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 호암미술관 전시
올해 가을은 국제갤러리와 호암미술관에서 비슷한 시기에 열린 루이스 부르주아 전시로 풍성했던 계절이었다. 공동으로 개최한 전시가 아님에도 호암미술관은 작가 생애 전체를 아우르는 회고전, 국제갤러리는 작가의 말년 작품에 집중하는 형태로 작가에 대한 이해에 깊이를 더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지난 20-21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출신의 여성 작가로 조각과 설치, 회화와 글을 통해 성, 가족, 무의식, 트라우마 등을 주제로 다룬다. 거의 한 세기를 살아내면서 펼친 그녀의 방대한 작품세계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예술로 극복해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는데, 그중 부모-자녀 관계는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국제갤러리 전시 <Rocking to infinity>라는 제목은 작가의 글에서 가져온 문구로, 아이를 품에 안아 달래는 어머니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것이다. 무한성을 뜻하는 infinity라는 단어는 호암미술관 전시 제목 <덧없고 영원한>과 이어지며 두 전시의 연결고리를 암시한다. 전시장 4개의 벽면을 꽉 채운 과슈 드로잉은 임신, 출산, 수유, 가족 등 엄마로서의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듯하다. 과슈 특유의 번짐이 돋보이는 날것 느낌의 붉은색은 출산 과정에서 여성이 흘리는 피, 그리고 생명력을 연상시킨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기쁘고 행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고 불안한 그 과정을 간결한 묘사와 강렬한 색채로 구현해 냈다.
수많은 과슈 드로잉 중 유독 내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꽃 같은 형상으로 그려진 엄마의 모습과 이제 막 세상으로 나오려고 하는 엄마 뱃속 아기. 엄마의 목 주변을 마치 시들어버린 꽃잎 같은 collar가 옥죄듯 둘러싸고 있다. 꽃잎이 시들어야 열매가 맺히듯 아이들은 엄마의 봄날을 먹고 자라난다.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잠시 내려두고 새로운 생명을 세상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과정. 그것이 바로 출산과 육아이다.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체형 변화, 통증, 심리적 기복 등 여러 변화를 경험한다. 이 벅찬 과정을 견디도록 여성의 몸에는 출산 전후로 특정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고 아기들은 귀여움이라는 생존 전략을 가지고 어른들의 돌봄 본능을 이끌어낸다.
아이가 생기고 난 후 부부, 특히 여성의 삶은 대전환을 맞이한다.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은 기쁨과 고통의 널뛰기다. 임신과 출산에서 대량으로 소진한 기혈은 양육 초기의 밤낮 없는 수유와 수면부족으로 더욱 고갈된다. 가족의 지지와 적절한 도움이 없으면 정신적 소진은 산후우울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아이를 돌보는 것에도 영향을 준다. 한의학에서는 산후우울증을 출산으로 인한 기혈부족과 간울 (감정의 울체)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산모의 기력을 회복시키는 것부터가 치료의 시작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부모, 특히 엄마는 물리적으로 구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부모는 평생 자식을 마음에서 놓지 못하고, 자식 또한 부모의 기대와 사랑 속에서 다른 형태의 구속을 경험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놓을 수 없고, 놓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를 억압하게 되는 구조. 부모-자녀 관계는 이렇게 애착과 속박의 양가감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호암미술관에 전시된 2001년작 <모자상>을 보자. 흔히 모자상이라 하면 연상되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 대신 이 작품은 보기 불편할 정도로 처절하다. 다리와 팔 한쪽이 없는 엄마는 위태롭게 서 있고 아이는 관심을 요구하며 엄마 다리 한쪽에 매달려 있다. 아플 시간도 없는 엄마는 표정을 잃어버렸다. 야누스적 모성의 절정은 루이스 부르주아의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 <마망 Maman>에서 드러난다. 프랑스어로 엄마를 뜻하는 <마망>은 스테인리스 스틸과 대리석 등으로 제작한 대형 거미 조각으로 이번 호암미술관 전시에서는 총 세 점이 나왔다.
전시장 안에서 만난 <마망>은 바닥에 낮게 웅크린 형태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여덟 개의 다리. 날카롭게 뻗은 뾰족한 다리 끝으로 위태롭게 서 있는 거미는 부르주아에게 어머니를 상징한다. 태피스트리 복원가였던 어머니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손끝에서 실을 뽑아 집을 짓는 거미의 모습으로 환생했다. 루이스 부르주아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불륜을 목격했고 짐작건대 어머니는 그 모든 상황을 견뎌내며 아이들을 지켰을 것이다. 어머니의 우울과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는 어리고 예민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것은 평생 예술의 원천이 되었다. 거미는 포식자이자 보호자의 복합적인 이미지로 가정에서의 엄마의 모습과 결을 같이 한다. 따뜻하면서도 엄격하고 헌신적이면서도 이기적인 모성.
장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설치된 <마망>은 좁은 공간의 실내 작품과 달리 더 자유로워 보인다. 섬에 설치되어 평소 관람객이 접근할 수 없는 <마망>을 시야에 두고 걸으며 루이스 부르주아가 평생을 두고 탐구한 부모-자녀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기쁨과 환희, 책임감과 죄책감, 애증과 억압, 이루지 못한 꿈, 기대와 실망.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교차하던 순간 문득 떠올랐다. 꿈속에서 홀가분하게 웃는 엄마의 표정, 그리고 “나 간다”는 인사.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자유가 되었을까.
부모의 죽음 뒤에야 성인 아이는 온전한 어른이 된다.
위대하고 위태롭게 버텨낸 모성 덕분에.