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사슴과 녹용, 되살아나는 생명에 대하여
지난 9월, 성황리에 막을 내린 2025 키아프서울.
국내 젊은 작가들의 선전 속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눈에 띄었던 작품은 김산 작가의 ‘본향’ 연작이었다. 그의 고향은 제주도, 그중에서도 최남단의 작은 도시 모슬포. 이곳은 제주 4.3 사건의 주요 격전지이기도 하다. 김산 작가의 증조부는 4.3 항쟁에 연루되어 희생되었고 당 조모는 해녀로 일생을 보내며 제주바당 변덕에 울고 웃었다. 제주에서 태어나 학업까지 마친 그의 작품에는 자연스레 이러한 가족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흰 사슴, 생명과 신성의 상징
제주의 숲과 풍경, 특히 풍파를 견디고 굳건히 서 있는 고목들을 주로 그리던 그의 작품에 언젠가부터 한 마리의 흰 사슴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득한 거리에서 물끄러미 관객을 바라보는 흰 사슴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급성 심근경색을 겪으며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한 후 작가 마음속에 자리한 새로운 메타포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흰 사슴은 신령하고 성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제주에서 전해지는 한라산 백록담의 신선에 관한 민담에 등장하는 하얀 사슴은 고귀함과 신성함, 평화를 상징한다. 실제로 알비노 사슴이 존재하기도 하는데 그 확률은 3만분의 1로 매우 희귀하다.
동양문화에서 사슴은 특히 장수의 상징이다. 중국 도교 전통에서 사슴은 불로초를 먹는 영물로 여겨졌으며, 장생도에서 십장생 중 하나로 등장한다. 특히 흰 사슴은 영원성을 상징하며 사슴이 1000년 이상을 살면 흰빛으로 변한다는 고서의 내용도 전해진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작가는 생명에 대한 염원을 꾹꾹 담아 그간 그려오던 원시림 곶자왈 한가운데에 흰 사슴을 그리기 시작했다. 햇수가 거듭될수록 곶자왈은 환상숲이라는 별칭답게 몽환적인 색으로 펼쳐지며 흰 사슴은 더욱 굳건하고 강인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흰 사슴과 녹용, 생명의 은유
사슴을 떠올리면 녹용이 연상되는 것은, 한의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직업적 본능일지도 모르겠다. 녹용은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표적인 보양 보혈 약재이다. 매년 떨어지고 다시 돋아나는 사슴의 뿔이 완전히 골질화되기 전에 잘라 약재로 사용하며 절단 위치에 따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뉜다. 이 중에서 가장 보혈 강장 기능이 왕성한 부분은 상대이며 그중에서도 제일 끝에 있는 하얗고 치밀한 부분을 가루로 만든 분골은 어린이 성장보약에는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가끔 국산 녹용을 선물받았다며 들고 와 물어보시는 환자분들이 계신데 다른 건 몰라도 녹용만큼은 국산은 약재로서의 효능이 없으며 식약처에서도 한의원에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주로 뉴질랜드와 러시아산을 쓰는데 그중에서도 시베리아산을 최고로 친다. 극한 환경에서 자란 시베리아 사슴은 뿔 성장 속도가 느리지만, 조직이 단단하고 혈관이 풍부해져서 상대 부위의 생명력과 효능이 최고로 발현된다. 유효성분이 최고로 풍부하기 때문에 으뜸 원(元)자를 써서 원용(元茸)이라고도 부른다.
인류의 본향, 언젠가는 모두 돌아갈 곳
김산 작가의 ‘본향’은 단순히 고향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주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을 뜻하기도 하며 작가노트에 따르면 인간의 태생에 대한 근본 물음을 던지는 대상, 인간의 삶의 본질과 염원을 아우르고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매개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가 그리는 곶자왈숲은 분명 존재하지만 또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저편, 어쩌면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해온 태곳적 생명의 원천이 자리한다. 작가는 어머니 같은 그 자연을 때로는 따스한 햇살을 머금은 연두빛으로, 때로는 새벽의 어슴푸른 빛으로 담아낸다. 최근 작업의 오로라 같은 신비로운 색감은, 한때 척박하고 버려졌던 땅이어서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태초의 생명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곶자왈의 본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김산 작가가 이번 키아프에 출품한 작품은 모두 완판되었다. 갤러리 대표님은 얼마 전 한 한의사 고객이 작품을 구입하며 ‘흰 사슴을 보면 괜히 녹용이 생각난다’며 웃었다고 귀띔했다. 한의사임을 밝히진 않았지만 나 또한 김산 컬렉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만물이 깨어나는 시간인 새벽의 촉촉함, 그의 작품에는 처음 등장한 달과 곶자왈이 품고 있는 물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폭포, 광활한 자연 속에서 뻐기지 않지만 당당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백록, 드리핑 기법으로 표현된 반딧불이는 하늘까지 수놓여 별이 되었다. 놓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숲을 유달리 좋아하셨던, 언젠가는 돌아갈 곳으로 가는 것 뿐이라고 늘 말씀하시던 엄마의 모습을
나를 바라보고 있는 흰 사슴에 투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