지지와 유능한 장군 알렉시오스의 도움을 토대로 보타니아니스가 정권을 잡고 니키포로스 3세로 즉위합니다. 하지만 브리엔니오스의 세력을 진압하느라 군대를 국경에서 불러들이는 바람에 튀르크족의 침략은 계속되었습니다. 각지에서 반란도 멈추지 않았고요. 이와 중, 후계 다툼이 발생합니다. 니키포로스 3세는 미하일 7세의 황후 마리아와 혼인했는데, 마리아는 미하일 7세하고 낳은 아들을 황위에 올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니키포로스 3세는 전임 황제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기회를 노린 알렉시오스는 마리아와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결국 니키포로스는 퇴위하고 알렉시오스가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하죠.     


두카스 가문(우)-콤니노스 가문(좌)의 가계도, 두 가문은 알렉시오스 1세와 이리니의 혼인으로 연을 맺었다.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다

황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1세는 경제 개혁을 단행합니다. 먼저 화폐 가치가 하락한 노미스마의 유통을 허락하되, 7/8의 금을 함유한 화폐 히피르페론을 새로 주조한 뒤, 히피르페론을 세금으로 거두어서 국고를 채웁니다. 그 돈으로 군대의 기강을 키우고 함대를 증강합니다. 이때 알렉시오스는 노르만 군대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아직 군대 재편을 끝내지 못한 그는 베네치아 용병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매수해 노르만의 침공을 막아냅니다. 마침, 노르만의 수장 기스카르가 죽으면서 전쟁이 막을 내렸죠. 하지만 서방에서 외적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이제이' 전법을 활용합니다. 페체네그족의 침공 때는 쿠만족을 이용해 제압하고, 쿠만족의 침공 때는 셀주크 튀르크를 이용해 제압했죠. 하지만 오랫동안 서방 전선에 집중하다 보니 동방 전선은 방치되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튀르크군의 침공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알렉시오스는 로마 교황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합니다.



브리엔니오스의 등장

하지만 교황은 다른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전 유럽인이 힘을 모아 이교도 세력과 대결하는 성전聖戰을 펼칠 생각이었죠. 이 소식을 듣고 농민들부터 영주, 기사, 군주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부대의 규모가 커졌고 알렉시오스는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떠맡게 되었죠. 알렉시오스는 한때 동로마 군대와 싸웠던 노르만 출신 보에몽도 참여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죠. 그는 십자군의 군주들에게 충성 서약을 맺고 정복한 땅을 동로마에 넘겨줄 것을 요구합니다. 예상과 달리 보에몽은 기꺼이 서약을 맺지만, 툴루즈 백작 레몽과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강하게 반발합니다. 고드프루아의 군대는 황제를 향해 화살을 쏘기까지 합니다. 알렉시오스는 자신의 사위인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에게 저들을 진압하라고 명령합니다.


고드프루아를 접견하는 알렉시오스 1세(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반역자의 자손에서 황제의 사위로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1062년, 아드리아노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또는 할아버지, 백부로 추정) 대(大)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는 니키포로스 3세와 겨루다가 알렉시오스에게 진압당하고 눈이 뽑혔죠(두번째 문단에서 나온 브리엔니오스 맞습니다). 소(小)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이하 브리엔니오스)는 알렉시오스에게 맡겨집니다. 자신의 집안이 저지른 죄를 알았던 탓일까요? 그는 알렉시오스가 니키포로스 3세에게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공을 세워서 알렉시오스가 왕이 될 수 있도록 충성을 바쳤습니다. 노르만과의 전투에서 알렉시오스의 후방을 지원하기도 했죠. 알렉시오스의 총애를 받은 그는 황녀 안나 콤니니와 혼인해서 황제의 사위가 됩니다. 반역자의 자손이 황제 다음가는 권력을 갖게 된 것이죠.



고드프루아의 공성전을 진압하다

아무튼, 브리엔니오스의 대표적인 공적은 고드프루아의 공성전을 진압한 것입니다. 고드프루아의 군대가 공격하자, 브리엔니오스는 성벽 꼭대기에 숙련된 궁수들과 병사들을 배치했죠. 화살을 퍼붓는 대신, 빗나가게 쏘라고 명령합니다. 같은 기독교인을 죽이지 않고 위협해서 황제의 편으로 삼으려는 계책이었죠.

하지만 황제를 대놓고 모욕하는 십자군이 있었습니다. 브리엔니오스는 그들을 직접 화살로 쏩니다. 그 모습을 본 동로마군의 사기가 치솟 황제는 정예병을 투입합니다. 마침, 고드프루아 군대는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다른 십자군 군주들을 포섭하고 해협을 봉쇄해서 고드프루아 측에 식량이 지급되지 못하게 했거든요.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오자, 결국 고드프루아는 항복하고 황제에게 충성 서약을 맺습니다.


1차 십자군 원정의 지도자 고드프루아 드 부용(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일단 성공했지만

1097년, 1차 십자군 원정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셀주크 튀르크를 패배시키고 아나톨리아(해안 지역 한정), 안티오크, 니케아 등 옛 동로마의 영역뿐 아니라 성지였던 예루살렘까지 탈환하였죠. 하지만 십자군은 자신들이 얻은 영지를 동로마에게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군이 니케아를 공격하기 전에 알렉시오스가 셀주크 튀르크에게 항복 권유를 했고, 니케아 성에 동로마의 국기를 꽂아놨거든요. 십자군은 탈환한 지역을 동로마에게 돌려주지 않고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크 공국 등을 세웠죠. 알렉시오스는 십자군, 특히 보에몽에게 배신감을 느낍니다. 보에몽은 알렉시오스에게 가장 먼저 충성 서약을 맺었는데, 막상 안티오크를 손에 넣으니 가장 먼저 알렉시오스와의 약속을 어겼거든요.



데불 조약을 주도하다

결국 알렉시오스와 보에몽이 전쟁을 치릅니다. 보에몽이 패배했죠. 황제와 보에몽이 협상을 하는데, 이때 브리엔니오스가 활약합니다. 1108년, 알렉시오스는 보에몽에게 데불 조약을 맺어서 평화를 유지하자고 말하지만, 보에몽은 순순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브리엔니오스는 보에몽을 설득합니다. 브리엔니오스의 아내 안나 콤니니가 집필한 『알렉시아드』에 따르면, 공적이든 사적인 자리든 브리엔니오스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는 자는 없었다고 하죠. 브리엔니오스의 설득을 들은 보에몽은 안티오크를 동로마에게 넘기고 알렉시오스의 봉신이 되기로 맹세합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보에몽은 실의에 빠져 죽게 됩니다.



필로밀리온 전투에서 공을 세우다

보에몽이 죽은 뒤, 동방의 셀주크 튀르크는 다시 전쟁을 개시합니다. 알렉시오스는 병세가 깊어졌지만, 아나톨리아 지역 전부를 수복하기 위해 1117년 이슬람군과 다시 전쟁을 치릅니다. 브리엔니오스는 황제와 같이 출정합니다. 그러나 좌익 지휘관인 안드로니코스가 화살을 맞자 동로마군은 위기에 빠집니다. 이때 우익 지휘관인 브리엔니오스는 술탄의 근위대가 있는 중앙으로 돌진해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힙니다. 술탄은 간신히 도망치고 튀르크군은 반격을 준비하지만, 이미 중앙군이 궤멸당한 터라 소용이 없었지요. 결국 술탄은 항복 문서를 보내고 알렉시오스는 아나톨리아 중남부의 지배권을 확보합니다.


1차 십자군 원정의 지도자 타란트의 보에몽(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황권을 안정시켜야 한다

알렉시오스는 오랫동안 전쟁을 치른 탓에 내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세력가들이 황위를 장난처럼 주고받은 탓에 너도나도 황제를 자청하는 상황이었죠. 알렉시오스는 두카스 가문의 실책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자신도 두카스 가문의 사위였기에 두카스 가문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황위에 오르는 조건으로 마리아의 아들 콘스탄티노스를 공동황제로 삼겠다고 마리아와 계약도 했었고요. 알렉시오스는 딸 안나(브리엔니오스의 아내입니다. 콘스탄티노스와의 약혼이 파기된 후 브리엔니오스와 혼인했죠)와 콘스탄티노스를 약혼시키기까지 하면서 계약을 지키려했지만, 1087년, 아들 요안니스가 태어나자 알렉시오스는 마리아와의 약속을 깨고 콘스탄티노스를 공동황제 직위에서 박탈한 뒤 약혼도 파기합니다. 머지 않아 콘스탄티노스가 죽자, 그는 장남 요안니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합니다. 황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장자상속제가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후일을 대비해, 마리아와는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요.



충심을 지키다

안나는 남동생이 공동황제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그녀는 요안니스가 주정뱅이라든가, 방탕해서 황제가 되기에 모자라다는 등 온갖 중상모략을 펼쳤지만 알렉시오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118년, 알렉시오스가 죽자 요안니스가 단독황제가 되었습니다. 안나는 브리엔니오스를 황제로 즉위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합니다. 남편은 부황에게 평생 충성을 바쳤고 군재도 뛰어났으니, 황제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하지만 쿠데타 당일, 브리엔니오스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계획에 동참하지 않고 현황에게 충심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결국 쿠데타는 실패하고 요안니스는 안나를 처벌하려 합니다. 브리엔니오스는 황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내를 선처해달라고 청합니다. 결국 안나의 재산을 몰수하고 수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그치고 그녀는 수녀원에서 여생을 보냅니다.


『알렉시아드』의 저자 안나 콤니니, 소설 『비잔티움의 안나』의 표지이다(출처: 아마존)



『알렉시아드』의 초안을 집필하다

매형의 충심에 감동한 요안니스는 브리엔니오스를 적극 등용합니다. 그는 아나톨리아 남부의 원정 등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점차 몸이 안 좋아져 요양하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이때 알렉시오스의 일대기를 집필하기 시작했습니다. 원고는 브리엔니오스 사후 안나가 『알렉시아드』를 집필할 때 초안으로 활용되었죠. 1136년, 안티오크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노구를 이끌고 황제와 함께 출정했고 안티오크 공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1년 후 시리아로 진격하던 중 지병이 심해져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당해 말 62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사실, 브리엔니오스가 쿠데타 당일에 왜 미온적으로 대처했는지 불분명합니다. 안나는 남편이 경솔하면서 소심한 성격이기 때문이라고 기록했고,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브리엔니오스가 처남을 직접 죽이거나 눈을 뽑을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습니다.  12세기 비잔티움의 영웅과 로마인들: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기록한 사료의 저자 레오노라 네빌은 선황의 은덕을 잊지 못했기에 차마 선황의 아들에게 칼을 겨누지 못했다고 기록했고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요안니스 2세가 매형의 충심에 감동해서 그의 업적을 치하했다는 점입니다. 결론적으로, 브리엔니오스의 행동 덕에 내전의 재발을 막아서 황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충심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혔습니다. 그의 주위에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요. 브리엔니오스의 장인은 '콤니노스 중흥기'를 이끈 황제 알렉시오스 1세였고, 아내는 동로마 제국의 대표 역사서로 꼽히는 『알렉시아드』를 집필한 안나 콤니니였죠. 브리엔니오스는 '안나의 유약한 남편' 정도로 기억될 뿐이었습니다. 고드프루아 공성전이나 데불 조약, 필로밀리온 전투에서도 알렉시오스의 업적만 언급되고요.


그래도 브리엔니오스의 업적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의 아내 안나였지요. 안나는 『알렉시아드』의 서문에서 남편의 미완성된 초고를 바탕으로 아버지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 원고를 집필했다고 명시했습니다. 쿠데타가 저지됐을 때, "내가 남자여야 했다", "남편이 너무 소심하다" 라고 투덜거렸지만, 남편이 먼저 죽었을 때 남편을 사랑한다고 토로하기도 했고요. 반역자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 아내보다 21살이나 많았지만 황녀인 아내를 떠받들고 산 덕택일까요? 아내의 쿠데타가 발각되었을 때 몸소 아내의 반란을 저지하고 황제에게 선처를 구명한 덕택일까요? 아니면, 순수하게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일까요? 정답은 모르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브리엔니오스는 권력보다 나라의 안정을 우선시했고, 아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요. 


브리엔니오스의 사료를 토대로 만든 책의 표지(출처: 아마존)



<참고 문헌 및 자료>

김태권,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비아북, 2011.

워렌 트레드골드, 『비잔틴 제국의 역사』, 가람기획, 2003.

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바다출판사, 2016.

Angold, Michael,  Church and Society in Byzantium under the Comneni 1081–1261,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Asbridge, Thomas, 『The First Crusade: A New History, Oxford, 2004

Choniates, Nicetas,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ēs』,  Detroit: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84.

Comnene, Anna, 『The Alexiad』, Wikisource, https://en.wikisource.org/wiki/The_Alexiad

Neville, Leonora, 『Heroes and Romans in Twelfth-Century Byzantium: The Material for History of Nikephoros Bryennio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Wikipedia, Alexios I Komnenos, https://en.wikipedia.org/wiki/Alexios_I_Komnenos#External_links

Wikipedia, Anna Komnene, https://en.wikipedia.org/wiki/Anna_Komnene

Wikipedia, Battle of Philomelio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Philomelion

Wikipedia, First Crusade,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Crusade

Wikipedia, Isaac I Komnenos, https://en.wikipedia.org/wiki/Isaac_I_Komnenos#Fiscal_reforms

Wikipedia, John II Komnenos, https://en.wikipedia.org/wiki/John_II_Komnenos

Wikipedia, Nikephoros Bryennios the Younger, https://en.wikipedia.org/wiki/Nikephoros_Bryennios_the_Younger#cite_not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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